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0 28. 출병 =========================================================================
이민호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듣고 아라 공주가 조금씩 평정을 되찾았다. 처음에 고산국 함대가 수많은 왜선에게 포위된 것을 봤을 때 공주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급박한 상황이라 생각하고 겁을 먹고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을 동원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대형 세키부네에 90명이 타는데 그 중에 노잡이와 사공이 60명 이상, 병사가 30명 이하. 병사들 중에 조총병은 몇 안 되는군요. 왜선 중에 세키부네는 겨우 3분의 1 정도에요.”
“정답이오, 공주.”
이민호가 상으로 아라 공주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라 공주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옆에서 지켜보던 계복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바다에서 싸우는 수병과 해병들은 기본적으로 상대방 전력과 비교하는 방법을 배워서 한결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기마병이나 승마보병들은 바다를 새까맣게 메운 왜선을 보고 조금 겁에 질려 있었다.
이 시대 해전의 주력 투사무기는 활과 총인데 숫자는 물론 성능도 고산국 쪽이 압도적이었다. 거기에 고산국 전선에는 함포도 있었다.
적선이 몇 배나 됐지만 객관적으로 지고 싶어도 도저히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물론 겁쟁이가 지휘한다면 도망가다가 다 나포되거나 가라앉을 수도 있었다. 이래서 전력비교를 객관적으로 해야 했다.
- 쿠쿵! 쿵!
전선 18척이 나고야 성 주변 왜군 진영에 대한 포격을 멈추고 왜선들을 향해 포구를 돌린 다음 포탄을 퍼부었다. 거리는 이미 충분히 가까워 조준하는데 시간이 거의 들지 않았다. 이 시대 함포와 달리 고산국 전선에 탑재된 3인치 함포는 단 몇 초 만에 다음 포탄을 날릴 수 있었다.
포탄에 맞은 세키부네에 탄 왜병들이 떼죽음 당하고 고바야는 한 방 맞으면 즉시 침몰했다. 소문보다 더한 고산국 함포의 무서움을 확인하면서 왜선들은 최고 속도로 연합함대 함선들에 달려들었다. 속도를 통해 피해를 줄이고 접근만 한다면 승부를 볼 수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사무라이가 본보기로 노잡이 몇 명의 목을 베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전선에 채 접근하기도 전에 절반에 달하는 왜선들이 가라앉았다. 특히 선체가 크고 조총병이 많이 탑승한 세키부네가 집중 표적이 되었다.
- 탕! 타탕!
- 타타타타탕!
왜선에서 본격적으로 총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전선과 외륜선에 가득 탄 해병과 승마보병, 기마병들까지 갑판에 빽빽이 늘어서서 총을 연속 발사했다. 세키부네나 고바야에 탄 조총병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였다.
왜선에 탄 조총병 숫자는 세키부네에 탄 병사들 100퍼센트가 조총병이라 해도 많아야 30명, 고바야는 8명이었다. 이곳에 몰린 왜선 320여 척 중에서 세키부네는 절반도 되지 않고 고바야가 훨씬 더 많았다. 세키부네가 최대 절반이라 해도 4800명 더하기 1280명은 6080명에 불과했다. 물론 왜병 전체가 조총병이라는 가정 아래에 나온 숫자였다.
반면에 연합함대는 승마보병 5천 명과 해병 2천 명, 그리고 기마병 5백 명이 전선 18척과 대형 외륜선 12척에 나눠 타고 있었다. 함포를 빼고도 각 배마다 수병들 포함해 최소 250명씩이 갑판에 올라 왜선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장전이 빠른 탄피식 후장총의 화력도 무서웠지만 가끔 날아가는 유탄은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 퍼펑!
세키부네 상갑판의 방패판을 뚫고 들어간 유탄이 갑판 위에서 폭발했다. 유탄이 비록 야전에서의 위력은 작아도 밀집한 갑판에서는 재앙을 초래했다.
폭발 위치 가까이 있던 왜병 세 명이 파편을 뒤집어쓰며 쓰러졌다. 그러나 약간 떨어진 곳에도 파편이 튀었다. 총구나 화약접시에 화약을 담던 왜병들이 조총을 놓치며 화약을 바닥에 뿌렸다. 화승에서 피어오르던 불씨가 화약으로 옮겨 붙고, 이 불길이 파편 폭풍에 넘어져서 화약을 쏟아낸 화약통으로 번졌다.
- 콰쾅!
상갑판에서 일어난 폭발이 왜병들을 휩쓸고도 힘이 넘쳐나 바닥을 터뜨려 찢어버렸다. 아래 갑판에서 노를 젓던 왜인 수부들이 나무 파편에 맞아 갈가리 찢겼다.
조총병 15명과 궁병 10명, 기타 왜병 5명을 태운 세키부네가 전투 현장에서 표류하면서 다른 배들의 진로를 막았다. 고속으로 달려오던 다른 세키부네가 피하지 못하고 그 배와 충돌했다. 적당한 거리에 떨어진 세키부네 두 척을 향해 보병총과 기병총 수백 정이 총탄을 쏟아 부었다.
- 퍽!
함교창 위쪽에 총탄이 맞고 튕겼는지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어느새 기함 함교도 조총 사거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 동안 있는 듯 없는 듯했던 민희와 민영이 슬쩍 움직여 이민호 앞을 가렸다. 이로써 나고야 성 앞 바다에 모여든 모든 사람이 전투 중이었다.
조선 수군이 멀리서 왜선을 향해 화포를 뻥뻥 쏘는 원거리 포격전만으로 이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판옥선이 왜선에 비해 크고 높아서 성곽 같아 싸우면 이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자들도 있었다. 그런 자들은 지휘관이 이순신이 아니라도 왜군을 상대로 해전에서 당연히 이겨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통제사를 원균으로 바꿔서 어떻게 됐는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백성들 목숨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걸고 장난 친 인간들은 나중에 아무 소리 못했다. 이순신을 파면하자고 주장한 조정 대신들이 죽고 난 뒤에 나온 문집에서 이들은 이순신이나 수군에 대해서는 일번반구 하지 못했다. 혹시나 본인이 그런 글을 썼더라도 개소리라고 판단한 후손들이 문집을 출판하기 전에 그런 내용을 가차 없이 빼버렸을 것이다.
임진왜란 해전 중에서 이순신이 탄 전라좌수영 좌선 또는 통제영 상선이 왜군의 조총 사거리 바깥에서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는 해전마다 꼬박꼬박 좌선 또는 상선 탑승자 중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상자 중에는 조총은 물론이고 일본 화살에 맞아 죽거나 다친 자들도 있었다.
“제가 키가 더 컸다면 두 분 귀인님들처럼 전하를 보호할 수 있는데, 분해요!”
민희와 민영의 몸에 가린 아라 공주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나 이민호는 꼬맹이 공주한테 보호받을 바에 차라리 자살하고 말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라 공주. 호위가 할 일이 있고 공주가 할 일이 있소.”
“제가 할 일이 뭔가요, 전하? 아! 하나는 알아요. 하지만 제가 어려서, 어리다 해도 전하께서 좋다고 하시면 저는 괜찮아요.”
왜 얼굴이 빨개지는지 이민호는 대충 감을 잡고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보기에 아라 공주는 아이누족 꼬마들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귀여움만으로도 이민호에게 충분히 즐거움을 선사해줬다.
“공주는 고산국과 유구국의 우호와 협력의 상징이오. 우리의 결혼이 개인적인 사랑으로, 쿨럭! 맺어지기도 했으나 동맹국인 두 나라를 더욱 결속시키기 위해서요. 그러니 공주는 앞으로 두 나라의 백성과 우호 협력을 위해 일하시오. 그러나 지금은 지식을 쌓고 지혜를 다듬는 편이 좋겠소.”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저는 위대하신 국왕전하를 위해 평생 모든 것을 바치겠어요.”
“고, 고맙소, 공주. 그대를 사랑하오.”
공주를 안으니 투구 끝이 겨우 가슴팍에 왔다. 이민호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민희와 민영을 보기도 민망해 고개를 돌렸다.
전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처참한 장면도 많이 보게 될까봐 공주를 침실로 보냈다.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함교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을 확인한 다음 이민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정략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거야? 저 꼬마 공주도 불쌍하다.”
“주인님이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국왕이 백성들에게 책임을 지려면 돈 많은 중년 과부에게 몸을 팔 각오까지 되어 있어야 한다고요.”
“중년 과부가 차라리 낫겠다. 여진족과 아이누족에 유구국까지, 죄다 꼬마야. 미치겠다.”
“전에 혜영 통령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고산국이 남만 여러 나라와 친분을 다지고 인도로 진출하려면 올망졸망한 수십 개의 토후국과 결혼동맹을 맺어야 한 대요.”
이민호 머리에 언뜻 스치는 인상은 후궁에 세워진 내명부 여학교가 아닌 고아원이었다. 여러 인종의 아이들이 이민호에게 아빠라고 부르며 몰려들 것만 같았다.
“그래? 그럼 진출 안 할래.”
“주인님이 하실 일인 걸요?”
이민호가 함교에서 노닥거리는 사이 전투는 어느 정도 끝나가고 있었다. 왜선 절반 이상이 접근 중에 함포에 얻어맞아 가라앉고 나머지는 총격전에서 압도당했다.
어쩌다가 고바야 한두 척에서 왜병들이 전선에 대나무사다리를 걸고 갑판에 올라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왜병이 갑판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총검에 찔려 바다에 거꾸로 빠졌다. 고바야에 탄 노잡이와 병사들 합해서 20~30명이 수류탄 한두 발에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합함대의 모든 배가 방어전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민호는 유구국에서도 연합함대에 배를 참가시켰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유구국 범선 몇 척이 용감하게 왜선들을 향해 돌진했다.
“저 놈들 뭐하냐?”
“앞에 선 배는 쇼호 왕자의 좌선 아닙니까, 도련님?”
유구국 범선이 세키부네 한 척에 접현하더니 병사들이 총격을 퍼부었다. 그 직후 화려한 갑옷을 입은 유구국 전사들이 칼을 뽑아들고 왜선으로 뛰어들었다. 왜선 갑판에서 칼싸움이 시작됐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유구국 배는 왕자가 타는 좌선이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쇼호 왕자가 안전한 곳에 가만히 있어 주면 좋을 텐데, 왕자는 나름대로 피 끓는 청춘이었다. 가장 선두에 서서 시뻘건 피가 묻은 칼을 휘두르는 자가 바로 쇼호 왕자였다.
갑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사무라이와 맞대결을 펼친 쇼호 왕자가 30합이 넘는 혈투 끝에 사무라이를 부상시킨 다음 포로로 잡았다. 유구국 전사들이 일제히 창칼을 치켜 올리며 환호함으로써 승리를 자축했다.
“뜻밖에 칼싸움은 잘하네. 칼싸움 하나만큼은 조선군보다 훨씬 낫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왜구들과 싸웠을 테니 만만치 않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유구국이 사쓰마에 정복된 것은 전력 차이가 워낙 커서 처음부터 저항할 엄두를 못 낸 것 때문이지, 약해 빠져서 저항을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해적들이 들끓는 동남아 바다에서 살아가던 자들이 유구국 상인들이었다. 상업에 의존하는 자그마한 섬나라가 숫자가 많은 명나라 해적이나 악랄하기로 유명한 왜구, 총과 대포를 앞세운 서양 상인 겸 해적들로부터 살아남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1611년 유구국 왕자가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제주목사 이기빈의 꾐에 빠져 부하들까지 몰살당하고 화물을 약탈당한 적이 있었다. 유구국 사람들이 싸울 때는 잘 싸우는데 한 번 기세에서 밀리면 저항을 아예 포기해버리는 나쁜 버릇이 있는 듯했다.
“유구국 인구가 조금만 더 많았으면 좋겠다.”
“요 몇 년 사이에 유구국에서 아기들이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답니다.”
고산국과 해중국 일을 해주면서 유구국은 수십 년 간 지속되던 불경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구국은 인구가 적어 이민호가 의뢰한 물소 뿔과 티크목의 중개무역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민호가 사업 몇 가지를 소개해주어 지금은 최소한 수도와 궁성만큼은 흥청망청할 지경이었다. 전복 양식도 성공했고 상어 지느러미 요리가 광저우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요즘에는 류큐 열도 주변에서 상어가 씨가 말랐다. 유구국 어민들이 멀리 필리핀까지 가서 상어 지느러미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구국 인구 증가의 일등 공신은 뭐니 뭐니 해도 고구마였다. 일단 먹을 것이 해결되어야 백성들이 자식을 낳아 기를 수 있었다.
복건성에서도 조만간 인구폭발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실제 역사에서 청나라로 바뀐 뒤 조정이 백성들을 위해서 한 일은 별로 없었지만 인구가 몇 배로 불어났다. 이것을 중국 땅 전역에 고구마 재배가 확산된 탓으로 보는 경제학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전투가 대충 마무리되자 연합함대가 진형을 새로이 짰다. 이민호가 나고야 성 주변을 돌아보니 진채에 있던 왜병들은 이미 내륙으로 철수한 후였다. 처음부터 왜군 육군은 해전이 일어날 때까지 시간만 끌어주기로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음부터는 고산국 전선이 나타나기만 해도 왜병들이 산으로 도망갈 것 같았다.
연합함대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대마도로 향했다. 바다에 부서진 나무판자와 옷가지가 가득 쌓여서 뚫고 지나기가 힘겨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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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