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00화 (149/1,000)

00200  27. 순행  =========================================================================

“예, 대인! 관병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중원과 달리 남방에 사는 한족들은 주변의 야만인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특히 도둑과 강도 같은 묘족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맞는 말씀이오.”

이민호가 노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묘족을 협력 부족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지만 한족 무술사부에게 그런 사실을 밝힐 이유가 없었다.

“해남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려족을 진압하기 위해 묘족이 마을 단위로 고용돼 이동했다는 소식을 예전에 듣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리 떼를 쫓아내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인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결정이었습니다. 역시나 제가 이곳에 와보니 도둑질하는 버릇을 못 고친 묘족이 한족 마을을 약탈하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힘이 없어 빼앗기기만 하던 한족 청년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습니다. 묘족을 남쪽 국경 너머로 쫓아낸 이후에야 남방이 안정될 것입니다.”

진 사부는 묘족에게 강한 증오심을 가진 것 같았다. 개인적 원한이 있든 말든 이민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수천 년 동안 한족에 의해 남쪽으로 밀린 묘족은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밀려날 공간이 없었다. 남쪽 국경 근처로 이주한 묘족들은 국경을 넘거나 반란을 일으켜야 할 정도로 막장에 몰렸다. 특히 해남도로 이주한 묘족들은 농사지을 땅이 없어 꿈도 희망도 없는 막판에 부족의 운명을 걸고 최후의 도박을 한 셈이었다.

“진 사부! 마을 청년들에 대한 무예 교육을 거의 마친 것 같소. 그렇다면 다음에는 주애공부의 군사들에게도 무예를 가르쳐주겠소?”

“죄송하지만 저는 향용과 가까워 관과는 그리 친하지 못합니다.”

“관병들이 한족 마을을 지켜줘야 하는데 지난 번 려족의 반란 때 워낙 약한 모습을 보인 탓에 묘족이 해남도로 이전해온 것 아닙니까? 관병들이 강해야 백성들이 피해를 적게 입습니다. 관병들을 강하게 키워주는 일에는 진 사부가 적격인 것 같아 이렇게 무예사부로 청하겠소.”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두 달만 가르치도록 하지요.”

“내 생각에는 진 사부가 주변 한족 마을 청년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관병들을 더 길게 가르쳐줬으면 좋겠소만. 진 사부에게도 계획이 있을 테니 알아서 하시오.”

그 사이에 옥남과 주원빈이 주먹을 쥐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잘 생긴 남자들이 서로 잘났다고 하는 꼴은 정말 못 봐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둘은 좋은 친구이며 시간만 나면 권법 대련을 한다고 했다.

“원빈이라 했지? 혹시 너는 권법을 배웠느냐?”

“예! 조부께 남권을 약간 배웠습니다. 건강을 위한 체조 같은 것입니다.”

“주먹에 박힌 못으로 봐서 그 이상일 테지. 혹시 유구국에 가서 권법을 가르칠 생각은 없느냐? 대우는 네 조부 못지않게 해주마.”

“제가 어리고 아직 덜 배웠는데 어찌 감히 남을 가르치겠습니까? 겨우 몇 달 배운 사제인 옥남에게도 대련에서 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 알았다. 조부께 많이 배워라.”

주애공부가 설치되면서 경주부는 해남도에서 없어졌고 수장인 지부도 조정으로 돌아갔다. 주애공 이민호는 대리인인 옥남에게 지부(知府) 관직을 내려주었다.

“고 지부!”

“예, 전하! 하명하시옵소서.”

“진 사부에게 임시로 정7품 지현의 관직을 주고 대우는 그 이상으로 하시오. 관병들의 무예스승이니 주애공부 소속의 모든 관병은 진 사부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알리시오.”

“예! 전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무예 스승으로 모시는 분입니다. 더욱 잘 대해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한족 청년들에게 무예를 가르쳤던 해남도의 무술도장들도 주애공부에서 지원을 해주었다. 주애공 대인이 한족을 특별 대우해준다고 한족들이 무척 기뻐했다. 그런데 이민호가 자기들만 특별 대우해준다고 착각한 것은 묘족이나 려족도 마찬가지였다.

주애공 이민호가 한족이나 묘족, 려족 중에서 특별히 한 종족만 편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공평하게 여러 가지 지원책을 강구했다. 특히 반란을 일으켰던 려족과, 반란을 진압하러 왔다가 더 큰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묘족을 시급히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명나라 조정의 요청으로 묘족이 해남도로 집단 이주한 만큼 이들에게 지원을 해줘야 문제가 생기지 않을 테니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한족이 있는 곳에서 묘족 지원책을 발설할 수 없어 주애공부로 돌아와서 옥남에게 지시했다.

“묘족이 조정에 고용됐다지만 그 동안 제대로 녹봉을 내린 것 같지도 않아. 겨우 정착지만 지정해준 정도에 그쳤어. 묘족들이 제대로 먹고 살기 힘드니 자꾸 한족들하고 분란이 일어나는 거야.”

“하지만 나눠줄 농지가 이미 바닥이 났습니다. 려족이 개간하고 있는 해안 황무지 몇 곳 말고는 땅이 없습니다.”

“곡식 농사만 농사는 아니지. 농사를 못 지을 언덕땅에 차밭을 대규모로 조성하도록 해. 명나라에 팔 것이 아니고 유럽인들에게 팔 만한 품종이 몇 개 있어.”

이민호는 고산국 고산지대에서 육성중인 차 품종 몇 가지를 지정했다. 그 동안 남방에서 구해서 길러온 향신료 종자도 몇 가지 골랐다. 해남도는 기후가 워낙 좋아 차 농사든 곡식농사든 최고의 지역이었다.

“쌀을 일 년에 세 번이나 수확하면서도 식량이 부족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와서 직접 보니 알겠더군. 농지 이용도를 보면 정말 비효율의 극치야.”

대규모 인력을 투입해 농지 정리를 하라고 옥남에게 시켰다. 말이 농사지 지금까지 거의 약탈 농업 수준으로 지력을 고갈시킨 땅에 비료를 뿌리도록 했다. 그리고 남는 땅에는 바이오 디젤 연료의 원료로 사용할 사탕수수를 재배하도록 지시했다. 무역항으로 개발된 삼아항이지만 고산국에서 말래카해협으로 향하는 상선이나 전선의 중간 기착지 역할도 수행할 예정이었다.

“전하! 묘족을 고산국으로 유인하지 않으실 겁니까? 괜히 이것저것 지원해주면 묘족들이 아예 해남도에 눌러 살까 겁납니다.”

“이들은 모델, 아니 모범이랄까? 내 밑에서 살면 무지막지하게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서 다른 묘족 부족들을 고산국으로 유인하려고 해. 목표는 묘족 여인들이 무거워서 더 이상 은 장신구를 옷에 못 달 정도다.”

“그것도 좋겠습니다. 요즘 광서성이나 광동성 분위기를 보니까 묘족이든 장족이든 한바탕 반란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반란이 일어나서 가만 놔둬도 고산국으로 가겠다는 부족이 많아질 겁니다.”

원주민이나 소수민족 1세대는 교육을 거의 못 받아 고산국에 오더라도 활용도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농민이나 군인 정도로는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고, 모든 분야에서 인력이 부족한 고산국은 농민이나 군인도 얼마든지 환영해야 할 입장이었다.

“조선에서 전쟁이 길어질수록 재정 부담이 커진 명나라가 세금을 더 걷게 되고, 살기 어려워진 소수민족들이 살 길을 찾아 이동할 것이다. 우리에게 큰 기회가 된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조선에서의 전쟁을 짧게 끝내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조선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지만 실제로 죽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전쟁을 조금 더 끌어도 될 것 같습니다.”

“나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피난민들이 고생하는 꼴을 보니까 양심에 꺼려서 더 이상 오래 못 끌겠더라.”

조선인들의 이민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가끔 조선으로 돌아가는 자들도 있었지만 금방 고산국으로 돌아오곤 했다.

해남도에 대한 순행을 마친 이민호는 이번에는 필리핀으로 향했다. 이틀 동안의 항해를 마치고 도착한 산토 토마스는 어느덧 번듯한 항구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명나라 임금노동자들이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새로 진수한 전선들의 시험 항해를 겸해 류큐왕국에 갔다 온 계복이 전선 세 척을 이끌고 산토 토마스에 머물고 있었다. 단정을 타고 온 계복이 기함에 오르며 이민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고원지대라서 정말 시원합니다. 겨울 맛이 납니다. 여름 휴양지로 기가 막히겠습니다.”

계복이 권한 대로 긴팔 옷을 입고 배에서 내렸다. 항구에서 마차를 타고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루손 섬 북부 바기오 지역은 한창 개발 중이었다.

거주 지역 건설을 마치고 상가 거리를 조성하면서 금광도 개발 중이었다. 이민호가 도착한 날은 마침 금광에서 캐낸 광석을 제련해 첫 금괴를 만들어낸 날이었다. 이민호는 운도 좋았다.

이민호는 몇 가지 지시를 마친 다음 하룻밤만 묵고 금방 떠났다. 바쁘게 공사하는 중에 괜히 높은 사람이 오래 눌러 앉아 있으면 아랫사람들이 일하기 불편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금괴는 챙겼다.

여섯 척으로 불어난 전선들이 마닐라를 향해 남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마닐라에 자주 기항하는 배들은 물론 류큐왕국 상선들이 위도와 경도를 측정하고 해도를 자세히 만들어놓아 안전하고 편안한 항해가 되었다. 코레히도 섬을 지나 마닐라 만에 막 들어선 순간에 망루에 오른 무상이 소리를 질렀다.

“마닐라 항에서 교전 중입니다! 해적입니다!”

무상이 보고하자 이민호가 갑판으로 나왔다.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희뿌연 연기가 마닐라 항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민호가 망원경을 조절해 마닐라 항을 살폈다. 항구 쪽에서는 에스파냐인들이 대포를 쏘고 바다에서는 해적들이 화승총을 쏘고 있었다.

“명나라 해적인가?”

“좀 다릅니다.”

중국인 거주구역이 조용한 것으로 봐서 해적은 명나라 국적이 아닌 것 같았다. 항구에 정박한 명나라 상선에서도 선원들이 해적선을 향해 대포를 쏘고 있었다. 에스파냐와 명나라 사람들이 같은 편에 서서 싸우는 신기한 장면을 구경하게 되었다.

해적이 입은 복장으로 구별할 수는 없겠지만 피부색으로 봐서 남방 말레이계로 추정됐다. 터번을 썼다면 비사야 제도의 해적이 아닌 술루왕국의 해적이 분명할 텐데 아직 거리가 멀어 구분할 수 없었다.

“전투 준비!”

“전투준비 완료됐습니다, 전하.”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돌아보니 해병들은 물론 포병까지 배치돼 해적선을 조준하고 있었다. 3인치 함포의 최대 사거리 안에는 들어가지만 파도 위에서는 명중률을 보장할 수 없었다.

“증속! 해적선들의 배후를 잡아라.”

전선 여섯 척이 엔진 4기를 모두 가동해 속도를 높였다. 해적선 열두 척의 실루엣이 점점 확실해졌다. 해적선에서도 고산국 전선들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해적들이 이쪽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해적 몇 명이 전선을 향해 화승총을 겨눴다. 그러나 해적들이 총을 쏠 기회는 없었다. 거리 1km 정도에서 이민호가 발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쏴!”

- 쿵! 쿵!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포탄이 날아갔다. 기함에서 발사한 첫 포탄은 해적선 바로 옆에서 터지며 해적선의 돛대 높이만큼 물기둥이 높이 치솟았다.

두 번째 포탄은 해적선에 치명적이었다. 우현을 뚫고 들어간 포탄이 터지며 내부 화약창고를 발화시켰는지 거대한 화염이 해적선을 휘감았다. 다른 해적선 두 척도 선체 중앙에서 발생한 강력한 폭발로 인해 둘로 쪼개져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첫 번째 일제 포격에 해적선 열두 척 중에서 세 척이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아직 살아남은 다른 배들도 포격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특히 서양 범선을 흉내 내 높이 세워진 선미루에 총병을 가득 세워두고 싸우던 해적선은 선미루에 포탄을 두 발이나 맞아 초토화가 되었다. 선미루에 살아남은 자가 없고 붉은 피가 선체를 타고 줄줄 흘러 내렸다.

“계속 쏴! 다 가라앉혀!”

해적선 따위에게서 전리품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전선 여섯 척에 탑재된 함포 24문이 연속 불을 뿜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해적선 12척이 가라앉았고, 압도적인 화력을 목도한 에스파냐와 명나라 상인들은 기가 질렸다.

해병들은 거의 총을 쏘지 못했다. 소총의 유효 사거리 이내로 해적선에 접근했을 때는 이미 다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살아보겠다고 필사적으로 헤엄을 치는 해적들을 쏘려던 해병들이 이내 흥미를 잃고 돌아섰다.

외륜선에 타고 왜선과 싸우던 때와 달리 전선에 함포 4문이 탑재된 다음부터는 해병이 해상 총격전을 벌일 일이 확 줄어들었다. 그러나 해병들은 상륙전에서 아주 유용한 병력이었으니 앞으로 해병을 줄일 일은 없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간신히...ㅡ.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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