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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13화 (162/1,000)

00213  28. 출병  =========================================================================

죽음의 공포와 망신으로부터 구원해줄 동아줄을 발견한 김응남이 비명을 크게 질렀다. 사실 이민호는 김응남의 얼굴만 알지 꼬장꼬장한 대제학 출신에 병조판서를 역임한 김응남과 제대로 대화한 적도 없었다.

“이 지사! 아니, 제독총병관 대인! 살려주시오. 제발 살려주시오!”

“너는 뭐냐? 복장은 달라도 속국의 관리 나부랭이 같은데 네 놈도 맞고 싶은 게냐? 썩 물러서지 못할까?”

호부 주사라는 명나라 관리가 펄펄 날뛰었다. 주사가 주먹을 쥐고 이민호에게 다가오다가 앞을 가로막은 민영에게 따귀를 맞았다.

그 순간 명나라 군사들과 이민호의 호위병들이 분분히 무기를 꺼내들고 대치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윽박질렀다.

“천군을 상대로 무기를 겨누다니! 감히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 주인님이 훨씬 높거든? 경고한다! 더 이상 다가오면 다 쏴죽이고 묻어버리겠다!”

그러나 양쪽 모두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희와 민영이 권총을 꺼내들어 물러나라고 위협했으나 명나라 군사들은 권총이 뭔지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호부 주사가 민영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는 것이 수상했다.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만해!”

이민호가 표범 머리가 그려진 사슴가죽 주머니에서 도독 영패를 꺼내 내밀었다. 호부 주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도저히 믿기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민호를 살피다가 손가락을 뻗었다. 명나라 군사들은 이미 멀찌감치 물러선 뒤였다.

“혹시, 고 씨 성을 가진 흠차 제독총병관 도독 대인이십니까?”

“영패를 보고도 몰라? 네놈이 불경한 죄는 잠시 후에 묻겠다. 도대체 왜 조선 관리들에게 곤장을 치는 거야?”

이민호가 호위대를 시켜 조선 고관 세 사람을 풀어주게 했다. 세 사람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하급 관리나 아전들에게 부축을 받았다.

“저는 호부 주사 애자신입니다. 제독 대인! 이들은 군량 운반을 소홀히 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너희들 도망가지 마!”

애자신(艾自新)이라는 주사가 이민호 앞에서도 펄펄 날뛰었다. 그저 치료를 받기 위해 살짝 뒤로 물러선 관리들에게 애자신이 욕설을 퍼부었다.

“이봐, 주사! 해동상단이 포구나 역참마다 군량 운반을 확실히 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아! 천조와 계약한 상단에서는 포구와 역참까지만 군량을 운송합니다. 그 군량을 천병(天兵)의 주둔지에 옮기는 일은 조선 관리들의 책임입니다. 이놈들이 그 책임을 소홀히 했으니 벌을 내려야지요. 그리고 감히 천조의 고관인 제가 일하는데 속국인 조선에서는 겨우 하급 관리를 내보내 저를 상대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패문을 돌려 책임자들을 부른 다음 이렇게 제가 친히 징치하고 있습니다.”

원래 역사에서 처음에는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 여러 고을에 분산 보관된 백미를 수송해 명나라 군대에 지급했다. 그러나 명군의 주둔 기간이 길어지면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명나라 조정에서 요동 상인을 고용해 해로를 통해 조선으로 군량을 운반했다. 요동 상인들이 쌀의 무게를 늘리기 위해 바닷물을 뿌리거나 하는 온갖 작태가 벌어지고 쌀은 썩어서 못 먹게 되었으나 그건 나중 일이었다.

군대가 한 곳에서 머물며 군량을 소비한다면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전선이 유동적일 때는 군량을 운반하는 것도 큰일이 되었다. 결국 조선 조정에서는 평안도 군사와 의병을 거의 해산하다시피 줄여서 군량 운반으로 인력을 돌렸다.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전국의 무과급제자들을 소집해 군량 운반을 시키기도 했다. 군량을 운반하기 위해 평안도 백성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도 못했다고 한다.

그런 어이없는 이야기를 부친에게 들었던 이민호는 명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부터 해동상단을 동원해 거의 완벽한 군수체계를 갖췄다. 의주부터 경기도 개성과 파주까지 일정 거리에 위치한 역참마다 창고를 짓고 군량미를 보관한 것이다.

그러나 명군의 주둔지가 제각각이고 이동하는 곳마다 군량을 수송하는 일을 조선 조정이 맡고 있었다. 수레를 이용해 군량을 수송하는 일은 큰 부담이 가지 않았으나 이렇게 불필요한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어떻게 소홀히 했는데? 군량 운송은 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니 자세히 말해봐.”

“천병이 행군 중에 해가 져서 진채를 내렸는데 그 즉시 군량을 운반하지 못하고 반 시진이나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천병들을 굶주리게 만들었습니다. 군령으로 참하지 않은 것만 해도 은혜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명나라 병사들 개인이 휴대하는 군량이 일정량 있고, 어느 부대든 작은 치중부대가 붙어있었다. 그러니 보급이 늦어서 명나라 병사들을 굶게 만들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고 그저 트집을 잡고 싶은 것뿐이었다.

“명나라에서 치중병이 시간 제대로 지킨 경우 있어?”

“명나라에서야 좀 늦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속국에서 감히 늦게 도착하는 것은 대국에 대한 불충입니다. 반드시 버릇을 고쳐놔야 합니다.”

이민호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별 거 아닌 이유를 핑계로 들면서 저항하지 못하는 약한 사람들을 못 살게 구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특히 애자신이 조선 관리들에게 곤장을 친 것에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너 혹시 뇌물 받고 싶은 거냐?”

“역시 대인께서는 고관대작이라 잘 아시는군요. 제가 속국에 도착했을 때 이 건방진 것들이 감히 제게 돈이 별로 안 되는 것을 바쳤습니다. 솔직히 그것 때문에 지금도 화가 납니다.”

이민호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 다행히 이민호에게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주사 주제에 넌 왜 이리 건방진 거야? 너 상방검에 참수 당할래, 아니면 곤장 맞을래?”

정6품 주사의 관품이 낮다 하나 직무에 관해 황제에게 주문을 올릴 수 있는 자리였다. 1598년 울산성 전투 이후 병부 주사 정응태는 황제에게 주문을 올려 경리 양호를 파직시켰다.

“실례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어서 선택해! 참수야, 곤장이야?”

물론 상방검은 명령권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군령을 거부한 자를 벨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규정이 지켜지리란 보장이 없었다. 불법과 탐욕으로 얼룩진 관직생활을 하던 애자신은 남들도 권한남용이라는 불법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민호는 여기서 권한을 남용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민호의 눈빛이 사람을 죽이기 직전처럼 강렬하게 빛나는 것을 애자신이 알아보고 알아서 기었다.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도 애자신을 살아남게 만든 생존본능이 여기서 발동했다.

“제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대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곤장을 맞겠습니다.”

“뭐? 아무래도 참수당하고 싶은 모양이군.”

“대인! 아니, 노야! 저 사실 곤장 맞는 거 좋아합니다.”

호부 주사 애자신이 알아서 엉덩이를 까고 형틀에 엎드렸다. 늦으면 이민호가 진짜로 상방검으로 목을 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민호가 호위들에게 시켜 애자신의 팔다리를 묶게 했다. 그리고 평소 한족에게 감정이 안 좋은 여진족 호위 두 명에게 곤장을 치게 했다. 이민호에 대한 여진족 호위들의 충성심이 극한까지 치솟는 것 같았다. 여진족 출신 호위 두 명이 손에 침을 뱉아 비빈 다음 곤장 손잡이를 꽉 쥐었다.

- 철썩!

“끄아아아아~”

애자신이 맞을 때마다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렀다. 곤장을 맞다 풀려난 조선 관리들은 후련하면서도 걱정되는 기색이었다.

그때 기마 10여 기가 달려오더니 이민호의 눈에 익은 명나라 장수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최대한 공손하게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곤장을 치고 애자신이 내지르는 비명을 배경 소음으로 두고 인사를 나눴다.

“전하! 그간 무강하셨습니까?”

“오! 이 총병 아니시오?”

이여송의 동생 이여백은 흠차 정왜 우영 부총병 서도독첨사(欽差征倭右營副摠兵署都督僉事)로서 조선에 와 있었다. 군사 1500명을 지휘한다던데 단출하게 호위병 열 명만 이끌고 왔다. 이여송의 또 다른 동생 이여매는 의주위 진수 참장으로 조선에 파병됐다.

“소장을 알아봐주시니 영광입니다.”

“우리는 영하에서 도적 발배 일족을 토벌할 때 함께 싸운 전우 아니오? 무슨 일이오?”

“전우라뇨!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다니, 감읍했습니다. 지나가다 전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당연히 인사하러 급히 달려왔습니다!”

이민호가 보바이의 반란 때 힘을 보여주고 전공을 이여송에게 양보해줬더니 이여백이 마치 간이라도 빼줄 기세로 아부했다. 지나고 나서 하는 이야긴데 하투의 몽골기병 5천이 반란에 참가했을 때는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고 했다.

“형님이신 이 제독은 잘 계시오? 가까이 계시면 인사나 갈까 하오.”

“신분 차이가 엄연한데 어찌 전하께서 찾아가시렵니까? 전하께서 머무를 곳을 알려주시면 가형이 어련히 찾아뵙고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여송은 흠차 제독 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 어왜 군무 총병관 중군 도독부 도독 동지(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摠兵官中軍都督府都督同知)로서 조선에 원정군으로 파견된 5만여 명의 명나라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지금은 역사처럼 벽제관에서 왜군에게 패배한 다음 의기소침해져서 개성에 머무른다고 들었다.

이민호는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과 합동작전을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작전 협조를 빙자해 행주산성 주변 지역에 명군이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 그를 만날 필요가 있었다.

“혹시 제독의 부상이 심한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소.”

“부상을 입지 않았으나 그 동안 오래 형님을 모셔온 가정들을 많이 잃어서 슬퍼한 것뿐입니다.”

“저런! 안타까운 일이오.”

요동백 이성량에게 아들 8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무관으로 출세했다. 예전에는 이성량과 맏아들 이여송이 동시에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껄끄러워 명나라 조정에서 이성량 부자의 근무지역을 멀리 띄우는 등 정리를 했었다. 그러나 한 집안에서 8형제가 줄줄이 무관으로 승승장구하자 지금은 지역을 나누는 일을 아예 포기했다.

“본직은 정주의 행재소에 계시는 조선 국왕전하께 인사드리러 가는 길이오.”

“바로 저희 가형께 전하겠습니다.”

“어허! 적과 대치하는 곳에 계시는 제독에게 어찌 자리를 비우게 한다는 말이오?”

적을 막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아군 고관대작들과의 인간관계였다. 불합리하지만 이것이 어느 시대든 조직사회의 현실이었다.

아무리 잘 싸우는 장군이 있다 해도 같은 편 문관의 붓 끝에 잘려나가면 소용이 없다. 그러니 조정대신들에게 밉보이지 않고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도 백성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유능한 장군이 수행해야 할 의무였다.

그러나 보통은 유능한 장군들이 적을 막느라 바빠 뇌물 상납을 신경 못 쓰게 되는 사이, 무능한 장군이 조정대신들에게 열심히 뇌물을 갖다 바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결국에는 무능한 장수가 그 시대 백성들을 죽게 만들고 후세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이순신 장군도 조정 대신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윤휴가 지은 <백호전서> 23권 통제사이충무공유사에서 1598년 즈음에 충무공이 장인들을 모아 안장 등을 만들어 조정 대신들에게 선물로 바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서 윤휴는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모함을 받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로서 맹촉의 고사를 인용해 설명했다.

“그런데, 전하! 저놈 죽겠는데요?”

“아! 꼴에 황제폐하의 신하인데 형틀에서 죽게 할 수는 없지요. 그만 쳐라!”

이여백과 대화하다 보니 이민호가 애자신을 처벌 중이라는 사실을 잊어먹었다. 호부 주사 애자신은 정신을 잃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조선이 속국이라고 기고만장하던 애자신은 어느 작은 집에서 두문불출하면서 여름까지 조용히 지내다가 명나라로 돌아갔다. 이번 일 덕택에 다른 명나라 관리나 장수들도 조선 관리들에게 함부로 행패를 부리지 않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오전에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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