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3 27. 순행 =========================================================================
“그렇다면 국왕전하께서는 그 이하 단계의 무기는 팔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화승총과 화약 정도는 얼마든지 팔 수 있습니다.”
“명나라나 아시아 해적들이 화승총을 쓰던데 혹시 고산국에서 수출한 제품이 아닌지요. 조금 우려스럽습니다.”
“총독! 화약을 최초로 발명한 곳은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오. 명나라나 그 주변 국가에서 활동하는 아시아 해적들이 화약을 쓰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소. 유독 일본만 뒤늦게 화약무기를 접한 것이니 절대로 일본이 기준이 될 수는 없소.”
포르투갈은 인도에서 말래카해협을 지나 마카오까지 오는 동안 숱한 전투를 해야 했고, 상대방 대부분은 조잡하나마 화약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말래카해협을 제외한다면 국가 단위로 정복해본 적이 없었다. 버마의 루비에 눈독을 들이면서도 용병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에스파냐가 마닐라까지 오면서 상대한 자들은 타히티, 괌, 필리핀 동부 지역인 세부와 비사야 등 동아시아의 중심에서 동떨어진 곳이었다. 당연히 화약무기를 쓰는 곳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술루해적이나 명나라 해적들을 상대하는 동안 해적들이 화약무기를 써서 에스파냐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유럽인들이 화약무기 제조와 사용을 야만인 원주민과 다른 문명인의 기준으로 삼았으니, 그들 기준이라면 저 헐벗은 동남아 해적들은 충분히 문명인들이었다.
“제가 잘못 알았군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산국이 일부러 품질을 낮춘 화승총을 판 곳은 안남과 류큐, 그리고 멀리 북쪽의 섬뿐이오. 그런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일본에 대량으로 판 화약이 지금 조선에서 사용되고 있소.”
“그 문제는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일본에 화약을 판매할 때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전이었습니다.”
총독 입장에서야 지금도 일본에 화약을 팔고 싶겠지만 그 전에 포르투갈에게 밀려버렸다. 그 후에는 고산국 눈치를 보느라 팔지 못했다.
일본은 자국인 처녀 또는 포로가 된 조선인을 노예로 팔고 화약을 샀는데 판매한 노예 대부분이 고산국으로 흘러갔다. 이민호는 싼값에 흑색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포르투갈 노예무역선을 앞세워 일본에서 노예들을 사들이는 즉시 해방시켰다. 이들 중 다수가 고산국에 정착했으니 비용에 비해 효과가 큰 장사를 한 셈이었다.
만찬 시간에 총독과 함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민호와 총독은 합의된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고 사인을 해서 협정문을 교환하기로 했다.
숙소에 돌아와서 자는데 깊은 밤에 창문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잠에서 깬 이민호가 머리맡에 숨겨둔 권총을 빼들었다. 고요한 달빛 아래 주상아 공주가 품에 안겨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창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자가 방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그리고 큰 침대에 누운 이민호와 공주, 주변 이동식 간이침대에 누워 자는 시녀들을 살폈다.
괴한은 옷장과 화장대의 서랍을 열면서 뭔가를 찾는 듯했다. 얼굴에 눈만 가리는 검은 복면을 쓰고 무기는 채찍을 들어서 복장만 보면 딱 변태 스타일이었다. 좋게 봐서 조로 복장이었다.
“넌 뭐지?”
“으악!”
괴한이 비명을 지르자 이민호가 더 놀랐다. 이민호가 권총을 들이대면서 으르렁거렸다.
“쉿! 목소리 낮춰. 사람들 깨지 않게.”
“저항하지 않을 테니 총을 쏘지 마라. 그런데 당신 지금 포르투갈어를 하는 건가? 알아듣기 힘드니 차라리 내가 중국어를 하겠다.”
“그렇게 해. 대신 채찍은 바닥에 내려놔. 손목이 조금만 수상하게 움직여도 바로 방아쇠를 당기겠다. 뭘 훔치러 왔어?”
“나는 ‘공주의 환희’라는 루비를 찾으러 왔다.”
괴한이 노리는 것이 주상아 공주의 왕관에 박힌 루비인 모양인데 그게 어느새 이름까지 붙었다. 마카오에서 떠난 이민호가 해남도에서 겨우 사흘인가 머물렀으니 마카오에서 마닐라까지 소문이 퍼질 시간은 아니었다. 오늘 만찬에서도 주상아 공주가 루비가 박힌 왕관을 써서 크게 화제가 됐던 모양이었다.
“역시 도둑놈이었군.”
“아니야! 그것을 팔아 불쌍한 식민지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야!”
“순진한 영웅 납셨군 그래. 그게 가격이 얼만데? 마닐라에서 팔릴 수 있겠나?”
“은으로 100만 냥이라고 들었다. 마닐라에서는 곤란해도 아카풀코에 보내면 판매가 가능하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20만 냥이라고 평가하던데?”
“그건 최소 가격이 그렇다는 이야기겠지. 보석이라면 포르투갈보다는 에스파냐 상인들이 감정한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공주의 환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루비라는 소문이 났고 이국적인 미녀 공주가 쓴 왕관에 박힌 보석이니 그 이상 받을 수도 있다.”
“그렇군. 알았다. 그럼 이만 나가봐라.”
이민호는 이 괴한이 창문에 접근하는 순간 이미 호위대가 알아챘을 텐데도 제지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방 안에는 공주 외에도 시녀 네 명이 있었으나 파티가 밤늦게까지 진행돼서 다들 피곤했는지 곤히 자고 있었다.
“고산국왕! 어째서 나를 그냥 보내주려는 거야?”
“이런 짓을 떳떳이 하는 걸 보니 정의감에 불타는 총독의 손자쯤 되겠지. 잡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피차 낯붉히느니 그냥 모른 척하는 게 낫지. 대신 다시는 오지 마라.”
“손자 아냐! 그리고 넌 목소리를 간단히 바꾸는 방법도 몰라?”
“손자 아니면 아들?”
괴한이 괜히 삐쳐서 창문을 넘어 나갔다.
“잘 보내셨어요, 주인님.”
“놀래라! 침대 밑에 있었어?”
수원에서 같이 살았던 여진족 처녀들 중 호위대원으로 일하는 민자가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민희와 민영 외에 다른 여자애들에게도 민숙, 민정, 민혜, 민지, 민선 등등 이름을 내려주었다. 민으로 시작하는 웬만한 여자 이름을 다 쓰고 나니 남는 것은 민자밖에 없었다.
“창밖에 호위대원이 항상 몇 명씩 있어요. 괴한의 신원은 이미 파악됐었고, 창문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제지하려다가 주인님이 깬 것을 알고 내버려뒀어요. 위험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판단했거든요.”
“그 동안 민망하게 침대에서 나는 소리를 다 들었겠네?”
“자주 들으니 상관없어요.”
어둠 속에서도 민자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다.
“저놈, 총독 아들이지? 그런데 총독 아들은 반란 진압하러 갔다고 하지 않았나?”
“총독의 손녀예요.”
“여자였어? 아하! 도구를 써서 목소리를 변조했구나. 알았다. 그럼 계속 근무해라.”
“예. 저희들 믿고 편히 주무세요.”
도둑질하러 방에 들어온 여도둑을 잡아서 어쩌고저쩌고 할 수도 있었는데 여자인 줄 몰라서 그냥 보내고 말았다. 총독의 손녀라니 어쩐지 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다스마리냐스 총독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민호는 주상아와 함께 앉았고, 반대편에 총독과 중년의 며느리, 그리고 손녀가 앉았다. 식사 자리라서 정치 이야기를 배제하고 가벼운 이야기만 나눴다.
40대 여인인 총독의 며느리는 기품이 넘쳐흘렀고, 통역 없이 주상아와 중국어로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 시대 이 지역에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강해 중국어가 국제어 비슷한 역할을 맡았다.
총독의 손녀가 이민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홱 돌렸다. 만찬장에서는 화장을 진하게 해서 몰랐고, 방에서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아침에 밝은 곳에서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을 보니 꽤나 미인이었다.
“국왕전하께서 혹시 제 손녀가 마음에 드십니까? 자주 눈이 마주치시는 것 같군요. 비올레타! 국왕전하 부처를 위해 안내해드리지 않겠니?”
“제가 왜요!”
총독의 손녀가 총독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조용히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 앞에서는 착한 아이에 불과했다.
“비올레타!”
“네. 어머니.”
이민호는 공주와 함께 총독 손녀의 안내를 받아 선착장으로 나왔다. 주변 다른 상선들에 비해 거대한 크기의 갈레온 몇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갈레온은 지금 기준으로는 마닐라에서 만드는 것이 가장 커요. 한 번의 수송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고 항해 기간이 기니까 크게 만들 수밖에 없어요. 3척 또는 그 이상의 배가 선단을 이뤄 멕시코 아카풀코를 왕복하고 있어요. 지금도 마닐라에 서너 척, 아카풀코에 서너 척이 항상 배치돼 있어요.”
태평양을 갈레온 한 척이 왕복한다고 이민호가 잘못 알고 있었다. 가장 큰 이익이 나는 무역 거래였지만 에스파냐의 국부가 전부 이 무역에 집중되는 바람에 다른 상인들에게서 불만이 많이 쏟아지고, 자본투자를 줄이라고 국왕에게 요구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이유가 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세빌리아, 즉 세비야의 상인들이 이익이 많이 남는 이 무역의 독점권을 보호해달라고 필리페 2세에게 청원했다. 유럽으로 수입되는 상품의 수량을 줄임으로써 더 큰 이익을 내겠다는 심보였다.
그래서 실제 역사에서는 1593년부터 상선으로 사용될 상선 한 척씩이 마닐라와 아카풀코에 배치됐고, 예비선 한 척씩이 두 항구에 보관됐다. 그리고 호위함으로 몇 척이 추가됐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적선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선단을 운영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상품을 실은 배는 단 한 척으로 줄이게 되었다.
그러나 고산국이 생기고 이민호가 여러 가지 물건을 판매하면서 갈레온 한 척만으로는 적재량에 한계가 생겼다. 그래서 갈레온 한 척으로 무역량을 줄이려던 계획은 시행도 해보기 전에 취소되었다. 에스파냐 입장에서는 상품을 유럽 각국에 되팔아 더 많은 이익을 보고 있으니 잘 된 셈이었다.
“마닐라에서 출발하는 갈레온의 항로는 단순해요. 도자기와 비단, 향료와 차 등 고급상품을 가득 실은 갈레온은 봄에 남풍을 타고 북위 38도까지 올라가요. 일본 남단을 지나서 더 올라가는 위치에요. 그리고 북태평양 해류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한 다음 북미대륙에 도착해서 잠시 배를 수리하는 시간을 가져요. 그 다음 남쪽으로 가서 아카풀코에 도착해요. 아카풀코에서 출발하는 배는 적도 가까이 붙어서 적도해류를 타고 마닐라까지 항해해요.”
“아름다운 아가씨가 설명을 잘하시는군요. 국왕전하께 아가씨의 고운 마음씨에 대한 말씀을 들었어요. 저도 식민지 빈민들을 돕는다는 아가씨의 일을 도와드리고 싶군요.”
주상아가 총독 손녀를 칭찬하더니 시녀에게 지시해 금괴를 가져오게 했다. 이틀 전에 바기오의 금광에서 캐서 제련한 금괴들 중에 하나였다. 금 200냥에 해당하는 무게였으니 은으로 최소 천 냥은 넘었다.
“얼마 안 되지만 이것을 가난한 필리핀 원주민들을 위해 써주세요.”
“어쩜! 고마워요, 공주님! 하지만 드레스에는 이 무거운 황금을 숨길 곳이 없네요. 할아버지가 이것을 보시면 은행에 맡기라고 하실 거여요.”
금괴가 7kg이 넘는 무게라 비단 옷소매에 숨겼다간 찢어질 게 빤했다. 비올레타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이민호의 눈이 비올레타의 가슴이 팬 지점을 향했다. 총독의 며느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딸에게 가슴이 많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혀 내보낸 탓이었다.
이민호로부터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비올레타가 발끈했으나 따로 숨길 곳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가슴골 사이에 금괴를 숨겼다. 에스파냐 처녀의 가슴이 워낙 커서 그 커다란 금괴가 사라져 안 보이게 되었다. 이민호가 대놓고 가슴을 쳐다보면서 웃자 비올레타가 주상아 공주 뒤에 숨으며 가슴을 가렸다.
“공주님! 국왕전하는 너무 장난꾸러기 같아요.”
“저도 알아요, 아가씨. 그래도 국왕전하는 착하고 좋은 분이십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들에게 잘해주시고 신경 써 주십니다. 하지만 적에게는 사신처럼 무서운 분이랍니다.”
이민호는 느닷없는 칭찬에 낯 뜨거워서 공주와 거리를 두고 걸었다. 주상아 공주와 총독의 손녀가 마치 자매처럼 친해져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이민호는 총독 손녀와 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닐라에 올 일이 거의 없는 탓이었다.
“고산국 국왕전하!”
“무슨 일이오?”
젊은 하급 귀족 한 사람이 이민호에게 알현을 청했다. 이민호는 간단히 수락했으나, 귀족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전에 오크남이라는 고산국 귀족이 마닐라의 사교계를 휘저은 적이 있었습니다. 귀족 처녀들이 그놈에게 반해 쫓아다녔지요. 그런 불미스런 일로 인해 약혼녀와 헤어진 남자들도 있었습니다. 분노한 젊은 귀족들이 결투를 신청했으나 그놈은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오크남 그놈은 아주 나쁜 놈이구려.”
“국왕전하께서도 결투 신청을 받지 않으시려면 오해를 사지 않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비올레타는 마닐라의 꽃으로 불리는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아가씨입니다.”
질투에 사로잡힌 귀족 청년이 분노를 억누르며 이민호에게 고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총독이나 고위 관리들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실무자라 할 수 있을 하급 귀족들과도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편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민호 입장에서는 딱히 비올레타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뭐, 걱정 마시오. 내게는 이미 여자가 많소. 총독도 아는 사실인데 설마 귀한 손녀를 나 같은 유부남에게 버리듯 하겠소?”
“오크남 그놈도 유부남이었단 말입니다!”
귀족 청년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호위병들이 이민호 주변을 에워쌌다. 그러나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귀족 청년은 호위병들이 노려보아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청년이 질투한다고 생각했고, 괜히 여기서 문제를 일으킬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오늘 떠날 계획이었소. 떠나고 나면 불만이 없겠지요?”
“그렇습니까? 국왕전하!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제가 성급히 판단해 황송한 말씀을 드린 것을 사과드리옵니다.”
에스파냐 젊은 귀족이 마치 중국인이나 일본인처럼 바닥에 엎드려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이민호는 더 이상 문제가 생기기 전에 마닐라를 떠나기로 했다.
마침 해병들과 수병들이 교대로 인트라무로스 내부 관광을 마치고 승선을 완료한 시점이었다. 병사들은 마닐라에서 산 기념품과 가족에게 줄 선물을 싸들고 다들 즐거워했다.
마카오처럼 마닐라 방문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우방국을 방문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 작품 후기 ============================
3회 연재 숙제 끝!
순행 편을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