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2 27. 순행 =========================================================================
에스파냐가 마닐라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총독 개인적으로는 몰루쿠제도를 장악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스파냐가 지난 1582년과 1584년에 향료제도로 보낸 탐험대는 실패했다. 이번 해에 반드시 성공하기 위해 총독의 주도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총독은 이 모든 준비를 목적지를 밝히지 않은 채 진행했다. 그래서 다른 에스파냐 사람들은 총독이 술루 술탄국을 치거나 민다나오 섬을 정복할 준비를 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암본에서 나는 정향(丁香)과 반다 섬, 테르나테 섬에서 생산되는 육두구(肉荳蔲) 같은 인기 있는 향신료는 향료제도의 몇몇 섬에서만 독점 생산되고 있었다. 그래서 몰루쿠제도는 이 당시 항해능력을 가진 모든 나라가 노리는 황금의 섬이었다. 테르나테 섬의 술탄과 2km 남쪽 티도레 섬의 술탄은 오랜 경쟁 관계라서 그 갈등을 이용해 서양 세력이 침투할 만한 기회를 자주 주었다.
포르투갈 탐험대는 테르나테 섬에 요새까지 지었지만 현지 세력을 무시했다가 1575년 테르나테 술탄에 의해 쫓겨났다. 그러나 무역이 막힌 것은 아니었고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을 계속하면서 호시탐탐 테르나테와 티도레 섬을 노리고 있었다.
에스파냐는 테르나테를 정복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고, 저 멀리 오스만투르크도 이 향료제도를 노렸다. 영국과 네덜란드도 소문을 듣고 향료제도로 가는 항로를 조사하고 다녔다.
지난 천 년 가까이 아랍과 인도 상인들이 독점하던 향신료 무역의 이익을 서양 세력이 탈취하려는 것이 초기 대항해시대가 열린 동력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비단이었고,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출판한 시기 이후 실크로드가 막히자 상인과 모험가들이 해로로 몰려들었다.
“국왕전하! 일본의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자가 수시로 사신을 마닐라에 보내고 있습니다. 순순히 일본에 복종하고 조공을 바치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식으로 저희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만약 거부하면 군선 천여 척과 80만 대군을 마닐라에 보낼 거라고 합니다.”
“하하! 미친놈이군요. 올 테면 오라고 하세요.”
이민호가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조선은 물론 명나라와 인도까지 점령하겠다던 도요토미의 허세가 멀리 필리핀에서도 작렬하고 있었다.
총독은 1593년 에스파냐 국왕에게 보내는 문서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마닐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친서를 통해 에스파냐는 당장 일본의 강함을 인정하고 복종하라며 아주 무례하고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습니다.’라고 썼다.
“일본이 조선에서 전쟁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일본이 조선과 전쟁 중이니 그 사이에 마닐라를 공격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조만간 일본이 패할 테니 그 이후에는 더더욱 공격 기회가 없습니다. 봄이 오면 저도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갈 예정입니다. 전쟁은 곧 끝날 것입니다.
“오늘 고산국 전선들이 해전을 하는 방식을 보니 어째서 일본이 바다에서 매번 패하는지 알겠더군요. 가끔 선교사를 통해 편지를 받아봤는데 바다에서의 승부가 하도 일방적이라 일본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당시 일본관구장 코메스를 비롯해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활발히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특히 세스페데스는 왜군을 따라 조선의 웅천 지역에도 갔었기 때문에 총독은 일본과 조선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은 영국과 똑같은 해적들입니다. 침략과 약탈은 그들의 본성입니다. 힘으로 억누를 수밖에요.”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후환이 없도록 다 죽여 버리면 더 좋겠지요.”
이민호가 일본에 가진 것과 비슷하게 총독이 영국에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영국 해적들에게 시달리는 에스파냐 입장에서는 당연할지도 몰랐다.
“부총독 돈 후안에게서 팔라완을 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총독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술루 해적과 명나라 해적들이 몇 년째 계속 마닐라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국왕전하께서 명나라 해적을 보이는 대로 잡아주신 덕에 지금은 술루 해적이 더 큰 적이 되었습니다.”
팽호도 해적을 섬멸한 다음 이민호가 해적 퇴치를 위해 노력한 적은 없었다. 다만 해적질을 하지 않아도 바닷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무역을 개방했을 뿐이다. 그 이후 명나라 출신 해적들은 명나라 연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필리핀이나 시암 등 동남아에서는 명나라 해적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다녔다.
“해적은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지난 번에 멕시코 부왕께 지원을 요청했으니 7월쯤에 병력이 도착할 것입니다. 그때 함께 팔라완과 술루 술탄국을 공격하는 것이 어떨지요? 그리고 그 사이에 브루나이 술탄과도 협의를 해서 협조를 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저도 조선에 가야 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병력을 동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제가 여름에 다시 오지요.”
“국왕전하 덕택에 든든합니다. 이번에야말로 마음 놓고 해적을 토벌할 수 있겠습니다.”
에스파냐 입장에서는 술루 술탄국의 힘을 꺾어놓아야 향료제도로 가는 길이 열린다. 원래 총독은 술루 술탄국도 민다나오도 아닌 향료제도로 바로 가려고 했었다. 중간에 해적들이 공격하더라도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었다. 해적들을 토벌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함대를 몰고 온다면 동남아시아에서 적대적인 모든 해상세력을 꺾고 향료제도로 이어지는 수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총독은 판단했다.
이 시기에 임진왜란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계사 연표에 등장하지 않지만 세계 전역에서 전쟁과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593년 초에 버마와 시암 사이에 전쟁이 있다는 사실을 이민호는 전혀 몰랐으나, 미카의 보고서와 포르투갈 상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필리핀과 그 주변 지역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럼 술루 술탄국에 대한 정벌은 여름 이후에 하기로 하겠습니다. 계획에 변동이 생기면 언제든 고산국 궁전에 연락을 보내주십시오. 그럼 이번에는 영국과 네덜란드 해적선을 막는 문제에 대해 협의를 하지요.”
“그건 저희들이 절실히 바라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전에 갈레온 산타 아나 호가 영국 해적에게 나포된 일이 있었습니다. 내버려뒀다간 난파한 배보다 해적에게 털리는 배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1570년대의 프랜시스 드레이크에 이어 가장 최근에 에스파냐 보물선이 털린 사건은 1587년 11월에 발생했다. 영국 사략선장 ‘항해자’ 토마스 카벤디시가 이끄는 범선 2척이 600톤 급 마닐라 갈레온 산타 아나를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 인근 해상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교전한 후에 나포했다. 상품을 더 많이 싣기 위해 상갑판에 포를 탑재하지 못한 것이 영국 사략선 2척에 비해 두 배나 되는 인원이 타고 훨씬 큰 배였던 산타 아나의 패인이었다.
그 외에 카벤디시는 에스파냐 범선 8척을 격침시키거나 나포하고 남미의 태평양 연안 마을들을 공격했다. 카벤디시는 당시 가치 2백만 페소에 해당하는 보물과 상품을 싣고 영국으로 귀국했고, 이 전공으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
“에스파냐 왕국에서 마젤란 해협에 요새를 세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제가 자금 지원을 하겠습니다. 에스파냐에서 요새에 병력을 배치한다면 제가 남아메리카 대륙 남단에 전선을 한두 척 고정적으로 파견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저희도 그 생각을 해봤는데 많은 인원을 요새에 배치하는 것에 비해 효과가 크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젤란해협 말고도 섬 남단을 멀리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남미 남단에서 남극 대륙까지 수백 레구아의 넓이입니다. 군함 수십 척을 배치해도 빠져나갈 길이 있어서 비효율적인 대응이라고 생각합니다.”
“함선 수십 척을 몇 십 년 동안 배치해도 해적들을 못 막는다면 차라리 그 비용으로 영국을 정복하는 게 저렴하겠군요.”
“하하! 영국은 섬나라라서 정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민호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아프리카 남단은 해안선이 단순해서 지키기 쉬운 편인데 아메리카 대륙 남쪽에는 섬이 많아 해협이 몇 군데나 있고 대륙 남단을 크게 우회할 수도 있어 영국 해적의 침입을 막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국 해적들은 몇 척 단위로 함대를 조직해 태평양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만약 내버려뒀다간 언제 어디서든 기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지역에 전선을 배치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비용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만리장성의 모든 곳을 지키다가 망해가는 명나라와 같은 바보짓을 고산국이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요새를 세우는 것 말고도 영국 해적에게 대응할 방법은 많습니다. 만약 고산국이 향료제도에 욕심을 내지만 않는다면 필리핀 총독부는 그 어떤 사안에서든 고산국에 전적으로 협조할 용의가 있습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해적이 나타나면 즉시 고산국에 알려주시오. 내가 함대를 이끌고 추격하겠소. 그런데 총독이 향료제도에 그리 관심이 많은 걸 보니 역시 향신료 무역으로 인한 이익이 크군요. 얼마 전에 나도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었소. 어느 정도는 에스파냐와 경쟁해야 할 수 있을 것이오.”
“국왕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걱정됩니다.”
총독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고산국 입장에서도 지금 당장 에스파냐를 적으로 돌리면 손해가 막심할 것 같았다. 아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될 방향으로 가야 했다.
“후추와 계피를 비롯해 향료 종류는 많소. 그러니 고산국은 앞으로 향료제도에는 접근하지 않겠소. 하지만 총독은 정향과 육두구가 다른 지역에서도 생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오. 아시아에는 유럽인들이 접촉하지 않은 섬이 아직도 많소.”
“감사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희는 정향과 육두구에 대한 독점을 노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정향과 육두구를 키우기에 최적의 산지로 알려진 향료제도를 독점하고 싶은 것이지요.”
총독은 정향과 육두구의 독점무역이 아닌 향료제도를 독점하고 싶다고 했다. 이민호는 그 발언을 나중에 협정서를 조인할 때 반드시 문서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총독에게 미안하지만 정향과 육두구는 이미 류큐 상인들에 의해 빼돌려져 고산국 남쪽 산악지대와 해남도 서쪽 건조지대에서 자라고 있었다. 현재 정향나무는 타레나트와 티도레 등 5개 섬에서만 자란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재배가 가능했다.
이민호가 살펴보니 고산국의 남부 산간지방에서 자라는 정향나무는 무덥고 강수량이 적은 해에 더 많이 수확할 수 있었다. 1년 중에서 9월과 12월 두 번 수확했고, 말래카해협의 향료 상인들에 의해 좋은 품질로 인정받았다. 아직은 생산량이 적으나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자그마한 향료제도에서 나는 생산량보다 훨씬 많은 생산이 가능했다.
그러나 앞으로 가격이 폭락할 가능성에 대비해 출하량을 조절하기로 했다. 현재 향료제도에 접근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그리고 앞으로 올 영국과 네덜란드는 향료제도를 독점하기 위해 향료제도 인근 바다나 말래카해협에서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울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민호가 정향과 육두구를 팔 테니 의미 없는 피 흘림일 뿐이었다. 사실 이민호는 향료무역이 길게 가지 않을 것으로 봤다.
“혹시 국왕전하께서는 고산국의 군함이나 함포를 판매하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파신다면 높은 값을 쳐드리겠습니다.”
“현재 고산국 군사들이 사용하는 무기를 판매할 생각은 없습니다.”
팔 생각도 없었지만, 만약 판다 해도 에스파냐가 전선과 함포를 운영할 능력도 없었다. 바이오디젤은 어찌 만들 것이며 무연화약은 어찌 제조할 것인가? 구매자에게 무연화약의 화학식을 가르쳐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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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은 거의 끝났습니다.
오늘 중에 하나 더 올릴 수 있도록 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