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11화 (160/1,000)

00211  28. 출병  =========================================================================

“아무 것도 없네?”

이민호는 어이가 없었다. 대마도의 중심인 엄원항, 이즈하라가 황량한 벌판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왜선 수백 척과 함께 왜군이 못해도 만 명 이상이 지키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왜성은 완전히 무너졌고 돌무더기가 곳곳에 쌓여 있는 것으로 흔적을 대신했다. 포구에는 물에 가라앉아 시커멓게 썩어가는 배의 잔해 위에 앉은 갈매기가 한가롭게 깃을 다듬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산포와 낙동강 죽도성을 완전히 박살내고 바다에서 더 이상 적을 찾을 수 없게 된 조선 수군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대마도로 건너와서 엄원항과 대마도 포구들을 불 질렀다고 한다. 한성 궁궐과 경주 등 가는 곳마다 불을 지르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에 못지않게 조선 수군도 불 지르기를 참 좋아했다.

“왜적입니다!”

“기다려. 쏘지 마!”

엄원항 포구에 배를 대고 정박하려는데 왜인들이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기함으로 다가왔다. 노를 젓던 중년 남자 넷은 배에 남고 노인 혼자만 기함으로 건너왔다. 노인이 이민호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다음 조선말로 소개했다.

“저는 대마도에 사는 늙은이입니다, 나리. 깃발을 보니 조선을 돕기 위해 오신 고산국 군대 같은데 맞습니까?”

“그래. 맞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라.”

대마도에 사는 사람들 중 조선말을 구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때 동래 왜관에서 일했는지, 아니면 왜구로서 조선 남해안을 노략질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민호는 나리라는 호칭은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아 신선하게 느껴졌다.

“살려주십시오, 나리! 제발 저희들을 죽이지만 말아주십시오. 이제는 더 이상 바칠 것도 없습니다. 어흑흑~”

“엄원항이 이렇게 된 것은 조선 수군이 한 짓인가?”

“예! 맞습니다, 나리. 흑흑! 그들이 성을 무너뜨리고 성 아래 마을에서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모조리 잡아갔습니다. 집은 불태우고 짚으로 지은 움막마저 부수고 특히 먹을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빼앗아 가거나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산에 불을 지르기도 합니다.”

노인은 조선 수군이 마치 악마의 군대나 되는 것처럼 말했다. 조선 조정 또는 조선 수군 지휘부가 그 동안 침략군의 보급기지 역할을 담당했던 대마도를 청야하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청야작전은 명백히 중요한 군사작전의 하나이니 이민호가 막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디 조용한 곳으로 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민호는 대마도 왜인들이 큐슈로 가든 고산국으로 가든 상관하지 않고 물었다. 그리고 이민호는 왜인들을 기본적으로 믿지 않았으니 친절을 베풀고 싶지 않았다. 불쌍하다고 배에 태웠다간 자칫 잘못하면 호되게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인들은 얌전히 배에 타고 가다가 갑자기 왜구로 돌변해 배를 빼앗고, 도와주려던 사람들을 남김없이 잔혹하게 죽인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역시나 노인의 대답은 어딜 가든 흔히 듣던 대로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고향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요, 나리.”

“우리는 하룻밤만 경야하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것이다. 그러니 내가 군사들을 풀어 너희들을 잡아들일 일은 없다. 안심하고 돌아가거라.”

“감사합니다요, 나리.”

노인이 죽을 각오를 하고 온 것이 가상해서 쌀 몇 섬을 상으로 내려주었다. 작은 배에 탄 노인과 노를 저어 온 중년 남자들이 꾸벅 절하더니 항구로 돌아갔다.

“뻔뻔한 대마도주와 그 동안 해적질을 했던 왜구들을 생각하면 대마도에서 왜인들의 씨를 말려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나쁜 놈이긴 하지.”

조선에서 흔히 평의지 또는 종의지라 칭하는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로서 조선과 일본 양쪽에서 관작을 받는 양속관계를 유지했다. 전쟁 전에는 조선과 일본 양쪽을 오가며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임진왜란 때 고니시 밑에서 선봉에 나섰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자 대마도 백성들이 굶어 죽어간다면서 조선에 통상을 애걸하기도 했다.

대마도주 가문이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임진왜란 직전 소 요시토시는 병력을 무리하게 5천이나 동원해 조선에서 전공을 세우려고 발악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서군의 패배로 끝나자 그 즉시 고니시의 딸 마리아와 이혼하고 도쿠가와 막부에 아부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말기에 조선에 한 짓을 보면 더더욱 동정해줄 가치가 없었다.

이민호는 해병 일부를 상륙시켜 주변을 수색하도록 했다. 그러나 대마도는 산이 험해 대 병력이 숨을 곳이 너무 많았다. 함대가 야습만 당하지 않으면 되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수색을 중단시켰다.

이날 밤에도 기대했던 왜군의 야습은 없었다. 나고야 성 주변을 뒤집어놓았으니 당연히 수군을 모아 추격해올 것으로 예상했으나 섭섭하게도 일본은 그럴 힘을 잃은 것 같았다.

연합함대는 다음 날인 1월 28일 아침 일찍 출발해 오전 중에 한산도에 도착했다. 한산도는 북쪽 방향으로 트인 만 안쪽에 포구가 네 개, 또는 구분하기에 따라 다섯 개가 있었다. 여러 포구에는 판옥선 100여 척에 탐망선과 사후선 등 작은 배들이 그만큼 정박하고 있었다.

각 수영에는 또 이만한 숫자의 전선들이 따로 있어서 조선 수군이 실로 성세를 누리고 있는 시기였다. 지난 일 년 사이에 수군 전력을 두 배로 증강한 결과였다.

대부분 첨저선인 연합함대 배들은 만 중앙에 정박하고 이민호와 쇼호 왕자 등 지휘부만 단정을 타고 한산도에 내렸다. 한산도 남쪽 매물도에서 연합함대를 만난 통제영 탐망선이 미리 전령을 통제영에 보내 이순신 등 통제영 지휘부가 선착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 이 모(某)가 유구국 세자 저하께 인사 올립니다. 왜적의 침략에 의해 전화에 휘말린 우방을 구하기 위해 몇 만 리 바닷길을 마다하고 오신 세자 저하께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 통제사 대감! 저는 그 동안 멀리 유구국에서도 통제사 대감의 명성을 듣고 흠모해 마지않았습니다. 부디 저를 제자로 삼아 통제사 대감의 군략을 가르쳐주시오.”

이순신을 만난 쇼호 왕자가 좋다고 펄쩍펄쩍 뛰었다. 이민호는 안전을 위해 쇼호 왕자를 통제영에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왕자는 유구국 지원군과 사절단의 대표 자격으로 조선 국왕을 알현해야 하므로 의주로 데리고 가야 했다.

“통제 대감! 대마도가 무척이나 황량하더이다. 헛걸음했습니다.”

“제독총병관 대인께 죄송하오나 조정의 명에 의해 시간 나는 대로 대마도를 토벌하고 있소이다.”

“그냥 그렇다고요. 제가 장난감을 빼앗겼다고 투정을 부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민호는 이순신을 따라 만 서쪽 제승당 옆 수루로 자리를 옮겼다. 비탈길에 세워진 수루는 겨우 2층 건물인데 밑에 대나무가 빽빽하게 자라서 그런지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했다.

통제사 이순신에게서 요즘 돌아가는 전황을 자세히 전해 들었다. 왜군은 평양성을 내준 이후 이시다 미쓰나리가 다른 다이묘들에게 연락해 한성으로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함경도에서 패배해 물러선 가토군과 나베시마군도 한성에 도착했다.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이 승리한 기세를 몰아 왜군을 추격 중이라는데 이민호는 이때쯤인 1월 27일에 벽제관 전투가 발생한다고 알고 있었다. 기병 겨우 3천으로 깊숙이 추격하던 이여송은 왜군의 포위 공격에 병력 절반을 잃고 허겁지겁 도주하다가 차단당한다.

그리고 전멸 직전에 좌협대장 양원이 지원하여 간신히 포위망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 전투가 끝나고 명군과 왜군은 서로 상대방 10만 대군을 물리친 대첩을 거뒀다고 주장했다.

“명군이 퇴각하는 바람에 한성으로 진군하던 전라순찰사와 전라방어사의 군세가 고립되게 생겼네. 수원 독산성에 있다가 명군을 지원하기 위해 북상한다고 들었는데 어디까지 갔을지 모르겠네. 권 순사 율 영감이 불리하다고 물러설 위인이 아니라서 큰일일세.”

“걱정 마십시오, 권 영감은 믿을 만한 분입니다.”

“그래도 휘하 병력이 너무 적으니 문제지. 그 적은 병력 절반을 다시 방어사에게 나눠주지 않았나? 순사 밑에 병력이 많아야 3, 4천일 걸세.”

이민호는 사실 행주대첩이 이루어질 시기에 맞춰 조선에 도착했다. 역사와 비슷하게 흘러간다면 행주대첩을 기화로 한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성에 왜군 병력이 너무 집중돼 전투를 통해 탈환할 욕심은 내지 못했다. 그저 한성 밖에서 강하게 왜군을 압박해 스스로 남쪽으로 물러나게 할 생각이었다.

“한산도에 충청수군이 안 보이던데 혹시 삼도통제영에 속하지 않은 겁니까?”

“아닐세. 충청수군은 경기도 근처에서 작전을 하고 있어서 통제영에 내려오지 못했네. 가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용산창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한다고 들었네.”

용산창에 쌀이 아직도 수천 석이 남아있다고 했다. 다른 지방에서 굶주리다가 한성에 모인 왜군이 용산창에 남은 쌀 덕택에 간신히 죽이라도 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용산창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 때문에 조정 대신들이 욕을 많이 먹었다. 용산창만 제대로 불태웠다면 군량이 떨어진 왜군이 진작 한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물러났을 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왕자님 두 분은 돌아오셨네. 가등청정을 잡은 자네 덕일세. 고맙네.”

“저야 전투가 끝나고 바로 떠났으니 모르죠. 북평사 정문부가 일을 잘했군요.”

“하지만 전공은 대부분 종성부사 정현룡에게 돌아갔다네. 그 사람이 지금 함경북병사로 영전했네.”

“맙소사!”

“오해는 말게. 정 평사 그 사람이 자기는 문관이라고 전공을 대부분 무관들에게 돌리는 바람에 그렇게 됐네. 정 평사도 부사로 승진했네.”

한 고을을 다스리는 부사와 한 도의 최고 군사 책임자인 병마절도사는 레벨이 달랐다. 그래서 이민호는 몹시 안타까웠다. 그러나 일본을 정벌한다면 빼돌리기 쉬운 직책에 정문부가 있는 것 같아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경상도는 어떻습니까?”

“요즘 육군이 경상우도에서 몇 차례 작은 승리를 거뒀네. 진주성과 경상우병영이 왜군의 침입을 확실히 막고 있어서 안심이야. 요즘은 수륙군이 합세해서 울산성에 대해 공격을 집중하고 있네. 자네 춘부장도 울산 태화강에 계시네. 꾸준히 공격했더니 울산 왜성도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야.”

“예? 아버지가 울산 왜성을 공격 중이라고요?”

“춘부장께 전라도 해안의 방비를 맡겼더니 무척 섭섭해 하셨네. 그래서 지금은 판옥선 50여 척을 이끌고 태화강 안쪽 깊숙이 들어가 울산 왜성 공격을 지휘하고 계시네. 비격진천뢰를 100개쯤 늘어놓고 한꺼번에 쏴대는데, 바위로 된 그 단단한 왜성이 아주 초토화가 되었다더군.”

이민호와 이순신이 동시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민호의 부친 이응화는 화약을 물 쓰듯이 쓰면서 왜군을 열심히 몰아붙이고 있었다. 경상좌수사 이수일이 몇 척 안 되는 배를 태화강에 몰고 들어가 이응화와 함께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울산은 한반도에 남은 왜군의 마지막 상륙 교두보이기 때문에 왜군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다. 왜선들이 강 하구를 통해 공격해오기도 했고, 지상에서 조총을 쏘면서 포위해 화공을 가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판옥선과 외륜선에서 강력한 화력을 쏟아 부어 모조리 격퇴시켰다고 한다.

“유구국 상풍 세자 저하께서 계신 자리에서 전쟁 이야기만 해서 죄송합니다.”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쇼호 왕자는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본 감상이 어떤가?”

이순신이 조심스럽게 유구국 왕자에게 양해를 구했고, 이민호도 미안해서 쇼호 왕자에게 물어봤다. 그때까지 입을 벌리고 멍한 눈으로 그저 듣기만 하던 쇼호 왕자가 고개를 세차게 저은 다음 대답했다.

“통제사 대감! 그리고 전하!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의 영웅들이 서로 싸우는 이야기를 듣고 입에서 침이 흘러내리는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 눈앞에 이번 전쟁의 영웅이 두 분이나 계시니 더더욱 영광입니다.”

“전쟁이 무슨 영웅 놀음인 줄 아나? 장차 국왕이 될 사람이라면 고생하는 백성들, 죽어간 군사들을 먼저 생각해야지!”

“아! 죄송합니다. 하오나 보위를 물려받기 전까지는 저도 그저 영웅 이야기를 좋아하는 피 끓는 젊은이일 뿐입니다.”

그런데 쇼호 왕자가 이민호보다 나이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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