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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08화 (157/1,000)

00208  28. 출병  =========================================================================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어와 이민호가 외투를 벗어 공주에게 둘러 씌워주었다. 아직 어린 공주의 눈에 하트가 맺힌 것 같아 살짝 품에 안았다.

이민호는 못해도 6, 7년은 기다려야 성인이 될 공주가 안쓰러웠다. 평균 수명이 짧은 이 시대에 조혼을 하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임신할 경우 위험하니 함부로 안을 수도 없었다. 그 기간 동안 공주가 처녀인 채로 병에 걸려 죽을 가능성도 높았다.

몇 가지 아이디어를 넘겼으니 마카오에서 선교사와 유학생들이 어서 항생제와 여러 가지 의약품을 만들어주길 바랐다. 항생제와 유아용 백신이 빨리 개발되면 좋겠지만 의사가 수술하기 전에 손을 씻지도 않는 시대였으니 재촉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생물학과 의학, 화학의 기초 수준이 전반적으로 상승해야 항생제 등 신약 개발이 가능했다. 이민호는 이 분야 학문에 이미 많은 기여를 하고 있었다.

“전하! 제가 어려서 나중에 안으시겠다면 아야나 다른 시녀라도 안아주세요. 이미 충분히 성숙한 처녀들이고 전하 말고는 남자를 접할 수 없는 여자들입니다.”

“그렇게 하겠소. 공주는 다 클 때까지 기다리시오. 하지만 공주를 잊은 것은 아닐 테니 걱정 마시오.”

“감사하옵니다, 전하.”

이민호가 몸은 어려도 생각만큼은 이미 조숙한 아라 공주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겠지만 지금은 너무 어린 공주에게 이렇게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공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이민호의 품에 깊이 안겼다.

이민호는 이때만 해도 아라 공주가 몇 년 동안 여학교에서 교육이나 받으며 편안히 지낼 줄 알았다. 그러나 혜영은 인재를 편히 놀게 내버려두는 법이 없었다. 아동노동은 아동학대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던 시기였고, 혜영도 어렸을 때부터 이민호가 시키는 여러 가지 일을 엄청나게 많이 했었다.

그날 밤은 사쓰마 반도 남서쪽 작은 섬에 정박하고 다음 날 오전부터 시마바라 해협 남쪽 아마쿠사와 북쪽 시마바라 해안을 함포로 두들겼다. 아마쿠사는 조선 침략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 중 일부이며, 시마바라는 기독교 해적 영주인 아리마 가문의 영지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아리마 하루노부는 현재 조선에 있었다.

작은 영주 혹은 가신들이 연합해 세키부네와 고바야 몇 척을 내보냈으나 불과 몇 분 만에 불쏘시개로 변했다. 그 이후부터 일본 영주들은 고산국 함대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닷가에 접한 모든 마을이 포격에 의해 불타올랐다.

“이야아아아~”

공격을 당해도 참아야 하는 게 분했던지 사무라이가 말을 타고 바다로 용감하게 돌진해왔다. 말을 탄 채로 바다를 뛰어넘어 전선에 올라타서 싸울 기세였다.

그러나 고산국 해병들이 총으로 쏠 필요도 없었고, 사무라이가 탄 말이 용마도 아니었다. 사무라이가 모래사장을 지나다가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과 함께 굴렀고, 사무라이는 목이 부러져 죽었다. 용기와 달리 허무한 최후였다.

“왜놈이 천벌을 받았다!”

“으하하!”

용감한 사무라이는 고산국 해병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민호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반대로 언덕 뒤에 숨어서 사무라이의 죽음을 지켜본 왜병들은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성호를 그었다. 이 지역에는 영주를 따라 기리시탄이 된 자들이 많았고, 원래 역사에서는 1637년에 기리시탄의 농민반란인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난다.

그날 낮에 해협 바깥에 수송선들과 전선 6척을 남겨두고 전선 12척으로 시마바라 해협을 지나 우토(宇土) 서쪽 바다에 도착했다. 바로 이곳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거성 우토 성이 있었다.

한 시간 남짓한 포격 끝에 우토 성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천수각과 야구라를 위에 올린 성문은 포격에 무너지기 아주 좋은 구조였다. 성곽 모서리 아래 부분의 석축을 노리고 꾸준히 포격을 가해 결국 성벽 귀퉁이를 한꺼번에 무너뜨리기도 했다.

이 날 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생 고니시 유키카게가 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 우토 성 아래 마을, 흔히 조카마치(城下町)라 부르는 시가지도 완전히 불태워버렸다. 함장이 더 이상 목표가 없다고 이민호에게 보고할 때까지 포격이 계속됐다.

“주인님. 다른 지역보다 더 철저히 부수라고 명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이곳이 소서행장의 영지 중심부거든. 한성에 있을 왜병들이 자기들 고향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더 불안해하라고 일부러 그런 거야.”

함교에서 이민호가 민희에게 설명해주었다. 아라 공주가 지켜보고 있어서 이민호는 민희와 민영에 대한 애정 표현을 자제했다. 그러나 아라 공주도 이민호와 호위들의 사이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큐슈 서부의 영지인 오무라(大村)는 폭이 극히 좁은 해협 안쪽에 있어 공격하지 못했다. 기병 몇 백을 상륙시켜 기병포로 공격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어차피 목표는 많았으니 내버려두기로 했다.

우토 성과 마을을 초토화시킨 다음 전선 12척이 해협 북쪽으로 이동해 구마모토 서쪽 바다에 도착했다. 아직 구마모토 성이 세워지기 전이라 큰 성이 없어서 이민호는 시가지만 불태우도록 지시했다.

시가지 중심에서 연막탄이 터질 때마다 하얀 연기 속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시가지에 초옥보다 기와집이 많았으나 역시 목재를 많이 쓰는 탓에 불길이 시가지 사방으로 번졌다.

왜인들이 아우성을 치며 몸만 빼어 무작정 동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죽고 다음 다이묘가 아직 세워지기 전의 시기라 방어하는 병력도 없었다. 전선에서 포수들만 열심히 함포를 쏘고 나머지는 그저 구경만 했다.

동쪽으로 멀리 아소산 정상이 보였다. 미카와 네이 등의 고향에서 가깝다는 바로 그 산이었다. 구마모토는 대충 큐슈의 지리적 중심부에 위치하고 만 내부 깊숙이 들어온 곳이라 바다가 잔잔했다. 나중에 큐슈를 점령하면 이곳을 행정의 중심으로 삼으면 괜찮겠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아흠~ 흡!”

아라 공주가 하품을 하다가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제 지겹소? 공주는 들어가서 쉬시오.”

“아니에요. 전하께서 적과 싸우시는 사이 제가 전하를 지켜드려야죠.”

누가 누굴 지켜? 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일본 갑옷 비슷하게 생긴 갑옷을 입고 있는 아라 공주는 상당히 귀여웠다.

아직 포격이 끝나지 않았으나 공주가 너무 피곤해하는 것 같아 아라 공주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시녀들이 공주를 목욕시키는 사이 침대에 누운 이민호는 깜짝 잠들었다.

깨어보니 이미 저녁이었고, 침실 안에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일어나려다 보니 아라 공주가 이민호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민호가 침대 옆에 서 있는 시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재울까?”

“공주님은 아직 성장이 필요한 나이에요. 저녁을 드셔야 하니 깨우시는 편이 좋겠어요.”

이민호가 아라 공주의 뺨에 뽀뽀를 하니 간지러웠는지 뺨을 손으로 비비며 일어났다. 눈앞에 이민호의 얼굴이 있어서 공주가 깜짝 놀랐다.

이민호는 공주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떠먹였다. 아이누족 아이들에게 밥을 먹인 적이 많아 숙달된 동작이었다. 아라 공주는 잘 받아먹으면서도 투정을 부렸다.

“전하! 저는 아이가 아니에요.”

“알고 있소. 애정 표현이니까 공주는 받아들이시오.”

12살에 결혼하자마자 집을 떠나 앞으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고산국 궁궐에서 지낼 공주가 불쌍했다. 명색이 신혼 초니까 공주와 함께 하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보내려고 이민호는 노력했다.

1월 26일 오전 고산국 함대가 나가사키에 가기 전 노모(野母)곶 앞 바다를 지날 때였다. 북쪽 바다에 왜선 100여 척이 나타났다. 큐슈 서부의 영주들이 힘을 합해 함대를 구성한 것 같았다.

그러나 함선 수에 비해 대형 전투선의 숫자가 부족해 세키부네는 겨우 20척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고바야나 그 이하 어선 수준이었다. 일본에서 만든 큰 배는 모조리 조선으로 보냈으나 얼마 못 가서 다 불타거나 가라앉았기 때문에 일본에는 큰 배가 없었다. 1월 초순부터 통제사 이순신이 여전히 잘해주고 있었다.

“함대, 횡대로 전환. 함포 사거리 내에 이미 들어왔으니 함대 진형을 짠 즉시 함포 사격을 할 수 있도록.”

“예! 기수! 일자진을 형성하라고 전선들에 신호를 보내라.”

조총 사거리가 되려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이민호가 느긋하게 지시하자 기함에서 기수들이 신호를 보냈다.

근대 해군들은 몇 가지 정해진 의미가 담긴 깃발 또는 알파벳을 대용하는 깃발을 한 줄에 엮어 올려 같은 함대의 함선들에게 신호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아직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 쿠웅!

뜻밖에 선제공격을 왜군 함대에서 먼저 했다. 어이없게도 왜선에서 자그마치 화포를 쏘아 고산국 기함에 명중시킨 것이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이민호는 많이 놀랐다. 그러나 왜선에서 쏜 화포는 딱 1문이었고, 함장이 보고를 받더니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함수부에 맞았으나 피해는 전혀 없습니다.”

“함대 진형이고 뭐고 바로 공격하시오. 적선을 남기지 마시오.”

“예!”

왜선에 탑재된 것이 소구경 화포라서 피해는 없다지만 선재로 사용된 판자 중간이 움푹 들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또 다시 비싼 티크목을 깨먹은 이민호는 화가 많이 났다.

고산국 전선들이 왜선들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큰 배부터 먼저 포격을 당했고, 서너 방 맞으면 배가 마치 부실 공사로 지은 건물처럼 통째로 수면에 무너져 내렸다. 작은 배는 한 방만 맞아도 피떡이 된 왜병, 수부들과 함께 가라앉았다.

5분도 지나지 않아 50여 척이 침몰하자 살아남은 작은 배들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고산국 함대는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나머지 작은 배들을 여유롭게 사냥했다.

그러나 왜선 10여 척 정도가 간신히 포격을 피해 다카시마 섬 해안에 닿았다. 왜병들이 배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 버렸다.

“전하! 추격을 중지해 주십시오. 다카시마 서쪽은 스모 여울이라 해서 수심이 매우 얕습니다.”

“알았다. 함대, 북쪽으로 항진한다.”

이 시대 항해사의 조언은 절대적이었다. 단정을 내려 왜병들을 추격할까 했으나 시간 낭비였다. 이민호는 다음 목표를 생각하고 있었다.

고산국 원정함대는 부서진 판자와 옷가지 같은 것들을 헤치며 북쪽으로 향했다. 다음 목표인 나가사키가 가까이 있었으나 만 입구가 너무 좁아서 이민호가 직접 보고 나서 공격을 결정하기로 했었다.

직접 보니 역시나 폭이 너무 좁아 해협 양쪽 해안에서 조총을 쏘면 맞을 것 같아 공격을 포기했다. 니시무라 겐타로도 가급적이면 나가사키를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으니 다음 목표로 넘어가기로 했다.

고산국 함대는 큐슈 서부 해안을 따라 바닷가 마을을 공격하면서 계속 북상했다. 큐슈 북서쪽 끝에 위치한 히라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전하! 계획대로 북쪽으로 우회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이민호가 함장의 항로 변경 요청을 승인했다. 히라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이 너무 좁았다. 이민호는 괜한 자존심 때문에 육지에서 공격하는 조총탄에 배에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함대는 북쪽으로 빙 돌아 동쪽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이키 섬이 보이는 지점에서 다시 남쪽으로 조금 내려와 히라도(平戶) 성을 포격 사거리 안에 두었다.

항구와 함께 있는 왜성들이 다 그렇듯 성이 항구를 보호하는 식으로 건설돼 있었다. 바닷가에 성이 세워졌다는 뜻이었다.

- 우르릉~

전선 18척이 포격에 나서자 무거운 천수각이 일제 사격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성 건물 여러 곳도 불타올랐다.

나가사키 서쪽 해상에서 싸울 때 병력과 배를 보냈다가 전멸했는지 바다에서의 저항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미 피난령을 내렸는지 민간인들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쳇! 다 도망갔군.”

“왜적들은 그놈들이 말하는 신풍 말고는 바다에서 우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계복의 말이 맞았다. 이 정도 함대 전력이라면 왜선 천 척이 몰려와도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민호는 굳이 왜선 천 척과 정면대결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만약 싸워야 한다 해도 우세한 속도와 함포 사거리를 이용해 원거리전으로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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