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01화 (150/1,000)

00201  27. 순행  =========================================================================

마닐라는 정말 좋은 항구였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항구라는 말이 있던데 이민호는 많은 항구를 돌아다니지 못해 판단을 미뤘다. 그러나 산토 토마스가 위치한 링가옌 만보다 훨씬 좋은 항구였다. 마닐라 만 전체가 잔잔한 호수 같았다.

전선 6척이 미끄러지듯이 선착장에 접근했다. 파시그 강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바다 쪽에도 대형 선박을 위한 선착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고산국 국왕전하! 마닐라에 어인 방문이시옵니까?”

“부총독 각하 아니십니까?”

“자주 본 사이이니 그냥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국왕전하!”

에스파냐 진영에서 에스파냐 특유의 투구를 쓴 자들 몇이 대표로 마중 나왔다. 고산국 궁궐에 자주 방문했던 마닐라 부총독 돈 후안 마르티네스 로페스 데 보르히아가 기함 앞에 도착했고, 아직 배에서 내리지 못한 이민호에게 소리를 질렀다.

“해적 격퇴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돈 후안! 지나가는 길에 인사차 들렀소. 그런데 저것들은 뭡니까?”

배가 가라앉는 사이 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건진 해적들은 뭍에 오르자마자 에스파냐 병사들에게 체포당했다. 포로로 잡힌 해적의 운명을 알면서도 헤엄을 치느라 힘이 빠진 자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순순히 밧줄에 묶였다.

“저놈들은 술루 해적입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악독한 모로족입니다.”

15세기 중반 이슬람 선교 탐험가 사이드 아부 바크르 아비린이 필리핀 민다나오 섬 남서쪽과 보르네오 섬 사이에 위치한 술루 제도에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모로족 대부분은 종교를 제외하곤 필리핀 사람들과 인종적 차이가 없었다.

에스파냐의 초청 없이 왔지만 이민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선착장에 내렸다. 민희와 민영을 필두로 호위대가 주변에 포진해 혹시 모를 해적의 습격에 대비했다.

원래 마닐라에는 에스파냐 사람이 아니면 총독에게 상륙 허가를 받고 배가 정박할 때도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하지만 이민호는 우방국의 국왕이라 따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총독이 안내하고 있으므로 통상적인 절차는 모조리 무시됐다.

의용공주 주상아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배에서 내렸다. 이민호에게는 대충 인사했던 부총독이 공주에게는 귀족의 격식을 차려 한쪽 무릎을 꿇고 정식으로 인사를 올려 환영했다.

“아아! 역시 공주님은 언제나 아름다우십니다.”

“감사합니다, 부총독 각하.”

주상아가 통역에게서 몇 마디 배운 스페인어로 인사하자 부총독이 감동했다. 그러나 주상아가 얼른 이민호의 팔짱을 끼자 부총독이 울상을 지었다.

“돈 후안! 술루 술탄국에서 멀리 이곳까지 노략질하러 옵니까?”

“이놈들이 요즘 자주 마닐라 만에 들어와서 상선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마닐라 남쪽 팔라완 섬도 슬루 해적 놈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거리가 가까운 편입니다. 총독께서 지시해서 갈레온과 갤리선을 준비해 토벌할 계획입니다만, 해적들이 워낙 많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 팔라완!”

이민호가 좋아서 감탄사를 내뱉었고, 그 이유를 부총독이 바로 알아챘다. 이민호가 은 수백만 냥을 손해 보면서 산토 토마스와 바기오를 원한 이유와 같았다. 축력으로 운행하느라 운항거리가 짧고 중간에 여물을 공급해줘야 하는 외륜선의 중간 기착지로 팔라완은 더 없이 적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기관을 만든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아 전선 외에는 외륜선이나 범선을 이용하고 있었다. 고산국 깃발만 달면 동남아의 해적들이 감히 침해하지 못하지만 겁 없는 해적들은 언제든 있기 마련이었다. 보르네오나 말래카해협을 왕복하는 외륜선이나 류큐왕국 범선들의 안전을 위해 이민호는 술루 해적을 소탕하기로 마음먹었다.

“뭘 그리 좋아하십니까? 아하! 해적들을 소탕하고 팔라완을 차지하시려고요? 그보다 팔라완은 형식상 브루나이 제국의 영토이니 제국으로부터 영지를 받는 게 어떻겠습니까?”

“앞으로 브루나이와도 친하게 지내야 하니 그것 참 좋은 제안입니다. 보답으로 팔라완에 에스파냐의 함선이 기항할 경우 최혜국으로 대우하겠소.”

두 사람은 팔라완을 점령하기도 전에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다.

부총독 돈 후안이 이민호 일행을 정식으로 초청해 인트라무로스로 안내했다. 에스파냐가 세우고 있는 성벽 도시인 인트라무로스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고, 1590년에 새로 온 총독에 의해 야자나무 통나무를 허물고 다시 돌로 쌓고 있었다.

1583년 마닐라 대화재 이후 필리핀 총독 산티아고 데 베라가 마닐라의 모든 건축물을 돌로 만들라고 명령했고, 인트라무로스 남서쪽에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구이아 요새를 지었다. 인트라무로스의 북서쪽 일부인 산티아고 요새는 1590년에 건축을 시작해 이제 거의 완공 단계를 앞두고 있었다.

“국왕전하께서는 영토가 아니라 항구에 관심이 많으시죠?”

“그렇지요. 상선의 안전만 보장되면 그 항구가 누구의 영토이든 상관 안 합니다. 에스파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희도 그런 편입니다만 관리할 수만 있다면 영토가 넓은 게 좋습니다. 하지만 술루 야만국이 남아있는 한 아무리 고산국이라도 팔라완을 유지하기가 벅찰, 아니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습니다.”

부총독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산국 군사들은 작은 성채 하나에만 제대로 의지할 수 있다면 대포와 총을 통해 얼마든지 적을 막아낼 능력을 갖고 있었다.

“역시 적은 군사로 팔라완 섬 전체를 지배하기는 어렵지요.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마닐라는 원래 브루나이의 영토였습니다만, 저희들이 밀어내고 브루나이 본토까지 한때 점령한 적도 있지요. 그러나 브루나이는 여전히 이 지역에서 강대국이고 무역왕국이라 요즘 다시 거래를 트고 있습니다. 만약 팔라완을 해적에게서 탈환한다면 브루나이 입장에서는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니, 세 나라가 함께 팔라완과 술루 야만국을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에스파냐는 마닐라를 공격하는 해적을 소탕하고, 브루나이는 팔라완 영토를 회복하고, 고산국은 항구를 얻는다. 아주 좋습니다.”

이민호는 속이 좀 쓰렸다. 인구만 좀 더 많았다면 팔라완을 영토로 두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브루나이와 가까워지려면 팔라완 영토를 브루나이에게 돌려주는 편이 나았다.

브루나이에는 석유가 난다. 좁은 지역에 유전이 집중되어 있고 대부분 해저유전인 다른 곳과 달리 지상 유전이 세리아 등 두 곳에나 있었다. 매장량도 동남아 3위에 이른다. 21세기에 브루나이 수출액 100억 달러 중에서 거의 전부가 석유라고 이민호는 알고 있었다.

이민호 일행은 다리를 이용해 연꽃이 자라는 해자를 건넜다. 화려한 문양이 조각된 거대한 성벽을 지나 아치형 석조 성문을 통해 들어갔다. 마닐라의 인트라무스에 입장하는 것이다.

이민호는 에스파냐 사람도 아니고 혼혈 메스티소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인트라무스에 입장하는데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트라무스에 거주하는 에스파냐 사람들이 몰려나와 이민호 일행을 환영했다.

주상아는 마카오에서 겪은 것이 있어서 이번에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미녀인 공주의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일행은 빨간 벽돌로 포장한 도로를 지나 총독 관저의 별관에 호위대와 함께 머물렀다. 분수대 주위에 잔디밭이 있고 그 주변에는 열대 과수나무와 화려한 꽃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정원이 너무 아름다워요!”

2층 건물의 테라스에 나간 주상아 공주가 탄성을 질렀다. 살풍경한 석조 요새 안에 이런 비경이 숨어 있을 줄 몰랐던 이민호도 살짝 놀랐다.

“정원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설마 그대만 하겠소?”

이민호가 느끼한 멘트를 날리자 공주가 이민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공주가 황궁에서 자랐을 때는 절대 상상도 못했을 신세계를 매번 경험하고 있었다.

마카오와 해남도의 삼아, 바기오에 이어서 마닐라에서도 공주는 서양식 2층 석조건물에서 머물렀다. 이민호가 봐도 주상아 공주가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에 잘 어울렸다.

유럽에도 합스부르크 가문 탓에 검은 머리 공주들이 많으니 유럽 어느 왕실의 무도회에 입장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걱턱 공주들보다 주상아가 훨씬 아름다웠다.

이민호는 만찬장에 도착해서 필리핀 총독을 처음 만났다. 그 사이 주상아 공주는 에스파냐의 귀족 부인, 귀족 처녀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통역이 정신없이 바쁘게 통역해주었다.

거대한 루비와 다이아몬드 못지않게 주상아의 미모가 귀족 여성들에게 칭송받았다. 얼마 전까지 해적이나 악랄한 상인들만 상대하면서 수십 년 동안 싸워왔던 에스파냐 사람들은 황인종을 아예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제국 명나라의 공주이며, 에스파냐에게는 동양에서 유일한 우방국인 고산국 국왕의 후궁이라 알려지자 동양인인 공주의 미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왕전하! 항상 호의에 감사드리고 있었으며 저도 조만간 고산국에 방문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공주님과 함께 마닐라를 방문해주시니 기쁘고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습니다.”

총독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70이 넘은 나이였다. 그는 1589년에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에 의해 그리스도교 기사단인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로 서임됐고, 연봉 1만 두캇을 받기로 하고 총독직을 받아들였다. 그는 1590년 3월 1일에 아카풀코를 떠나 사료에 따라 5월 또는 6월 1일에 마닐라에 도착해 총독 업무를 인수했다.

“마닐라는 무역하기 정말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몰려오니 이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침략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무섭습니다. 하하!”

“무역으로 살아가는 고산국이니 두 번째로 큰 고객인 에스파냐와 척을 질 이유가 없지요.”

“언젠가 명나라를 제치고 에스파냐가 고산국의 첫 번째 고객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길 저도 바랍니다.”

이민호와 다스마리냐스는 서로 간을 보고 있었다. 이민호 입장에서 포르투갈 같으면 인구가 적고 이익이 상충되지 않아 협력하기 좋은 상대였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당시 유럽의 강대국이며 중남미의 예를 들어 알 수 있듯이 식민지를 개척할 때 원주민들에 가혹하게 대했다. 에스파냐에게 틈을 보이면 언제든 먹힐 수 있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에스파냐와 협력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작은 나라인 포르투갈만으로는 고산국의 수출액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는 아메리카 대륙을 두고 에스파냐와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저는 전하께서 산토 토마스를 요구하셨을 때 혹시 20년 전에 링가옌 만에 자리 잡았던 명나라 해적 리마홍의 재림이 아닐까 의심했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주변 모든 해적들을 소탕하시고 오직 무역만으로 주변 나라들과 이익을 나누셨더군요.”

리마홍은 중국 이름 린펭(林風)으로서 1570년대의 해적이었다. 그는 광동성과 복건성 해안지방을 휩쓸고 동남아 각국은 물론 필리핀도 공격했던 전설적인 해적이었다. 마닐라가 불타오른 것도 리마홍이 습격했을 때였다. 산토 토마스 건너편 링가옌 만 해안 지역에는 리마홍과 명나라 해적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해적질은 바보나 하는 짓입니다.”

“옳습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해적 놈들도 국왕전하처럼 생각했으면 좋겠군요. 전하께서 이번에 마닐라를 공격하던 술루 해적들을 단 한 푼의 주저함도 없이 단번에 공격하시는 것을 보고 저희들은 국왕전하와 함께라면 언제라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총독은 연안 항해용 갤리선을 여러 척 만들고 아들 루이스 페리스 다스마리냐스에게 병력을 주어 마닐라 북서쪽 삼발레스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손 섬 북동쪽에도 병사들을 보내 탐험을 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전에 또 올리겠습니다.

주인공이 곧 조선으로 출정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