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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20화 (169/1,000)

00220  29. 행주대첩과 한성탈환  =========================================================================

“그건 아니 되오. 그대들은 모두 대명 황제폐하께 끌고 가기로 했소. 황상께서 그대들의 죄를 판단하시되, 자비로운 분이시니 아마도 작은 나라의 왕이나 다름없는 다이묘를 죽이지는 않으실 거요. 다만 명나라 사람들에게 구경꺼리가 될 각오는 해야 되겠지요.”

“알겠습니다, 전하. 지금까지 제가 지은 죄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해 운명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기리시탄 해적영주들이 원래 왜구였던 병사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조선에 폐를 끼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간단히 언급하며 사과했지만 그 동안 왜구들에게 당하거나 가족을 잃은 조선인들은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민호는 유족들을 대신할 자격이 없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니시가 이끄는 1군 소속 여러 해적영주의 병사들은 포로가 된 자도 얼마 없지만 명나라에 가면 즉시 참수당할 가능성이 컸다. 왜구라면 명나라에서도 치를 떨기 때문이다. 현재 5천에 달하는 왜군 포로는 영주별, 지역별, 신분별로 분류하고 있었다. 큐슈 북서부 해적 영주들이 데리고 온 왜구들은 특별 감시를 받았다.

“그리고 화약 값으로 팔려간 일본인 처녀들을 전하께서 거두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약을 급히 구하느라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 일이 항상 마음에 남았습니다.”

“일본인 처녀들은 고산국에서 열심히 일하며 잘 살고 있소. 고산국에 남자가 부족해 시집을 일찍 못 가는 게 유일한 불만일 것이오.”

고산국이 개국 초기에는 남초현상이 극도로 심했는데 일본인 처녀들 덕택에 순식간에 성비가 역전됐다. 생활력 강한 조선 처녀들처럼 일본 처녀들도 다들 열심히 일을 해서 이민호는 흡족했다. 미카가 같은 여성으로서, 또한 동포로서 일본 처녀들을 잘 보호해줬고 혜영이 그런 미카를 지원해줬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제 양녀 주리아를 키워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남산의 어느 기와집에서 제 가신들이 보호하고 있습니다.”

“세례명이 줄리아요? 알겠소. 마카오에 일찍 보내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게 하겠소. 적당히 크면 마카오대학에서 공부시키겠소.”

이민호도 줄리아 오타아가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워낙 빼어난 미인이라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측실로 삼기 위해 노력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것 같았다.

마치 성녀 분위기가 나는 여자인 것 같으니 일찍부터 교육시켜 나중에 훌륭한 수녀가 되면 괜찮을 것 같았다.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 신부들과 라틴어 혹은 그들의 언어로 신학토론을 하면 서양에서 동양을 은근히 깔보는 나쁜 버릇도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러나 줄리아는 지금은 꼬마였다. 이민호에게 잘못 걸렸으니 앞으로 평생을 두고 죽어라 공부해야 할 것이다.

“고산국에서도 최고 인재들이나 갈 수 있다는 마카오대학에 보내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전하의 은덕으로 인해 이제 저는 주님이 인도해주시는 길로 안심하고 갈 수 있겠습니다.”

소서행장은 독실한 교인이라서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양녀를 보호해준다고 하자 마지막 근심이 사라져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지 못한 사위인 종의지, 소 요시토시는 이민호와 고니시가 나누는 대화중에도 몹시 흔들리는 듯했다.

“전하!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저는 대마도주입니다. 저는 일본의 신하인 동시에 조선의 신하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제발 조선국 국왕전하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왜? 조선 국왕전하의 발바닥이라도 핥으려고?”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지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저는 할 일이 많습니다. 명나라로 끌려가서는 절대 안 됩니다!”

“웃기지 마.”

무장으로서 비굴한 자와는 대화할 필요를 못 느꼈다. 종군승 겐소하고도 이야기할 것이 없었다. 괜히 이상한 논리에 휘말린다면 골치 아플 것 같아 이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의지가 절규를 터뜨렸으나 이민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세 분 모두 일단 조선국 국왕전하를 뵙고 나서 대명제국의 황도를 구경하게 될 거요. 포로가 된 부하들에 대한 처우도 잘해드릴 테니 염려 마시오.”

명나라 황제가 포로들에게 어떤 결정을 내리든 상관없었다. 이민호는 그저 수급과 포로를 황궁에 전해주면 명나라의 제독총병관으로서 할 일을 다하는 셈이었다.

말을 마친 이민호가 미련 없이 천막에서 나왔다. 조선 임금에게 다이묘 포로들을 보여주는 자리에서 아무래도 소 요시토시는 부상 치료를 핑계로 빼야 할 것 같았다. 귀가 얇은 선조 임금이 종의지의 말을 믿고 왜군을 상대로 이상한 공작을 한답시고 설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천막에서 나오니 호위대가 말을 타고 출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감동이 입은 옷은 전형적인 양반가 종의 베옷이었다. 이민호가 몹시 부럽게도 여진족 출신인 감동은 추위를 거의 타지 않았다.

“도련님! 이미 밤이 깊었습니다. 어서 서소문 저택으로 가시지요. 도련님을 모실 준비가 됐답니다.”

“응? 그런데 너 옷 입은 게 왜 그래?”

감동이 실실 웃으면서 이민호가 탄 말의 고삐를 잡았다. 기병대장이 아닌 하인 복장을 한 감동을 보니 몇 년 전 시절이 떠올랐다. 감동도 마찬가지 생각으로 이런 신분 낮은 자의 복장을 한 것 같았다.

“헤헤! 오랜만에 서소문에 오니 옛날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주둔지에서 거리가 가까워 서소문 집에 금방 도착했다. 민영에게 들은 것과 달리 대문은 멀쩡했다. 자세히 보니 그새 고친 모양이었다. 행랑채는 문이 떨어져 나가는 등 조금 난장판이었지만 중문으로 들어서니 창문에 창호지까지 제대로 다 붙어 있었다.

그 사이에 감동과 감불 등 하인 노릇을 했던 이들이 급히 저택을 수리했던 모양이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이민호가 살짝 놀랐다.

“온돌에 불을 때고 있느냐? 오늘 밤은 오랜만에 등허리가 아주 호강하겠구나. 고맙다!”

이민호가 말로는 온돌이라 했지만 전통적인 구들장 돌을 덥히는 방식이 아니었다. 이 시대 온돌은 기술자에 따라 품질 차가 너무 커서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르지 않았다.

이민호는 마치 현대 한국의 주택처럼 동파이프를 바닥에 깔고 온수를 돌려 방바닥과 방 안 공기를 동시에 덥히는 현대식 온돌을 깔았다. 물통을 높이 달아서 언제든 더운 물로 간단한 샤워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다만 물통에 물을 채워줘야 하는데 목욕하다 보면 가끔 까먹어서 탈이었다.

“식사를 준비 중이니 목욕부터 하십시오.”

“오냐! 고맙다. 마치 몇 년 전 같구나.”

그러나 여진족 포로 아이들이 종살이 비슷하게 지낸 것은 겨우 일 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이들이 조선말을 배운 다음부터는 이민호의 호위나 기마병으로 일했으니 종살이는 조선에 적응시키기 위한 기초 과정일 뿐이었다.

더운 물에 샤워를 간단히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식탁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다행히 민희나 민영이 식사를 차리지 않아 맛이 좋았다. 이민호는 20명이나 되는 여진족 호위 또는 기마병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래?”

“헤헤! 도련님이 존경스러운데 저희들이 숫기가 없어서 그 동안 감사 표현도 잘 못했잖습니까? 도련님이 저희들을 잘 대해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은 차마 못하고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녀석들! 고맙다! 이제 먹자.”

가까운 마포의 해동상단 비밀창고에서 반찬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기다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친구가 별로 없는 이민호에게 이들은 몇 안 되는 친구들이었다.

“조선에서 주인과 하인은 당연히 겸상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밖에 나가보니 큰일 날 소리더군요.”

“그래서 나중에는 같이 먹자고 해도 슬슬 피했었구나? 너희들은 하인이 아니었잖아. 그리고 다 같이 먹어야 맛있지.”

처음 포로 신분으로 조선에 끌려왔을 때 몹시 두려워하던 시전부락 아이들은 이민호가 편하게 대해줘서 아주 쉽게 조선사회에 적응할 수 있었다. 여진족 아이들이 그때는 몰랐지만 조금 크고 나서 그때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았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들은 지금도 여진족 마을에 계속 있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울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저희들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도련님은 꿈이 무엇입니까?”

“나를 비롯해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거야. 너희들은 내 가족이니까 특별히 두 배 더 행복하게 살게 해 주마.”

“헤헤! 고맙습니다만 지금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전쟁터에서 고생하면서 행복하긴? 더 이상 전쟁이 안 나야 할 텐데 큰일이다. 앞으로 전쟁이 여러 번 더 있을 거야. 미안하지만 그때까지 너희들이 날 도와줘야겠다.”

“미안하긴요? 언제든 부려먹어 주십시오.”

어느 시대든 군인은 위험하고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지만 이 시대에 고산국 군인들만큼 편하고 안전하고 고수익인 직업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민호가 지휘하면 항상 최소한의 인명피해로 승리했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전사였던 여진족 아이들은 이민호를 믿었다.

“그런데 도련님! 명나라 지휘사인가 뭔가 하는 벼슬 안 시켜줘도 됩니다. 괜히 황제한테 가서 인사해야 할지 모르니 안하겠습니다.”

“쉿! 황제폐하라고 해야지.”

“예. 황제폐하께 가기 귀찮습니다.”

“그거 너희들 좋으라고 시키는 거 아니야. 나중에 필요할 테니까 황상께서 이번에 상과 벼슬을 내려주면 받아라.”

감동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상으로 받을 은 5천 냥도 부담 되는 액수였다. 이민호는 괜히 일찍 상에 대해 말해준 것 같아 후회했다.

“일이라면 받겠습니다.”

“그래. 앞으로도 너희들을 실컷 부려먹어 주마! 크크크!”

이민호가 마치 대마왕처럼 음흉하게 웃었다. 워낙 부끄러움이 많은 애들이라 식사 도중에 어설픈 충성맹세를 받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부모의 원수일지도 모를 이민호에게 이렇게 충성하는 것을 보면 역시 이들은 조선인과 핏줄이 다른 여진족이 확실하다고 느꼈다.

이민호가 온돌방에서 자고 있는데 아침 일찍부터 민희가 깨웠다. 지난밤에 여진족 아이들과 웃고 떠들다 언젠지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아침이 왔다.

“주인님! 조선국 도체찰사 류성룡 대감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새벽부터 뭐하러 와?”

“낮에 오라고 전할까요?”

“아니다. 바로 나갈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라 일러라.”

이민호는 대충 이 닦고 세수를 한 다음 군복을 입고 류성룡을 만났다. 모두 식전이라 류성룡을 아침식사에 초대했다.

“주애공 대인께 행주에서의 대첩과 도성을 탈환하신 크나큰 전공을 세우심을 감축드리옵니다.”

“도체찰사 대감! 어서 식당으로 들어오십시오. 따뜻하게 밥을 지었으니 함께 식사나 하시지요.”

류성룡이 종사관과 몇몇 수행원들과 함께 식당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민호가 권해도 자리에 앉지 않고 길고 긴 인사치레를 진행하려 했다.

“경상도와 전라도, 함경도와 경기도 등등 조선 땅 곳곳에서 왜적을 물리치시는 주애공 제독총병관 대인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잘 아는 사이에 격식 따지지 말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대감 앉으세요. 거기 종사관도 의자에 앉으세요. 겸상이라도 합시다.”

“대인의 관작이 높아 이제 농담으로라도 편하게 대하지 못하겠습니다.”

중추부에 가끔 출근하던 시절에 할 일이 너무 없어서 류성룡에게 놀러간 적이 많았다. 이민호가 방문할 때마다 류성룡은 어느 부서로 옮기든 항상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마치 8대 2의 법칙에 나오는 일만 하는 개미 같았다.

그때 류성룡은 빠르게 서류를 처리하면서도 이민호와 평상시처럼 대화를 나누곤 했다. 여러 부서를 고루 거친 류성룡 덕택에 이민호도 실무를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런데 겨우 몇 년 만에 이민호는 고산국왕 겸 명나라 제독총병관이 되고 류성룡은 영의정 겸 도체찰사가 되었다. 두 사람은 나라의 운명을 건 일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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