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16화 (165/1,000)

00216  29. 행주대첩과 한성탈환  =========================================================================

29. 행주대첩과 한성탈환

왜군은 해뜨기 전 새벽부터 몰려들었다. 서대문으로 나와 마포를 지나 한강변을 따라 몰려온 왜병들이 들판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행주산성은 현대 서울의 한강변 북안을 따라가는 도로인 강변북로에서 유일하게 1km 이상 강이 안 보이는 구간이었다. 나지막한 언덕인데도 경사가 가팔라 오르기 어렵고 하트 모양 중간에 난 길로 들어가자니 양쪽에서 공격받는 지형이었다.

“새벽부터 사람들 참 부지런하네.”

“주인님이 새벽잠이 많은 거여요.”

민희가 망원경을 내밀고 민영이 이민호에게 담요를 덮어줬다. 들판에 누렇게 시든 짚과 나무줄기를 긁어와 대충 위장한 기함을 김포 쪽 강변에 대고 이민호가 함교에 앉아 망원경으로 행주산성 주변을 살폈다. 쌍안경은 아직 못 만들었는데 조만간 포병이 거리계산을 간단히 하기 위해 제작할 계획이었다.

남의 전쟁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망루에 오른 무상이 가끔 특이 사항을 보고했다.

“우희다수가, 우키다 히데이에군 도착! 대장기, 마인이 멈췄습니다.”

“곧 시작하겠군.”

선봉은 평양성에서 밀려난 고니시군이 맡았다. 일본의 조선 침공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는 소서행장은 일단 전쟁이 나면 항상 선봉에 서려고 했다. 한국에서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첫 번째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군인이 공격 선봉에 서는 것은 어느 나라든 영광스런 역할이었다. 고니시군은 오늘도 행주산성 공격을 위해 선봉에 섰다.

- 타탕! 탕!

왜군 쪽에서 조총 사격이 시작되며 왜병들이 행주산성으로 몰려들었다. 조선군은 충분히 사거리가 되는데도 화포와 활을 쏘지 않고 기다렸다. 왜병들은 가파른 양쪽 언덕을 오르며 견제하는 동시에 주력은 중간에 난 길로 진입했다.

- 퍼벙!

지자총통이 불을 뿜어냄과 동시에 화살이 왜군을 향해 쏟아졌다. 서양 영화를 보면 장궁 화살이 하늘을 새까맣게 가리던데 각궁은 직사에 가깝고 화살이 작아 그런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각궁이 훨씬 치명적이었다. 중간 길로 뛰어가던 왜병들이 와르르 넘어졌다. 허벅지나 어깨 등에 화살을 맞은 왜병들이 비명을 질렀으나 나머지 왜병들은 부상병들을 무시하며 앞으로 돌격했다.

- 타타타타타타~

“뭐냐?”

기관총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이민호가 벌떡 일어나 망원경으로 찾았다.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화차 여러 대가 있었다. 신기전기가 아니라 승자총통 40정을 쌓아두고 연속 발사하는 총통기였다. 소모사 변이중이 근처에 있다더니 잔뜩 만들어 행주에 배치한 모양이었다.

“전하! 저도 싸우고 싶습니다.”

“싸울 기회는 많아.”

유구국 왕자 쇼호가 이민호에게 청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쇼호의 안전이 우려돼 쉽게 허락해줄 수 없었다.

“전라도순찰사는 10배가 넘는 적을 맞아 싸우고 있습니다. 정말 멋집니다. 저도 바로 저기서 싸워 사나이의 의기를 뽐내고 싶습니다.”

“쇼호 왕자가 죽으면 유구국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

“저 말고도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가 많습니다.”

“내가 보기에 쇼호 왕자는 현 국왕전하의 아들도 아니고, 그렇게 똑똑한 것 같지도 않아. 왕자의 부친이 큰 세력을 가진 가문도 아니지. 그런데 왜 후계자로 내정됐을까?”

“음. 아마 제가 잘 생겨, 컥! 죄송합니다. 나이가 적당한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쇼호 왕자가 정강이를 손으로 감싸며 껑충껑충 뛰었다. 제 잘 난 맛에 사는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 현 유구국 중산대왕 전하께는 직계 왕자가 없으시네. 만약 쇼호 왕자가 잘못되면 유구국에 내분이 생겨서 망할 거야. 그러니 자중하도록 해. 왕은 다음 세대를 이어줘야 하는 의무도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하지만 왕이 죽을 각오를 하고 전쟁에 앞장서야 백성들이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옳은 말이야. 나중에 기회를 줄 테니까 지금은 쉬고 있어.”

행주산성 앞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세가 빠져 나가고 바로 뒤이어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끄는 군세가 행주산성으로 몰아닥쳤다. 이제 겨우 두 번째 공격이었고, 순서를 기다리는 왜군 부대가 다섯 개는 더 있었다.

“그 유명한 소서행장도 별 수 없군요.”

“저런 지형인데 어쩌겠어?”

야전에서 맞붙었다면 당연히 고니시군만으로도 권율이 이끄는 부대를 패배시켰겠지만, 상대는 수성전에 이골이 난 조선군이 언덕에 의지해 버티고 있었다. 고니시군은 평양성에 이어 이번에도 수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물러섰고 그 자리를 이시다군이 채웠다.

“군기에 대일대만대길(大一大万大吉)이라고 썼는데 무슨 뜻인가요?”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을 위하고,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위하면 크게 길하다는 뜻이야.”

“뜻은 좋군요.”

민희가 묻자 이민호가 삼총사 구호식으로 설명했다. 그 사이에 전투 경험이 별로 없고 전국시대에도 매번 삽질만 하던 이시다군이 대량의 사상자를 버리고 퇴각했다. 부상자들이 허겁지겁 도망치는 동료들에게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절규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안되겠다 싶으니까 지휘관의 명령 없이도 바로 퇴각해 버리는 왜병들이 일본에도 있었다.

3차 공격은 구로다 나가마사가 지휘하는 군이었다. 그 사이에 공성전 준비를 좀 했는지 망루 형식의 공성탑을 밀고 전진했다. 그러나 공성탑은 성곽이 아닌 행주산성에 접근하기 어려웠고, 중간 길로 들어가자마자 화포에 맞아 무너져버렸다.

4차 공격은 총대장인 우키다 히데이에가 맡았다. 병력도 거의 만 명에 달해 행주산성이 조금 위태로웠다.

초조해진 이민호는 해병 80명을 단정 네 척에 태워 보내 한창 백병전 중인 산성에 진입시켰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해병 80명의 지원은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1차 목책선을 넘은 왜병을 몰아낸 즉시 이민호가 해병들을 기함으로 퇴각시켰다.

“왜 물러나는 거야? 제발 도와줘!”

행주산성에서 퇴각하는 해병들을 향해 조선군이 욕설을 퍼부었다. 도와주고 욕먹었다.

“전하! 제발 저 좀 출전하게 해달라니까요. 그런데 왜 해병들을 퇴각시키셨습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싸우려고.”

전선과 승마보병의 투입 시기를 저울질하며 이민호가 다시 행주산성에서 전개되는 전투를 살폈다. 이번에는 깃카와 히로이에가 이끄는 5차 공격이 진행 중이었다.

“한강 하구에 판옥선 두 척이 들어옵니다! 선두는 충청수군 좌선, 충청수사가 탑승했습니다!”

“노인네가 왜 이리 빨리 와?”

망루에 오른 무상의 외침에 이민호가 갑판으로 나왔다. 원래 역사에서 충청수사 정걸은 저녁때쯤 행주산성에 도착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벌써 한강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마도 김포에 가득한 연합함대 함선들을 보고 서둘러 달려온 것 같았다.

잠시 후 판옥선 두 척이 기함 앞으로 지나갔다. 판옥선 장대에 오른 수염이 허옇게 난 장수가 이민호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대감! 안 도와주고 뭐하는 거요? 우리 편이 다 죽을 때까지 기다릴 셈이오?”

“젠장! 욕먹을 줄 알았다.”

이민호가 안 들리도록 작게 투덜거렸다. 판옥선 장대에서 노장이 이민호를 향해 계속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났지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들으나마나 욕일 것이다.

판옥선 두 척은 행주산성 뒤에 최대한 접근한 다음 사후선을 통해 화살더미를 내렸다. 하루 종일 힘겹게 싸우던 조선군이 원군이 도착했다고 함성을 질렀다.

“함장! 전선과 외륜선들 들어오라고 신호를 보내. 승마보병들에게도 대기 신호를 보내고.”

“예! 깃발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잠시 후 한강에 커다란 천자 전선 11척과 대형 외륜선 12척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한강 얼음이 이미 녹아 통행에 문제가 없지만 겨울 갈수기라서 수량이 부족해 항행할 수 있는 강폭이 좁았다. 기함도 기관을 2기만 가동시켜 한강 중심으로 나와 선두에 섰다.

전선과 대형 외륜선 30척이 한강을 일렬로 행진했다. 그리고 행주산성 앞에 운집한 왜군을 향해 함포를 돌렸다.

행주산성은 5차 공격 때의 화공으로 인해 온 사방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외부 목책이 모조리 불타올랐고, 안에서는 백병전이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바로 바깥에서는 6차 공격을 맡은 모리군이 대기하고 있었다.

- 쿠쿠쿵!

첫째 목표는 행주산성 앞에서 공격 대기 중인 모리군이었다. 돌격하기 직전의 잔뜩 밀집된 왜군 대열에 포탄이 집중 낙하했다. 포탄이 터질 때마다 왜병 수십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해병을 행주산성 안으로 보내 도와줄 필요도 없었다. 다음 차례로 공격해야 할 모리군이 버티지 못하고 먼저 퇴각하자 산성 안에서 백병전 중이던 깃카와 히로이에군의 전열이 무너졌다. 왜병들은 서둘러 산성 밖으로 도주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여러 전선에서는 왜병들이 몰린 곳마다 함포를 발사했다. 1차 공격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던 고니시군의 집결지가 강변에 가까이 있어 집중적으로 포탄이 떨어졌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집결지에도 포탄이 낙하해 왜병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이시다 미츠나리군 소속 왜병들이 지시도 없었는데 무작정 동쪽으로 도주했다.

“왜군이 무너집니다.”

이민호는 실제 역사에서 행주대첩에 참가한 왜장들 다수가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 각 부대의 지휘체계는 대부분 살아있었다. 다이묘가 죽거나 부상을 당하더라도 가신단이 지휘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시다군은 완전히 와해돼 왜병들이 개별적으로 달아나고 있었지만 지휘 경험이 부족한 문관이 다이묘로 있는 탓이었고, 일본에서도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어쨌든 다른 부대들도 일제히 한성을 향해 퇴각했다. 그러나 행주산성에서 한성으로 돌아가려면 왔던 길과 마찬가지로 강변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야산이 중간에 많이 늘어선 탓이었다.

그런데 강변으로 퇴각한다면 전선에서 쏘는 함포의 위력 앞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도주하는 왜병들은 함포뿐만 아니라 이제는 보병총 사거리 안에도 들었다. 이민호가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 타타탕!

전선 갑판에 오른 해병들과 기마병들이 총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 바로 동쪽을 흐르는 시내, 겨울이라 바짝 마른 창릉천을 건너던 왜병들과 개활지를 집단으로 뛰어가던 왜병들이 쉬운 표적이 되었다. 고산국 전선들은 한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왜병들을 계속 추격하며 총격과 포격을 퍼부었다.

참다못한 몇몇 부대가 인수봉 방향인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주했다. 사거리가 닿지 않아 총을 쏘지 못했으나 안 보일 때까지 함포가 그들 뒤를 쫓았다.

“저들은 안됐군요.”

“그러게 말이다.”

이민호와 민희는 미리 구로다군과 깃카와군의 명복을 빌었다. 그쪽에는 승마보병 5천이 매복하고 있었다. 차라리 강변을 따라 한성으로 도주하는 편이 생존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대덕산처럼 한강의 배에서 쏘는 총탄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훌륭한 자연 장벽이 한강변에는 많았다.

아무리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전선은 사람이 뛰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전선과 대형 외륜선들이 양화진에 도착했다. 마포나루보다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한성으로 가는 길이 난 곳이었다.

“내려! 어서 내려!”

수병들이 먼저 내린 다음 배에서 땅으로 널빤지를 걸쳤다. 해병 2천 명 전원이 상륙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상륙훈련을 매달 받기 때문에 해병들은 아주 빨리 내려서 강변 백사장에서 진형을 갖추었다.

기마병 500명도 말을 끌고 모래밭에 내렸다. 유구국 보병 400명은 마치 여진족 보병들처럼 두꺼운 털외투를 걸치고 땅에 내렸다. 이민호는 유구국에서 동원한 범선들은 김포에 두고 보병만 전선에 태워왔다. 그 동안 북적거리며 생활해야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민호는 오랜만에 말을 타고 호위대와 함께 기함에서 내렸다. 바로 오늘을 위해 그 동안 매일 빠짐없이 말을 훈련시켰다.

해병들이 각 려별로 대열을 짠 다음 즉시 작전 구역으로 이동했다. 강변은 전선들에게 맡기고 해병과 보병, 기마병이 남북으로 넓게 배치되며 연희동까지 포위망을 펼쳤다. 지금 이 시간쯤에는 구로다군과 깃카와군을 몰살시킨 승마보병들이 강변으로 도망간 왜병들의 뒤를 칠 때였다.

“적이 몰려옵니다!”

============================ 작품 후기 ============================

오전에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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