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99화 (148/1,000)

00199  27. 순행  =========================================================================

“앗! 왜적이 나타났다. 총독은 즉시 벌거벗고 바다에 들어가서 왜적을 잡으시오. 이것은 군령이오!”

총독이 화들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바다에는 왜선은커녕 어선도 보이지 않았다. 총독이 이민호를 대놓고 비웃었다.

“하하! 왜적이라뇨. 깜짝 놀랐습니다. 주애공께서는 아직 젊은 분이신데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리고 주애공께서는 저를 지휘할 권한이 없지 않습니까?”

“내 허리에 찬 것은 상방검이라오. 내 직함이 무엇이오?”

“그야 흠차 제독 남북 수륙 관병 어왜총병관 이주도독부 좌도독 겸 주애공 아닙니까? 어? 남북? 지역 제한이 없다니, 이럴 수가!”

“이제야 심각성을 깨달았소?”

“하지만 무관이 비슷한 품계의 문관에게 지시하는 관례는 없습니다!”

“본직은 원래 무관이 아니지만 무관 직품을 받았으니 무관이라고 할 수도 있겠소. 그럼 새로운 관례를 만들어볼까요?”

상방검은 원래 황제 전용의 보검으로 황제가 대신 또는 장수에게 전권을 맡긴다는 상징으로서 하사하는 검이었다. 황제가 지정한 품계 이하의 장수나 관리 또는 군사와 백성들의 목을 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돼 있었다. 그러므로 상방검은 적과 싸우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내부 단속을 위한 권위를 나타냈다.

이민호가 상방검을 뽑았다. 화려한 검집에서 시퍼런 칼날이 스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뽑혀 나왔다.

“군령을 따르겠습니다!”

나이 40이 넘은 뚱뚱한 총독이 얼굴빛이 퍼렇게 변하더니 허겁지겁 관복을 벗었다. 두툼한 뱃살이 드러난 순간 이민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속옷은 벗지 마시오!”

“무조건 군령을 따르겠습니다. 제발 참수하지만 말아주십시오!”

총독이 속바지만 입은 채 바다로 뛰어들었다. 어이없는 광경을 보고 웃을 만하지만 관리들은 양광총독이 바보짓을 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아무도 웃지 못했다. 다만 얼굴이 뻣뻣이 굳을 뿐이었다.

“왜적 잡아라~ 어푸! 왜적은 내 주먹을 받아라!”

총독이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주먹을 휘둘렀다. 이민호는 바닷물에서 혼자 노는 양광총독을 내버려두고 관아로 다시 돌아왔다. 수많은 관리들이 조금 전과 달리 허리를 깊이 굽힌 채 이민호를 뒤따랐다.

이민호는 그들이 알던 외국 국왕, 또는 일개 부마도위, 또는 명예직에 불과한 주애공이 아니었다. 이민호에게는 해남도 내에서 관리들을 다스릴 일정한 권한이 있었고, 특히 왜군을 상대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어왜총병관으로서 지역적 제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만약 왜군이나 왜구가 명나라 본토를 침공해온다면 어느 지역에서건 병력을 징발해 군사를 운용할 권한이 있었다. 다시 말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핑계로 군사를 장기 동원하고 군량지원과 백성들의 부역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한 지역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릴 힘이 있었다.

잠시 후 이민호가 사환을 시켜 양광총독을 불렀다. 그 동안 파도와 싸운 총독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평생 이토록 격렬하게 육체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을 총독은 숨 쉬는 것도 버거워했다.

“왜군과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든 군령을 행사할 것이오.”

“노야! 혹시 노야가 맡으신 제독총병관의 임기를 알 수 있겠습니까?”

“임기 끝나면 총독이 나를 손보려고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임기 끝나실 때까지 잘 보필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하! 정말입니다.”

“황상께 받은 임기는 일본이 멸망할 때까지요.”

관리들은 놀라고, 총독은 낙담하는 표정이었다. 총독이 먼저 관직을 관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결심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총독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주애공부 소속 관리들과 양광의 모든 관리들은 들으시오!”

“예! 소 노야.”

“주애공 대인께서는 친왕 다음, 1품 이상인 공의 작위에 계시므로 모든 관리들은 잘 떠받들어 모시도록 하시오. 관리들은 포정과 안찰과 지휘 등을 막론하고 모든 문제를 주애공부에 와서 의논하도록 하고 정해진 세금과 요역이 공부에 제대로 납부되는지 항상 확인하도록 하시오.”

“예, 노야!”

전형적인 수하 군기잡기를 통해 해남부와 주변의 모든 관리들을 휘어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민호가 약간 무리해서 이 방법을 쓴 것은 장래에 광서성 지역에 거주하는 묘족 부족들과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것은 옥남이 추천해준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관직을 이용한 아랫사람 억누르기가 조선에서는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조선 국왕이 명나라에서 받는 대우가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선 태종에게 관복을 하사하면서 같이 보낸 조서에, 조선 국왕은 1품이며 중조(中朝)의 3품에 준한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명나라에 입조한 조선 왕세자에게는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명나라 상서들과 같은 위계인 2품에 자리하게 했다. 명 태조의 조서와 달리 그 이후 조선 국왕들에게 정해진 명나라 품계가 따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중국의 관제는 맨 위가 친왕이고 그 다음이 공후, 그리고 그 다음이 1품이다.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황제의 상징물 12개에서 3개를 뺀 구장복(九章服)을 보냈으므로 이는 친왕에 준하는 대우라고 조선에서 해석했다. 이민호가 명나라 공작의 작위를 갖고 있더라도 조선 국왕보다 반드시 높다고 할 수 없었고, 경우에 따라 조선 국왕이 친왕과 동급이니 이민호보다 더 높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물론 조선 국왕은 원병으로 참가한 명나라 장수들에게 동등한 황제의 신하로서 동급의 예를 청했다.

이로써 이민호, 또는 그 대리인인 옥남이 해남도를 다스릴 실질적인 권한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한족 관리들이 주애공부를 대놓고 무시할 경우 대책이 없었겠지만, 양광총독이 양보함으로써 주애공부가 설 자리를 찾았다. 이민호는 사실 이 날 지현이나 지주 한두 명쯤 처형할 각오를 하고 나왔다.

먼저 주애공부가 위치한 곳 옆 선착장 가까운 곳에 상관을 설치하고 커다란 창고 몇 동을 짓도록 지시했다. 작은 보루를 지어 관병들을 배치하고 3인치 함포 1문과 불랑기 화포 10문을 배치하도록 했했다. 3인치 함포는 옥남과 그를 따르는 자들만 조작법을 알았고, 만약에 대비해 포탄도 20발밖에 없었다.

그 다음부터 이민호가 3주 22현의 관리들을 닦달했다. 해남도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이 려족의 반란이었으니, 그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이민호는 려족과 한족의 토지 분계선을 명확히 하고 한족들이 더 이상 려족의 토지를 침탈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지시했다. 려족들이 앞으로도 지속될 정책인지 의심해 눈치를 살폈고, 한족들은 더 이상 농지를 늘릴 수 없게 됐지만 그 대신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

그리고 해안 평지의 황무지 몇 곳을 개간해 그 동안 농지를 잃고 산지로 밀려난 려족들에게 분배하도록 지시했다. 개간에 소요되는 자금은 주애공부에서 나왔고, 려족을 설득해 직접 개간을 하도록 했다. 넓은 해안선을 따라 천일염전을 운영해 싼값에 해남도 주민들에게 공급하기로 했다.

이민호가 나중에 들어 보니 려족 원주민들이 노동을 하는 동안 주애공부에서 일당을 지급하고 식량도 배급해서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산지에 사는 다른 려족과 묘족 마을에도 식량이 부족할 경우 무상 지원했다. 안남에서 쌀을 실은 배가 삼아에 자주 들어왔다.

어민들에게 산호와 해삼 생산을 장려하고 관리들이 함부로 북경으로 가는 공물의 양을 늘려 중간에서 착복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게 했다. 진주조개와 굴 양식장을 해변 여러 곳에 설치하고 옥남의 관리 하에 종패 생산장을 따로 만들어 어민들에게 배급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산 깊숙한 곳에 있는 수정광산의 생산을 독려했다. 먼저 광산까지 연결되는 도로를 마차가 다닐 정도로 넓게 확장하고 광부들의 임시 주거를 개선하는데 자금을 풀었다. 광부들에게 일당도 올려주고 의원을 배치해 병마에 시달리지 않도록 지원했다.

황실에 진상품으로 올리는 나비공예화와 야자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에 대한 지원도 강화했다. 그리고 이 제품을 광저우에 판매하고 외국에도 수출할 길을 모색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상관 옆에 ‘해남도 특산품 전시관’을 만들게 했다. 해남도의 예전 이름인 경주부(瓊州府)보다는 해남도라는 말을 공식 지명으로 정했다. 진열할 상품이 꽤 많았고, 건물이 완성되기 전에 임시로 진열해보니 화려해서 보기에 좋았다. 특히 진주와 수정, 나비공예화와 야자공예품이 함께 있으니 전시관 전체가 무척 화려해질 것 같았다. 이민호는 전시관을 고산국 아리수 항의 상관 옆에도 설치하라고 고산국에 남아있는 혜영에게 편지를 보내 지시했다.

며칠 만에 해남도에서의 일을 모두 마친 이민호는 오후에 옥남을 따라 나섰다. 순전히 궁금증과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였다.

“여기가 해남검파야?”

“해남검파 아니라니까요!”

“어쭈? 옥남이 너 나한테 성질내는 거야?”

“싫은 소리 듣기 싫으시면 제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무림이란 세계는 없습니다!”

“쳇!”

이민호가 옥남에게 뭐라고 한 소리 하려다가 노인이 노려보자 참고 말았다. 주애공부와 가까운 한족 마을의 공터에서 대와 오를 맞춘 마을 청년들이 같은 동작으로 만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무술사부인 노인이 매서운 눈으로 제자들의 동작을 하나씩 살피고 있었다.

마을 청년들은 중원보다는 훨씬 가볍게 옷을 입었다. 중원에서 보기에는 복장이나 무기가 모두 야만족의 것이고, 명나라의 소수민족이 볼 때는 쓸데없이 거치적거리는 옷을 입고 통일된 무기로 무장한 멍청한 한족이었다.

“참!”

왼손을 뻗어 적의 상투를 틀어잡고 오른손에 쥔 만도로 적의 목을 베는 동작을 마지막으로 청년들이 무기를 거뒀다. 진짜 싸움터에서나 볼 만한 실전적인 동작이었다.

“잘했다. 그 동안 많이 늘었다. 이제 너희들의 원수 려족과 신뢰 못할 도둑놈들 묘족을 상대로 싸울 때 한 명의 병사로서 제 몫을 할 만큼은 수련했다. 그러나 공부는 끝이 없는 법, 평소에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무예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 사부!”

“됐다. 내일은 모든 수련자들이 대련을 함으로써 자기 실력을 평가할 기회를 갖도록 하겠다. 이만 해산하도록.”

“감사합니다, 사부!”

마을 청년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무예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와 청년들의 행동에 자연스럽게 절도가 배도록 만들었다.

옥남이 이민호를 안내해 사부에게 소개시켰다. 무술 사부는 무슨 자존심이 그리 센지 높은 관원이 옆에 있는데도 절대로 먼저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이민호는 한 소리 해주려다가 상대가 노인이라 참고 말았다.

“진 사부! 이 분은 주애공이십니다.”

“광저우 향용의 일개 무술사부가 주애공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반갑소.”

향용(鄕勇)이라면 중국의 전통적인 향토 민병 조직이었다. 농민의 무장 조직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정 반대로 신사층이 조직한 무력 단체로서 농민 반란군을 진압하는 관군 쪽에 서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삼국지의 유명 인물들이 농민 반란군 지도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진압하는 무력 단체 지도자로서 처음 이름을 알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듯이 중국에서 이런 식으로 향촌에 거주하는 지주층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민간 군사조직의 유래는 오래 되었다. 민간에서 무예를 수련하는 이들 다수가 이런 무력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빈아야! 너도 노야께 인사 올려라.”

“예, 할아버지! 주애공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향시를 준비하는 진원빈입니다!”

씩씩하고 아주 잘 생긴 청년이 향시 준비하는 서생이라고 소개하면서도 정작 이민호에게는 포권을 취했다. 이민호도 얼떨떨하게 포권으로 답례했다. 무협지에서 본 것과 약간 달리, 왼쪽 손바닥을 펴고 오른쪽 주먹으로 치는 인사 형식이었다.

이름이 원빈이라서 그런지 청년은 잘 생긴 것 같았다. 옥남과 원빈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남자들 주제에 쓸데없이 미모 배틀을 벌이는 것 같아 짜증 난 이민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 사부는 한족 마을을 돌아다니며 청년들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있다고 들었소. 광저우에서는 고명하신 분 같은데 힘들게 해남도까지 와서 무술을 가르치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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