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2 27. 순행 =========================================================================
다음 날 오전에 장인들을 만났다. 배와 추진기관을 만드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선소에서 건조를 마친 전선 두 척이 실내 설비작업 중이고 조만간 기관을 장착할 예정이었다.
두 척이 더 진수되면 터보 샤프트 엔진 둘 또는 넷을 갖춘 전선이 16척으로 늘어날 예정이었다. 전투용 함선인 천자 전선은 두세 달 정도의 단기 원정을 감안하고 건조해 적재량도 커서, 선실에 추가로 끼워 넣고 나머지 인원을 바닥에 재운다면 500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병력 수송선과 보급선을 따로 건조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기마병이 원정에 참가해 전마를 대량 운송해야 할 때는 수송 능력이 벅찰 때가 많았다.
기관 만드는 일에 익숙해진 장인들이 인원을 빼서 따로 공작기계를 만들고 있었다. 금속으로 금속을 잘라 정밀 가공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민호가 열처리와 냉각재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어 장인들이 기존 도구를 개량해 초보적인 선반과 밀링머신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공작기계의 정밀도는 형편없었고 내구력은 한숨만 나왔다. 공작기계의 강도를 높여 더 좋은 도구를 만들고, 이것으로 더 정밀한 공작기계를 만드는 식으로 차근차근 진행해야 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었다. 그리고 철이 많이 필요해진 시기가 도래했다.
“전하! 탄광을 몇 곳 찾아서 여러 가지를 시험 중입니다. 여송에서 수입한 역청탄과 비슷한 유연탄도 발견했습니다. 연기가 많이 나는 대신 화력이 굉장히 센데 직접 보시겠습니까?”
전라좌수영 봉산동에서 일하다가 고산국으로 이민 온 철장이 보고했다. 철광산 발견과 철광석 채굴, 무쇠를 뽑아내기까지 필요한 여러 단계의 제철 과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철장이었다.
유연탄은 말 그대로 탈 때 연기가 나는 석탄이었다. 무연탄에 비해 휘발성분이 많고 특히 역청탄은 빨리 타서 고로의 온도를 높일 수 있었다.
“혹시 노천광산이오?”
“예. 땅거죽에 검은 돌이 드러난 지역이 있는지 원주민들에게 물어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채굴을 쉽게 할 수 있었으나 탄광이 낮은 산기슭에 있고 길에서 약간 떨어져 수레로 옮기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길을 닦으면 되겠지요. 철광과 거리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소?”
“다행히 100리 이내입니다. 용광로를 만들 조건이 갖춰졌습니다, 전하!”
철장들이 철광 몇 곳을 먼저 발견했다가 이번에 탄광도 찾아냈다. 철광산은 수레가 들어갈 만한 길옆에 있었고 철광석의 품위가 높았다. 철이 많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라서 철광을 고를 때 선택의 여지가 컸다.
대만 섬에는 어느 특정 광석의 대규모 광상은 없었으나 다양한 광석이 조금씩 출토되는 것으로 이민호는 알고 있었다. 심지어 석유도 조금이지만 채굴됐다. 금광이 몇 군데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운이 좋군요. 용광로는 어느 위치에 만들면 좋겠소? 탄광과 철광, 내화벽돌을 만들 곳과 대장간까지 수송 소요를 봐서 판단하시오.”
“석탄을 해탄으로 만드는 과정을 노천탄광에서 하면 적은 양을 수송해도 됩니다. 내화벽돌도 적게 드니 거리가 멀어도 상관없습니다. 철광산 가까운 곳에 용광로를 설치하는 게 가장 낫겠습니다.”
제철에 필요한 코크스를 해탄이라고 불렀다. 이민호는 그 동안 필리핀에서 소량 수입한 역청탄으로 코크스를 제조하는 공정을 철장들과 함께 개발해냈다. 코크스의 화력은 보통 석탄을 쓰는 것보다 확실히 좋았다.
그리고 기존 무쇠 고로와 명나라 경덕진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가마를 참조해 철광석을 쇳물로 녹이는 고로를 만들어냈다. 대량 생산을 하기 전에 일단 철이 대량으로 소요되는 사업이라 준비 과정이 꽤 오래 걸렸다.
“저번에 이야기한 대로 고로를 사흘간 쓰고 버리지 말고 연속해서 철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합시다. 내화벽돌로 고로를 쌓는 것도 큰일입니다.”
“예! 전하. 철장들이 교대해 가면서 일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럼 고로를 작게 만들어도 되니 내화벽돌 소요량도 줄어듭니다.”
“철장이 최소 필요 인원의 4배수가 필요하더라도 그렇게 합시다. 꾸준히 생산해야 더 효율적이오.”
만약 고철이 충분히 많은 시대였다면 용광로를 아예 전기로로 만들어 훨씬 싸고 간단하게 고품질의 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고철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이 시대의 제철소인 철장(鐵場)에서도 고철은 좋은 철을 생산하기 위한 필수적인 재료였기 때문이다.
철장(鐵匠)들에게 지시를 마치고 예산을 배정해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말을 타고 목장으로 향했다. 산기슭에 양떼가 흩어져 풀을 뜯고 있는 목가적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조선과 여진, 명나라 등 다른 지역은 이미 한겨울이겠지만 이곳은 온화한 날씨라서 목초지에서는 여전히 파란 풀이 자라고 있었다. 캐시미어 산양들은 또 털을 깎아내서 다시 벌거숭이가 되었다.
회족 처녀 아이샤를 찾아보니 공장에서 방적기를 수리하고 있었다. 대부분 나무로 만든 방적기는 자주 고장 났으나, 실을 뽑을 털이 많지 않아 다른 처녀들과 함께 느긋하게 고치고 있었다.
“잘 돼 가?”
“겨울에 춥지도 않고 이게 뭐여요. 털 품질 떨어진단 말이에요.”
이민호를 반갑게 맞이한 아이샤가 귀엽게 투정을 부렸다. 아이샤 자체가 고급 모직 기술자라서 대우는 좋았다. 모든 물자가 풍족하게 공급되는 궁정 생활에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 아이샤는 어려 보이지만 이미 열여덟이라 제 할 일을 잘하고 있었다.
“이번 겨울만 참아. 곧 조선에서 왜군이 물러나면 엄청나게 추운 고산지역 초원 하나 내줄게. 번식은 잘 돼?”
“암양이 50마리인데 이번에 새끼를 56마리나 낳았어요. 따뜻해서 털 품질은 떨어졌어도 번식은 잘해요.”
“사람도 이렇게 빨리 번식이 되면 좋겠다.”
“예?”
“아, 아냐!”
이민호는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드러냈다. 생각만큼 인구가 늘지 않았다. 사람은 가축이 아니니 차분히 기다려야 한다고 혜영이 말했지만 초조한 마음이 바뀐 건 아니었다.
고산국 백성들은 영양상태가 워낙 좋고 이민호가 공중위생에 신경을 써서 출산율이 높고 유아사망률은 낮았다. 아기들에게 홍역과 소아마비 백신 접종을 해주면 좋겠지만 이민호는 생화학 관련 지식이 적은 편이었다. 미국에서는 국가적 지원과 함께 2만여 명의 내과의 등이 참가한 7년 동안의 전 국가적 연구를 통한 뒤에야 소아마비 백신이 만들어졌고, 이것은 1955년의 일이었다.
그래도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종두법을 이미 실시해서 고산국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에는 곰보가 없었다. 조선과 명나라에도 종두법을 알려줬으나 조정에서 주도해 전국적으로 실시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민호는 사창신문을 통해 종두법을 소개했다. 지역 의원들이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마을 아이들에게 천연두 예방주사를 놓는 경우가 가끔 있었던 정도였다.
이민호는 마카오에서 오래 체류하며 의학을 배우고 있는 고산국 학생들에게 항생물질 개발을 맡겼다. 그러나 루이 파스퇴르가 19세기 사람이라 마카오에서 의학을 가르치는 선교사들도 세균의 존재를 아예 모르고 있었다. 이민호가 현미경을 만들어주고서야 세균과 세포를 확인하게 되었고, 유럽에도 연구결과가 알려졌다.
조선과 명나라에도 현미경이 알려지면서 의원들이 생물학 연구에 뛰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현미경은 정밀 금세공 같은 일에 더 많이 쓰였고, 돋보기 같은 확대경에 대한 소요가 늘어났다. 색수차를 줄인 굴절 망원경을 제작했더니 무관들이나 항해사들이 비싼 값에 사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나 한스 리퍼세이보다 10년 이상 빠른 발명이었다.
“전하! 저는 언제 번식하게 해주실 거여요?”
“사람이 무슨 번식을 해? 출산이라고 해라. 새해에 아이샤가 열아홉이 되나?”
“네! 님을 이미 만났는데 꽃을 못 따서 하릴없이 몸만 늙어가고 있어요.”
아이샤는 백인과 혼혈이 된 회족이라서 성장이 빨라 이미 충분히 성숙한 것 같았다. 10대 초반에 결혼하고 10대 중반에 출산을 하는 시대라 아이샤가 초조해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 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너무 짧아서 조혼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내년에 아이샤 생일 지나고 나서 날을 잡자.”
“꺄악! 며칠 안 남았어요! 그럼 제가 황후가 되는 거여요? 랄랄라~”
아이샤가 치마를 붙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춤을 췄다.
“무슨! 종4품 숙원부터 시작해야지. 그리고 나 황제 아니다.”
“얼른 황제가 되세요! 그럼 더 멋져 보일 거여요.”
“그래, 그래.”
이민호는 농담으로 대역죄를 짓고 있었다.
고산국의 조정이라 할 수 있는 육국(六局)은 새해 준비로 조금 바쁘게 돌아갔다. 관리들이 설날 축제 준비로 바쁜 것이 아니라 내년 계획을 세우느라 야근을 밥 먹듯 했다. 벌여놓은 사업이 너무 많았고, 이민호가 지시해서 이해할 수 없는 사업계획도 여러 가지 준비해야 했다.
요즘 왕명명이 복건성에 자주 들르는 것이 특이했다. 이민호는 명명이 새해를 맞아 친정에 놀러 가나 싶었는데, 미카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복건성에서 2모작이 연속 흉작이라서 기근이 시작됐어요. 왕 귀인은 큰 이익을 얻을 절호의 기회라며 광동의 쌀을 복건으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복건 사람들이 땅을 이미 다 팔았고 워낙 가난해서 쌀은 물론이고 잡곡도 살 수가 없대요. 요즘은 하루에도 수백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어요.”
“뭐? 고향 사람들이 굶어죽는다는데 도대체 무슨 짓이야?”
이민호가 벌컥 화를 냈다. 복건성에서 대기근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부친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기근은 계사년이 아니라 임진년 하반기부터 벌써 시작됐다.
“고산국에서 일하는 복건성 임노동자들 분위기는 어때?”
“일부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쌀을 사서 급히 귀국하고, 일부는 계약을 연장하길 원해요.”
“곧 죽어도 고산국에 정착하겠다는 놈들은 없구나. 대국의 자존심인가? 적당히 좀 남지 말이야.”
그러나 중국에서 대기근이 발생할 때마다 중국인들이 외국으로 나가 정착해 화교가 된다. 실제 역사에서 네덜란드가 대만을 개발할 때 임노동자로 고용됐던 복건성과 광동성 사람들이 대만에 정착한 것도 본국에서 발생한 기근 때문이었다.
앞으로 몇 년 뒤 17세기부터는 전 세계적으로 이상기후가 만연한다. 거의 소빙기 수준으로 기온이 떨어져 세계 곳곳에서 기근이 자주 발생했다.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꾸준히 일어날 일이었다. 기후 변화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줄어들어 기존 인구를 부양할 수 없는 사태가 계속되는데도 사람들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착각해 피해가 더 커졌다.
“혜영이! 복건순무에게 만나자고 연락해줘.”
“쌀을 지원하시려고요? 복건 포정사사에서 예비비까지 쌀 사는데 다 써서 관아에도 돈이 없어요. 빌려줘도 갚지 못할 테니 적선하는 셈 쳐야할 거여요.”
혜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고산국에서 지난 1년 동안 안남과 시암으로부터 쌀을 대량으로 사들였고 조선에도 충분히 비축시켰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전쟁 이후 조선의 쌀 생산량이 급격히 떨어졌으므로 비축량이 많을수록 안전한데 이민호가 함경도에서 20만 섬, 여진족과 교역하면서 10만 섬 이상을 풀었다. 여기서 더 뺀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당장 필요한 쌀을 10만 섬 정도만 넘기고 장기적으로 고구마 재배를 가르쳐줘야지. 준비를 잘한 덕에 조선이나 여진은 괜찮으니까 복건에도 나눠줘야겠어. 지금 당장 돈을 받을 필요 없어. 길게 봐서 미리 은혜를 베푸는 거야. 순무와 연락하는 동안 고구마 온상을 몇 천 개 준비해줘.”
“아! 장립종 쌀은 좀 남으니 괜찮을 거여요.”
어차피 조선인들은 먹지도 않을 장립종 쌀이니 복건성에 대량으로 넘기기로 했다. 그런데 10만 섬을 ‘좀’이라고 표현할 만큼 혜영이 관리하는 식량의 양이 많아졌다는 사실에 이민호가 조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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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인 부분은 대충 넘어갔습니다. 지식의 한계가 오는군요.
오전에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