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9 28. 출병 =========================================================================
히라도 성을 무너뜨린 고산국 함대는 그 동쪽 30리쯤 거리에 있는 마쓰우라(松浦)로 향했다. 일본에서 드물게 갯벌이 넓게 펼쳐진 곳이라 함대는 수심이 깊은 곳으로만 지나갔다.
대형 선박 45척에 압도당한 마쓰우라의 영지 병사들은 감히 배를 띄워 도전하지 못하고 산으로 피했다. 원나라의 침공 때도 활약했던 유서 깊은 해적들이 바다에서의 공격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는 것이 웃겼다. 고산국과 유구국 연합함대는 성을 무너뜨리고 마을을 불사르고 포구에 남아있는 왜선들을 남김없이 불태우거나 가라앉혔다.
현재 조선에서 고니시군과 함께 행동하는 마쓰우라 시게노부의 영지는 이곳 마쓰우라와 동쪽 후쿠시마(福島), 그리고 북쪽 이키 섬에 있었다. 이민호는 큐슈 북쪽에 위치한, 이름만 같은 후쿠시마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얼른 나고야 성을 공격합시다, 도련님. 떼로 몰려있는 놈들에게 포탄을 퍼붓는 겁니다.”
“아쉽지만 시간이 없겠는데?”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함대는 다시 북쪽으로 나가서 이키 섬과 히라도 사이의 작은 섬에 정박했다. 이민호는 왜군이 밤에 작은 배를 잔뜩 동원해 어둠을 틈타 접근한 다음 함대에 야습할 것을 걱정했다. 그러나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은 있었다. 히라도에서 나고야로 보내는 전령선이 중간에 고산국 전선에 포착돼 격침당한 것이다.
그러나 히라도와 마쓰우라가 공격받은 사실이 어떻게든 나고야 성에 전해졌을 것으로 이민호는 예상했다. 현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고야가 아닌 오사카에 있다고 겐타로가 보고했으니 풍신수길을 잡을 욕심은 아예 없었다.
“공주님을 예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하.”
“평생 함께 살 애, 아니 여잔데 당연하지.”
품에 안겨 콜콜 자는 아라 공주의 머리를 이민호가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슈리 궁성을 떠난 직후부터 이민호가 며칠째 계속해서 공주와 붙어있자 시녀들이 감동하고 있었다. 이제야 진심이 통한 것 같아 이민호도 기뻤다.
“하지만 전하께서 그 동안 공주님 외에는 여자를 접하지 못하셨습니다. 괜찮으신지요?”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어? 할 수 없지 뭐.”
“전하께서 저희들을 안아주시면 기쁘겠습니다.”
시녀 아야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이민호에게 청했다. 다른 두 시녀도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떨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민호는 시녀들이 하는 행동이 불쌍하다 못해 조금 웃겼다.
“됐어. 공주 깰라. 너희들도 어서 자.”
“평안히 주무십시오, 전하.”
시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보조 침대에 몸을 눕혔다. 사실 이민호는 공주하고만 있다 보니 그 동안 좀 쌓였다. 그러나 아라 공주가 있는 곳에서 다른 여자를 안으려니 미안했다.
이민호가 주상아 공주의 별궁에 머물 때는 공주가 다른 시녀들을 안아달라고 부탁했을 때만 시녀들을 안았다. 시녀들은 이민호가 아닌 공주에 속한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라 공주의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라 공주가 과연 시녀들을 안아달라고 이민호에게 부탁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고산국 궁궐에 돌아가면 혜영이 많이 가르쳐주겠지만, 아직 돌아가려면 멀었다.
아침 해가 뜨고 아침을 먹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 이민호가 함교로 나왔다. 이민호는 아직 새벽잠이 많아 새벽에는 아예 작전을 하지 않기로 정했다.
야간 당직자들은 모두 쉬러 들어가고 새로 교대해서 팔팔한 인원들이 함교에서 일하고 있었다. 계복이 이민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다, 국왕전하? 밤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을 보고 드리게 돼서 유감입니다.”
“왜놈들은 밤새 뭐한 거야? 단순히 우릴 못 찾은 건가?”
“우리가 무서워서 아예 바다로 못 나오나 봅니다. 태풍 오라고 기도나 했겠지요.”
며칠째 막강한 고산국 함대에게 공격당하는 큐슈의 일본인들은 원나라가 공격했을 때처럼 태풍이 오길 빌 것 같았다. 물론 아직 태풍이 올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음력 1월 하순이라 일기가 불순한 편이었다. 북풍과 남풍이 번갈아 불어서 범선이 표류하지 않도록 잘 살피고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경우에는 전선이나 외륜선이 범선을 예인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가 큐슈 서쪽 해안을 박살내고 있다는 소식은 나고야에도 들어갔을 거야. 다음 목표가 나고야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했겠지. 풍신수길은 나고야로 병력을 집결시켰을까?”
“그렇게 소식이 빨리 전해질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털었던 곳으로 병력을 보내서 나고야 주변에 포진한 병력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알 수 없지.”
“혹시 도련님은 나고야 성에 상륙시키려는 것은 아니겠죠?”
“상황 봐서.”
정말로 10만 대군이 나고야 성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면 해병 2천과 말이 없는 승마보병 5천을 상륙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나고야 성을 둘러싼 왜군이 적다면 병력을 상륙시켜 나고야 성을 완전히 폭파한 다음 퇴각할 수도 있었다.
“수송선들은 통제영으로 먼저 보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왜? 일본 해역에 왜선이 몇 척 없던데. 그냥 데리고 다니지 뭐. 포탄은 안 부족해?”
“예. 아직 반도 못 썼습니다. 어제 사용한 포탄 숫자만큼 보급선에서 전선으로 보충해줬습니다. 여유 만만입니다.”
큐슈 서해안에서 며칠 동안이나 활동했지만 군소 영주들이 모은 왜선 100척과 싸운 것이 일본의 저항 거의 전부였다. 큐슈에 배가 더 남아있을 것 같지 않았고, 전선들이 붙어있는 한 왜선들이 접근한다 해도 수송선에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민호는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전선 탄약창에는 포탄이 가득 실려 있었다. 이민호가 만든 화약에는 둔감화 기술이 적용돼 쉽게 터지지 않으니 탄약창에 화재가 나도 폭발할 걱정은 없었다. 이 시대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겠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화약 둔감화 기술이 반드시 필요했다.
“정찰 보고하겠습니다.”
새벽에 단정을 타고 나갔던 수병들이 기함으로 돌아왔다. 나고야 성의 천수각은 무너진 채 그대로였고, 성 주변에 잔뜩 깔린 진영에는 왜군 수만 명이 주둔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바야 몇 척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나고야 성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풍신수길도 없고 성에서 가장 상징적인 건물인 천수각이 무너졌으니 왜군 병력이나 줄여야겠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함장이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전하! 함대 출항 준비가 끝났습니다.”
“좋다. 출항!”
기함의 함장이 신호수들을 동원해 다른 배들에 출항 명령을 전했다. 범선 여러 척에서 일제히 돛을 펼쳤고, 연합함대 함선 45척이 일제히 동쪽으로 움직였다.
고산국과 유구국의 범선들이 최소 쌍돛대에 앞뒤로 삼각돛을 추가해 역풍에도 추진력을 얻을 수 있게 개조된 지도 꽤 됐다. 포르투갈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 실험을 해서 역풍 항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으면 전적으로 해류에 의지해야 한다. 만약 섬이나 육지 사이에 있다가 무풍지대를 만나면 그야말로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범선은 여러 면에서 결코 좋지 않았다.
연합함대에 속한 대형선 45척은 당당하게 동쪽으로 향했다. 지난번처럼 동쪽 언덕에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나고야 성의 천수각은 이미 무너져서 밝은 태양빛에 눈을 뜨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고야 성에는 아직 성곽과 부속 건물들이 다수 남아있고 성 주변에는 10만에 달하는 병력이 주둔한 진채가 나고야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민호가 이끄는 고산국과 유구국 연합함대는 10배가 넘는 적을 공격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사거리가 긴 함포를 주로 사용할 예정이므로 아군에 희생자가 날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함장! 사거리에 들면 따로 명령이 없어도 포격 시작하도록 예하 함정들에 지시해.”
“예! 전하! 그리고 이미 함선별로 목표를 부여했습니다.”
이민호는 겐타로가 최근에 보내준 지도를 살폈다. 지도에는 나고야 성 주위에 포진한 왜군 진영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가 표시돼 있었다. 지난번에 공격했을 때와 비교했을 때 다이묘들의 진채 위치에 변동이 꽤 있었다.
덕천가강,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진영은 원래 나고야 성 동쪽에 배치됐었다가 지금은 서쪽으로 옮겼다. 중소 영주나 병력이 적은 해적 다이묘의 진영이 내륙으로 빠지고 대규모 영지를 소유한 다이묘들의 진영이 해안에 전진 배치된 점이 눈에 띄었다.
- 쿠쿵! 쿵!
드디어 함대의 포격이 시작됐다. 이민호는 망원경을 들어 나고야 성을 살폈다. 무너진 천수각 주변의 성곽이 포탄에 맞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왜군 진영 여러 곳에서도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다. 전에는 모든 전선들이 천수각을 집중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전선마다 목표를 달리 했다. 왜군 병력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이번 작전의 목표였다. 도쿠가와군의 진영과 시마즈군의 진영이 집중 포격을 받았다.
- 타타탕!
해안의 왜군 진영에서 총소리가 울리고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러나 해병들이 사용하는 보병총도 거리가 멀어서 못 쏘고 있는데 조총탄이 전선까지 날아올 일은 없었다.
망루에 오른 무상이 아주 가끔 왜군의 대포 진지를 찾아내 위치를 함교에 보고했다. 기함 함장은 구식 화포라도 무시하지 않았다.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화포는 채 두 발도 쏘기 전에 왜병들과 함께 공중으로 솟구쳤다.
“공주, 왔소?”
“예. 전하. 늦어서 죄송해요.”
이민호는 갑옷을 입은 아라 공주를 당겨서 품에 안았다. 함교에서 공주의 전투 위치는 이민호의 품안이었다. 공주는 이민호가 다정하게 안아주는 것으로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민호는 아라 공주가 여동생이나 조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쉽게도 풍신수길은 저 성에 없다오.”
“언젠가는 침략의 원흉을 응징할 날이 올 거여요, 전하.”
“그래요. 그 날이 곧 오겠지요.”
그러나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거나 응징하는 것은 이미 이민호의 목표가 아니었다. 이민호는 일본을 정복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직후부터 이민호가 계속 조선에 남아있었다면 전쟁을 일찍 끝낼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간 중간에 일부러 자리를 비우고 다른 곳에 다녀오기도 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조선과 명나라는 물론 일본의 국력도 팍팍 깎여 내려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민호가 원하는 바였다. 생각 같아서는 원래 역사처럼 전쟁을 7년이나 끌 수도 있었지만, 가족과 고향을 잃고 슬퍼하는 피난민들이 눈에 밟혀서 많이 봐준 셈이었다.
“적선입니다! 북쪽 마다라시마(馬度島)와 가카라시마(加唐島) 사이의 수로에 약 100척이 나타났습니다. 숫자가 계속 늘어납니다!”
“가카라시마와 가베 섬 사이 동쪽 바다에도 적선 출현! 50척 이상입니다.”
망루에서 무상이 소리를 질렀다. 함교 인원들이 적선의 규모를 확인했다. 대략 200척이 넘는 왜선들이 연합함대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왜선들이 모두 돛을 접고 노만 저어 오는 것으로 보아 전부 다 전투선으로 파악됐다.
“왜놈들이 멍청이들만 모인 게 아니라면 뒤에도 나타나겠지.”
“서쪽에 적선 100여 척!”
이민호가 중얼거린 직후 망루에서 무상이 소리를 질렀다. 아라 공주가 이민호의 얼굴만 쳐다보며 오들오들 떨었다. 이민호가 공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함장이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왜선은 총 320척이 약간 넘습니다, 전하.”
이민호는 예상보다 훨씬 적은 숫자에 의아했으나 ‘겨우?’라고 묻지 않았다. 조선 침략의 대본영이나 다름없는 나고야 성을 바다에서 지키기 위해 동원한 배가 겨우 300여 척에 불과하다면 일본의 사정이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훨씬 더 많겠지만 하루 이틀 사이에 급하게 나고야 성 근처로 불러 모을 수 있는 배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일본의 온 산이 헐벗을 정도로 그렇게 많이 만들어도 조선에 가는 족족 깨지니 어쩔 수 없었다. 통제사 이순신은 미래의 기술을 갖고 활용하는 이민호에게도 몹시 존경스러운 무장이었다.
“외륜선에 포격을 지시하라.”
“예! 전하”
범선들을 보호하라고 뒤에 배치된 대형 외륜선 12척에는 3인치 함포가 1문씩 탑재돼 있었다. 이들이 서쪽에서 연합함대로 접근하는 왜선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연합함대는 45척에 불과한데 왜선은 320척이나 되었다. 그것도 왜선들이 세 방향에서 포위한 채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라 공주는 몹시 겁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어린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있어서 이민호는 가슴이 몹시 아팠다.
“전하! 큰일 났어요. 적선이 일곱 배가 넘어요.”
“인원으로 따지면 겨우 두 배일 뿐이오. 아니! 병사 숫자로 비교하면 오히려 우리가 많소.”
“예? 그럴 리가요.”
"그렇소."
============================ 작품 후기 ============================
일본 정벌 전에 간보기 수준이니까 중요한 전투는 아닙니다만,
저번에 대마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선에 왕복할 때마다 건드리는 수준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식이 물자소모나 심리면에서 더 심각할 수도 있겠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