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19화 (168/1,000)

00219  29. 행주대첩과 한성탈환  =========================================================================

권율이 조방장 조경에게 병사 일부를 주어 경복궁을 탈환하라고 명했다. 갑자기 영광스런 임무를 맡게 된 조경이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조경은 곧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이민호와 권율에게 씩씩하게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 말에 올라탄 다음 병사들을 이끌고 궁궐로 달려갔다.

좋은 쪽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좋은 기회였다. 이번 일로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2등은 맡아 놓았다. 왜군으로부터 궁궐을 탈환한 조경과 그의 직속상관 권율은 오래도록 명장의 반열에 머물 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후 광화문 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불에 타고 다 쓰러진 경복궁인데도 왜군 일부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조경이 부하들과 함께 질풍같이 몰아쳐 전투는 금방 끝났다. 전령이 달려오더니 권율에게 아군 부상 1, 적 사살 8, 생포 3명, 현재 궁궐을 수색 중이라고 보고했다.

“권 사상! 멍청이 천군은 아직 못 들어왔지만 체면을 생각해서 조정에 장계를 올릴 때는 동시에 입성한 것으로 하시오. 그리고 어서 군사들에게 저녁을 먹이시오. 왜적을 몰아내려면 도성 안에서 밤새도록 싸워야 할 것 같소.”

“예. 행주산성과 양천에도 전령을 보내 모두 도성으로 들어오라고 연락했습니다. 곧 입성할 것입니다.”

권율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도성을 탈환한 조선군 지휘자로서 기분은 아주 좋아 보였다.

“전하! 맙소사! 벌써 입성하셨군요.”

“어? 이 총병이 여기 어인 일이시오? 오오! 왜적들에게서 항복을 받아냈소?”

이여송 동생 이여백이 기마호위병들은 물론 왜군 기마무사들과 함께 이민호에게 달려왔다. 말에서 내린 이여백이 이민호에게 고했다.

“전하! 형님 제독께서 전투를 중지하기로 왜군과 합의했습니다. 부디 왜군에 대한 공격을 멈춰 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요?”

“에, 그게. 아무래도 인명의 희생 없이 전투를 끝내는 게 양쪽 모두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고심 끝에 내린 결단입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심 유격 같은 소리요? 도대체 얼마나 능력이 없기에 한양 도성 하나 점령 못하는 거요?”

시가전을 통해 아군의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도성을 탈환할 계획이었던 이민호는 화가 많이 났다. 처음에는 황제의 체면이나 조선 조정과의 관계를 고려해 명군에게 도성을 탈환할 기회가 줬는데도 서두르는 바람에 동대문에서 묶이더니만, 이제는 이여송이 왜군과 짜고 황제를 속일 작정이었다.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한 유격 심유경은 이민호의 제지로 지금은 활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 띄면 상방검으로 목을 치겠다고 편지를 보내 협박하자 심유경이 이민호를 피해 다녔다. 파락호들 수백 명을 끌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호화롭게 접대를 받아 조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심유경은 현재 평양에 있었다.

심유경이 이민호를 탄핵하려고 황제에게 주문을 바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으나 이민호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역사에 나온 것처럼 심유경은 전쟁을 당장 끝낼 듯이 큰소리 뻥뻥 치면서 사실은 아무 일도 못하는 사기꾼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황제에게 분노를 사서 도망가려다가 결국 양원에게 잡혀 참수당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꾸중은 달게 받겠사오나 동대문 쪽에서 왜군의 저항이 너무 거셌습니다.”

“한양 도성의 길이는 9970보요. 제대로 지키려면 몇 명이 필요하겠소? 그런데 어째서 동대문에 그리 집착했소? 아무 곳이나 넘어가면 됐을 텐데 말이오.”

“동대문 쪽이 도로가 좋아서 군량 대기가 편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도대체 이해할 수 없소. 천군이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약속 시간까지 대기하고 있었으면 내가 서대문을 공격하며 이목을 끄는 동안 단숨에 성곽을 넘을 수 있지 않았소?”

성벽 위 일정한 거리마다 병사 한 명 꼴로 지킨다 해도 하루 내내 번을 설 수 없으니 최소 2배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적의 침공 때 한양 도성을 방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성벽이 너무 길어서 아예 방어를 포기하고 임금이 강화도 등으로 피난하는 것을 택할 정도였다.

한양 도성은 이 시대 유럽이나 일본의 성곽이 작고 좁으며 거의 전투에만 특화된 것과 전혀 달랐다. 한양 도성은 방어에 주안점을 둔 군사적 의미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컸다. 평양성과 달리 한성에는 외성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백성들을 성 안에 두느냐, 밖에 두느냐의 차이였다. 고대 도시국가나 근대 유럽의 자치도시들은 도시 전체를 성곽으로 두르고 모든 시민들이 나서서 방어를 했다. 그러나 항상 방어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화약시대 이전에 유럽과 일본의 성곽이 깎아지른 듯이 높이 올린 것은 백성을 포기하고 방어에 전념하기 위한 선택의 문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문 쪽에는 왜군의 방어병력도 없었다. 도성 성벽을 잘 찾아보면 개구멍도 얼마든지 있었다. 평지에 넓게 세워져 방어에 허점이 많은 한성을 공략하지 못하는 이여송이 한심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서대문을 이미 함락하고 입성하신 것을 알았다면 조금 더 기다릴 것을 그랬습니다. 어쩐지 왜적들이 다급하게 화의를 요청하고 쉽게 양보한다 했습니다.”

“혹시 왜적과 또 어떤 약속을 했소?”

“황공하게도 왜군이 경기도에서 벗어날 때까지 추격을 하지 않도록 약속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안 계신 자리에서 멋대로 약속해서. 왜군이 한강을 넘어서면 전하께서 바로 추격하셔도 좋습니다. 왜군이 저희를 욕하더라도 저희들이 잘못했으니 모욕을 감수하겠습니다.”

“어휴! 비록 적과의 약속이지만 이 제독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니 그 약속을 지켜주겠소.”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이여백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더니 조심스레 뒷걸음쳤다. 그리고 하직인사를 올린 다음 부하 장수들과 함께 말에 올랐다. 이민호는 심통이 나서 인사도 안 받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부끄럽겠지만 군인이 전투를 기피하고자 적과 대화를 했으니 그 이상으로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이여백과 소수 기마대는 동쪽으로 말을 달렸다.

“도련님은 처음에 도성 탈환에 욕심이 없으시더니 입성하고 나니 욕심이 생기시는 모양이죠?”

“계복이 이놈아! 뒷간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지. 그래도 시가전을 안 해서 다행이다.”

“도련님은 시가전을 너무 두려워하십니다.”

“비슷한 숫자로 인명피해가 생기면 우리만 손해야. 명심해라. 우린 항상 소수니까 매번 압도적으로 이겨야 한다.”

“전술개발과 훈련시간이 많이 필요하겠군요. 어떻게 훈련을 시켜야 할지 고민해보겠습니다.”

“너 황도에 좀 갔다 와야겠다.”

계복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계복은 몹시 귀찮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왜요? 왜적 포로들을 데려가서 황제께 바치라고요?”

“그래. 그래야 백작 작위를 받지.”

“으으! 귀찮아요. 감불이나 감동한테 줘요.”

“나중에 일하려면 필요하니까 그런 작위는 좀 받아둬.”

이민호가 계복을 설득하는데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휴전이 성립되고 왜군이 서둘러 철수 준비를 했다. 왜군은 3만 명 가까이 한성에 남아있었다. 뜻밖에 많은 숫자라서 이민호도 깜짝 놀랐다.

임시 총 지휘관은 형식적으로는 모리 가문에서 맡았다. 그러나 주요 다이묘나 가신들이 포로가 됐거나 전사해서 실제 지휘는 함경도에서 내려온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임시로 맡았다. 후퇴할 때 가장 든든한 지휘관이라는 면에서 나베시마를 따를 다이묘가 흔치 않았다.

왜군은 철수를 준비하는 중에 수레 다섯 대를 서대문 밖 고산국 숙영지에 보내왔다. 이민호에게 보내는 뇌물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궁궐 내탕고에 있던 보물 같은데? 민희와 민영이 마음에 들면 하나씩 집어라.”

“너무 화려해서 가질 엄두가 안 나요. 조선 왕실에서 오랫동안 보관했던 보물일 테니 돌려주세요.”

천막에 들인 다음 상자를 개봉해보니 온갖 보물들의 화려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민호는 욕심이 생겼지만 문화재로서 가치가 크기에 민희가 권한 대로 왕실에 돌려주기로 했다. 이민호가 호위대를 시켜 물건 목록을 작성했다.

그리고 동대문 안쪽에 진을 친 이여송에게 연락해 약간 강압적으로 은을 대금으로 주면서 역시 왜군이 선물로 보낸 수레 다섯 대를 인수했다. 조선 왕실에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하니 이여송이 순순히 내주었고, 잘못한 것이 있으니 함부로 반발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이민호가 보낸 은은 이여송이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고 한다.

이민호는 왜군 진영에 내탕고 보물이 더 남아있을 것 같아 감불을 사신으로 보냈다. 왜군 진영에 가서 감불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고만장하게 수레 20여 대를 끌고 돌아왔다. 대금으로 지불하라고 내준 은은 고스란히 다시 가져왔다.

“도련님! 그러니까 이것들은 죄다 왕실 내탕고나 양반가에서 훔친 장물일 테니 돈 주고 살 필요 전혀 없다니까요. 그리고 왜장들의 천막을 철저히 수색해서 돈 되는 것은 다 털어왔습니다. 목숨을 살려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죠.”

“이 황금 향로하고 보검은 아무리 봐도 일본에서 만든 물건 같은데? 어쨌든 잘했다.”

이민호는 금괴나 말발굽 모양의 마제은 같은 조선 국왕의 개인 재산은 적당히 빼돌리고 문화재적 가치가 큰 골동품 등 왕실 재산은 따로 상자에 넣고 봉인했다. 산호처럼 열대 바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은 여지없이 왕실에 돌려줄 상자에 넣었다.

내탕고 보물 일부는 이여송에게 은을 주고 샀다고 밝혀도 선조 임금이 호들갑 떨면서 이여송에게 사례할 것이 눈에 선해서 불쾌했다. 그래서 처음에 마음먹었던 것보다 더 많이 빼돌렸다.

호위대와 함께 보물을 살피고 분류하며 한참 즐거워하고 있는데 계복이 들어와 흥을 깨뜨렸다.

“도련님! 소서행장이 도련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어휴~ 이게 다 뭐여요?”

“쳇! 귀찮게. 데려와. 네가 분류 좀 해라.”

이민호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다른 천막에서 만났다. 외교승 겐소와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도 함께 있었다. 이민호는 겐소를 명나라에 넘기고 계복에게 백작위를 받게 할 예정이었다.

“고산국 국왕전하를 뵙습니다.”

“반갑소.”

얼굴에 붕대를 감고 더러워진 갑옷을 입어 추레해진 소서행장 등이 이민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민호는 포로들을 보면서 의자에 앉았다. 호위들이 매섭게 왜장들을 노려봤으나 기가 꺾인 그들이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그만 일어나시오. 두 분은 다이묘이고 한 분은 승려 아니오? 과한 예의는 사양하겠소.”

“저는 평소 그리스도교를 보호하시는 전하를 몹시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고산국 왕도와 마카오에 대성당을 짓는 전체 자금을 헌납하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천주의 영광을 이 땅에......”

“그만! 나는 기리시탄이 아니오. 다른 종교에도 그만큼 기부를 했소. 영하에서는 회교도들을 위해 모스크를 세우라고 자금을 지원하고 고산국 왕도에는 절을 짓도록 했소. 사이비만 아니라면 어떤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 것이며, 백성들이 믿는 종교라면 아무리 작은 종교라도 종교시설 건립을 지원할 것이오.”

이민호의 말에 소서행장보다는 겐소가 더 감동받은 듯했다. 소 요시토시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하는 듯했다.

“그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도 다른 종교가 이단이라고 핍박할 의향은 전혀 없습니다. 불교 승려인 겐소 스님도 훌륭한 분입니다.”

“알겠소. 이만 용건을 말하시오.”

금은보화가 이민호의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민호는 얼른 보물이 쌓인 천막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전하를 주군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소서행장은 명나라로 압송하기로 했다. 만에 하나 일이 아주 잘 풀려서 일본으로 돌아간다 해도 풍신수길에게 할복을 명받을 것이고, 소서행장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자살을 하지 않을 테니 참수를 당할 것이다.

포로로 잡힌 소서행장의 아들이나 친인척에게 영지가 세습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소서행장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봤자 큰 이익은 없다고 이민호는 판단했다. 이 시점에서 괜히 명나라 황제나 조선 국왕에게서 의심을 살 필요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오전에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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