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3 27. 순행 =========================================================================
새해가 되어 이 날부터 계사년, 1593년이 되었다. 명나라 연호로 만력 21년, 조선은 선조 26년이었다.
이민호는 아침부터 평소 착용하던 곤룡포와 익선관이 아닌 면복을 입고 면류관을 쓴 채 대전의 옥좌에 앉았다. 이민호가 입은 면복은 대례복으로서 황제를 상징하는 12개 문양 중에서 해와 달, 별이 빠진 구장복이었다.
새해를 맞아 내명부의 신분과 서열 순으로 인사를 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혜영과 주상아를 비롯해 귀인 등 정식 직첩을 받은 후궁들이 먼저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네이도 오랜만에 궁궐에 와서 미카 다음 순서로 인사를 했다. 회족 아이샤와 시녀들, 백인 궁녀들, 나중에는 여진족 꼬마들까지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이누족 꼬마들도 빠지지 않고 절을 했다.
그때마다 이민호는 수시로 일어나 맞절을 해야 했다. 어찌 됐던 이들은 모두 이민호의 노예가 아닌 배우자였기 때문이다. 백인 궁녀들이 전부 후궁 신분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궁궐 숙수로 고용되어 백인 궁녀들에게 잔심부름을 시켰던 명나라 사람들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절을 너무 많이 했더니 허리가 아프다. 후궁이 좀 많구나.”
“좀이 아니라 너무 많은 거여요.”
평소 질투를 거의 하지 않던 민희와 민영까지 투덜거렸다. 둘은 호위대장을 겸하고 있었기에 새해 인사에 참가하지 않고 황금빛 예복 차림으로 이민호 양옆에 서 있었다.
이 행사를 위해 비단 수백 필과 금 수천 냥, 진주 몇 상자가 내탕고에서 빠져 나갔다. 그것들을 후궁들이 몸에 두르고 나타났으니 이민호는 속이 좀 쓰렸다. 그러나 평소에 바빠서 선물을 거의 안 했으니 명절 때 한꺼번에 선물해준 셈 쳤다. 미녀들은 유지비가 많이 드는 편이었다.
옥좌 옆에 놓인 왕비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혜영이나 주상아처럼 이미 귀인 직첩을 받은 이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여진족 꼬마 신부들이 서로 자기 자리가 될 거라고 떠들어댔다. 민희와 민영이 웃음을 참느라 입가를 씰룩거리는 것을 보면서도 이민호는 뭐라 말을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이어서 정식 조회가 시작됐다. 이민호는 옥좌에 앉아 종5품 이상 조정 관료들에게서 인사를 받았다. 이민호는 관료들에게 반절을 하면서 모르던 사람들과 낯을 익혔다.
관료들 중에 차관급인 참의까지만 이민호가 직접 임명했다. 그 이하는 영의정과 비슷한 직책인 통령 혜영과 6국의 장관들인 참판이 이국(吏局)의 평가에 따라 임면권을 행사했다. 물론 미카가 운영하는 정보사 직원들이 뒷조사를 하고 호위대에서 충성도를 평가한 다음에 결정할 수 있었다.
“국왕전하 만수무강하소서.”
“고맙소. 참의께서도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시오.”
이민호와 관료들이 인사하면서 서로 덕담을 나눴다. 그러나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금지됐다.
“전하! 올해는 꼭 참한 처녀 구해서 장가를 드십시오.”
“험! 험! 알겠소이다. 최 정랑도 새장가 가시오.”
“나라에 여자들이 너무 많이 남아돌아 문제이니 저라도 나서서 처녀 하나쯤 구제해줄까 합니다.”
“쿨럭! 좋은 생각이시오.”
공국정랑은 나이 40이 다 된 대장장이였고, 터보 샤프트 엔진을 개발할 때 이민호를 보좌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조선에서 그의 신분이 양인이었는지 천민이었는지 알 수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고산국 백성들 사이에는 신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분을 굳이 나누자면 왕족과 평민, 두 가지뿐이었다. 노예도 없고 귀족도 없었다. 조선인이라서 우대받는 것도 아니고 노예 출신이라 해서 차별받는 것도 아니었다.
“국왕전하 천세를 누리소서!”
“박 좌랑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오. 재혼을 축하하오.”
“황공하옵니다. 하온데, 전하! 내일 탄광 현지 조사 가는 것 잊지 마시옵소서.”
“윽! 알았소.”
공국좌랑은 30대 철장이었고 요즘 철광과 탄광 탐사를 맡아 일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여러 철장 두목들 중에서 공국좌랑을 한 명 추천하라고 했더니 이 늙은이들이 가장 젊은 사람을 뽑아 궁궐로 보냈다. 자고로 궂은일은 막내가 도맡아 하는 법이었다.
그 다음은 여러 지역의 원주민 대표들이 나와서 인사를 올렸다. 이민호는 신하인 동시에 동맹인 원주민 대표들에게 후하게 대접해주고 돌아갈 때 선물도 잔뜩 싸주었다.
원주민들 대부분은 아직 자치를 하고 있었다. 평지 원주민 부족들은 기존의 넓은 영역을 대부분 내놓은 대신 개간된 농지를 일반 백성들의 두 배를 받아 부유하게 사는 편이었다. 이들이 농업기술을 제대로 전수받은 다음에는 훨씬 더 잘 살 수 있었다.
산지 원주민 부족들은 예전처럼 산에서 살면서 가끔 평지 시장에 내려와 물건을 교환해갔다. 고산국에서 세금으로 받은 곡식 일부를 식량이 부족한 산지 부족들에게 일정 기간마다 보내서 식량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산지 원주민들은 수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 되지 않았고, 이민호는 그들을 산림관리인으로 여기기로 했다.
그러나 젊은 부부들은 평지로 내려와 정식으로 고산국 백성이 되어 농토를 분급 받아 농사를 짓길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늙은이들이 사냥은 안 하고 술만 마신다는 불만을 품은 걸로 봐서 배가 부르니 다들 나태해진 것 같았다. 이민호는 그들이 계속 산에서 살아주길 바랐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고민 중이었다.
고산국과 해중국의 모든 백성들은 소가족 단위로 일정한 면적의 농지를 지급받고 각자 직업을 가졌다. 3대가 함께 살 경우 성인이 된 자식의 가족을 다른 가족으로 서류상 분리시켜 농지를 추가로 지급했다. 이것은 농지 지급에서 대가족이 손해를 보지 않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농부는 자작농인 동시에 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의 토지를 병작하는 소작농이었다. 병작은 지주와 소작농이 수확물을 절반씩 나눠 갖는 농업경영 방식이었다. 군인은 자기 농지를 농민에게 소작을 주면서 군인 봉급을 따로 받았다. 상인도 마찬가지로 소작을 주든지 아니면 그 땅을 일구면서 동시에 장사를 했다. 다른 직업을 가진 자의 가족이 남아 농사를 짓는 경우도 많았다.
고산국은 땅에 비해 인구가 적어 처음에 가호 단위로 지급받은 농지만으로도 한 가족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다. 여기에 가족 일부가 다른 직업을 가지거나 농민의 경우 흔히 병작을 하기 때문에 재산을 금방 모을 수 있었다. 국영 사탕수수 농장이나 차밭 등에서 일꾼으로 고용되면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백성들, 특히 수입이 많은데 비해 돈을 쓸 시간이 없는 독신 군인이나 해녀의 경우 남는 돈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라를 열고 얼마 안 되어 백성들이 입는 외출복은 비단옷이 기본이 되었다.
여자들은 저마다 금비녀를 머리에 꽂고 남자들은 말총으로 만든 탕건을 썼다. 신분제가 없으니 신분에 따른 복식 규제도 없었다. 그리고 무명옷과 삼베옷은 조선보다 훨씬 가격이 싸기 때문에 들에 가도 조선처럼 헐벗고 일하는 농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재산이 늘어나자 여기저기서 기와집을 짓기 시작했다. 각 마을마다 촌장의 사택을 국가에서 기와집으로 지어줬는데 이것이 설계 표준이 되어 규모를 좀 줄여서 거의 그대로 따라 지었다. 마을 주택가 위쪽에 공동우물이 위치하고 변소는 집마다 구덩이를 파고 바닥과 사방 벽을 단단히 회칠을 하는 식으로 해서 공중위생에 신경을 많이 썼다.
목재는 브루나이 등 남방에서 가져왔고 기와는 조선에서 구워 고산국과 조선을 왕래하는 배에 실어 날랐다. 땔감 수요를 도저히 감당을 못한 조선에서는 철장과 일부 도요에서 사용하던 석탄을 기와를 구울 때도 쓰게 되었다.
모든 백성들이 분배받은 농지에 매여 있어 사실상 거주이전의 자유는 제한됐지만 직업선택의 자유는 확실히 보장됐다. 요즘 고산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 군인과 장인, 교사였고 여자들은 해녀와 궁녀였다. 집집마다 소를 키우고 있어 농민들은 조선에 있을 때에 비해 노동이 고되지 않았다.
다른 나라를 구경할 수 있고 안전하며 훈련 때 말고는 몸이 편하다는 점 때문에 젊은이들에게는 군인이 인기가 좋았다. 궁녀는 일이 힘들지 않고 궁중요리를 배울 수 있어 시집가기 전의 처녀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조선에서 교육을 받은 서얼들은 교사를 선호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마카오 유학생이 가장 촉망받는 직업이었다. 젊은 학생이지만 국가에서 최고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인재들이 유학을 가려고 경쟁이 치열한 시험에 붙기 위해 머리 빠개지도록 공부를 했다. 유학생으로 선발될 경우 짧으면 6개월, 길면 2년씩 마카오에 있게 되는데 고산국에 돌아오면 즉시 관료로 채용됐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찾아온 모든 사람들과 함께 넓은 대전에서 식사를 했다. 궁녀가 부족해 백인 궁녀들도 후궁에서 다시 궁녀로 돌아가 음식을 날랐다. 관리들이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라 그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저리 비켜! 나는 주상전하의 부인이야!”
“싫어! 오빠 무릎에 앉을래.”
이민호가 아이누족 꼬마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먹이고 있는데 여진족 꼬마 신부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가왔다. 둘이 서로를 쏘아보며 신경전을 벌였다. 이민호는 그저 웃음을 참으며 지켜보기만 했다.
여진족 꼬마는 빈 왕비 자리가 자기 것이라고 소리 질렀던 꼬마 신부들 중의 하나였다. 여진족 여자랍시고 두 팔을 허리에 얹고 아이누족 꼬마를 꾸짖으면서 풍기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넌 뭐야? 무수리지?”
“아닌데? 나는 오빠하고 같이 자는 사이야. 너는 오빠하고 같이 잔 적 있어?”
“어, 없어.”
“신부라면서 같이 안 잤어? 그럼 신부가 소박맞은 거네.”
“우앵~”
눈물을 흩뿌리며 대전 밖으로 달려 나가는 여진족 꼬마 신부의 완패였다. 호위대가 꼬마 신부를 붙잡으러 쫓아가는 꼴을 보며 이민호가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이민호를 짐승 보듯 바라보았다.
“아니, 그냥 잠만 잔 거요.”
“전하께서 후궁하고 같이 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비록 저 분의 연치가 적다 하지만 전하의 취향이 그러시다면 하는 수 없지요.”
“아무 일도 없었소. 오해하지 마시오.”
“누가 오해했다고 그러십니까? 국왕전하야말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분도 정식 후궁이신데 아무 일이 있어야지요.”
예국 참판이 쯧쯧 혀를 차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말세다!’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최 선생의 부친이라서 더더욱 짜증을 내는 것 같아 이민호는 아무 소리도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이민호는 철장들과 함께 석탄이 난다는 곳을 찾아갔다. 아열대 지역인데도 꼴에 겨울이라고 궁궐 주변은 제법 쌀쌀했다. 산악지역은 기온이 더 낮을 것 같아 이민호와 호위대는 두툼한 겨울 군복을 입고 말에 올랐다. 철장들도 두꺼운 옷을 단단히 껴입었다.
철장 출신인 공조좌랑이 안내한 곳은 궁궐에서 동쪽으로 80리, 해중국 궁궐에서 남동쪽으로 25리 거리의 낮은 산 인근이었다. 원주민 말로 원숭이 구멍이라는 지역이었다.
계곡을 따라 난 길을 한참 달리다가 길에서 내려와 말을 탄 채로 내를 건넜다. 산기슭에 시커먼 땅이 드러나 있었다.
“노천 탄광이라지만 지표 위에 드러난 양은 얼마 안 되는군요. 산 속으로 이어지는 것 같소. 나중에는 갱도를 파야할 지도 모르겠소.”
“그래도 노지에 나와 있는 것만으로 최소 몇 년은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길이 험해 수송하는 게 문제겠소. 품질은 아주 좋소.”
이민호가 주먹만 한 석탄 덩어리를 만졌다. 원숭이 구멍이라고 하니 문득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이 지역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기억하지 못했다.
실제 역사에서 1884년 청불 전쟁 때 프랑스가 석탄이 나는 대만 북부를 기반으로 청나라 남부를 점령하려 했다. 그 이후 일본이 대만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탄광을 본격적으로 개발했다. 이곳은 한때 6천여 명이 살았던 대만 최대의 탄광 도시 후아퉁(猴硐)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는 광맥이 줄어들어 적자가 누적되고 대지진이 나서 갱도와 시설이 무너진 다음 1990년에 폐광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안내하겠소. 다들 나를 따라오시오.”
“전하께서 이곳에 오신 적이 있으셨던가요?”
“없소. 하지만 대충 위치는 알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