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90화 (139/1,000)

00190  27. 순행  =========================================================================

이민호가 줄을 잡아당기자 시녀들이 진주를 담은 유리항아리를 들고 들어왔다. 에스파니아 상인들이 눈을 반짝 빛냈다가 자세히 보곤 곧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주르첸 지역에서도 아주 북쪽에서 생산되는 진주입니다.”

“말 그대로 작고 쭈글쭈글한 바로크로군요.”

“유럽에 가져가면 살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상인들의 평가가 영 좋지 않았다. 이런 싸구려 진주를 배에 싣고 유럽에 간다 해도 비싸게 팔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주를 실을 공간에 차라리 비단 한 필을 더 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때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백인 시녀 파티마와 파란색 치파오를 입은 카디자가 진주목걸이를 목에 걸고 진주귀걸이와 반지, 브로치, 진주 서클릿 등을 착용한 채 들어왔다. 파티마와 카디자는 며칠 동안 연습한 대로 패션모델처럼 당당하게 걸었다. 그리고 상인들 앞에서 한 바퀴 몸을 돌리며 찡긋 윙크를 한 다음 접견실에서 걸어 나갔다. 들어왔다가 나갈 때까지 단 20초도 안 걸렸다.

평소에도 예뻤던 백인 시녀 둘이 화장을 하고 머리를 다듬으니 몰라보게 미녀로 변했다. 특히 눈 화장을 한 눈으로 파티마가 윙크했을 때 이민호는 동가공주의 눈빛에 넘어갔던 순간을 떠올리고 말았다. 파티마와 카디자의 미모에 넘어간 건지 진주 장신구에 감탄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에스파냐 상인들의 반응이 호의적으로 변했다.

“더운 바다에서 나는 진주보다는 못하겠지만 반구형 진주라면 쓸모가 많을 거요. 가격을 불러보시오.”

“국왕전하! 이렇게 작고 모양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비싸게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있으면 좋지요. 모든 귀부인이 크고 완벽한 진주만 가질 수는 없습니다. 싼 것도 필요합니다.”

“바로 그거요. 유럽에서의 판매가격과 운송비를 고려해 적당히 값을 책정합시다. 나도 머나먼 주르첸 지역에서 사오는 것이니 손해 보지는 않게 해주시오.”

“만약 전하께서 일정한 물량을 계속 공급해주신다면 유럽의 저가 진주시장에서 일정 지분을 장악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해남도에서 진주를 인공양식하고 남태평양에서 흑진주를 대량 채취할 때나 돼서야 진주 시장이 제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올망졸망한 진주밖에 없었고, 바다에서 나는 진주는 너무 비싸고 거래량도 많지 않을 때였다.

유럽에서도 하급귀족층을 중심으로 저가 진주에 대한 수요가 있어서 결국 이민호가 흡족할 정도의 가격으로 결정됐다. 누르하치와의 협정에 따라 송화강 진주의 절반 물량을 가져올 수 있어 앞으로도 꾸준히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국왕전하께서 추운 땅 주르첸에 가셨다니까 여쭙겠습니다. 혹시 모피를 구입할 방법은 좀 알아보셨습니까?”

고산국 궁궐에 수석대표로서 왔던 돈 후안 마르티네스 로페스 데 보르히아는 자작 작위를 받아 부총독으로 승진했고, 차석대표 돈 페드로 란조르 데 고이티도 정식 남작 작위를 얻었다고 한다. 고산국에서 옥 도자기를 수입해 유럽에 보내 에스파냐에 엄청난 이익을 안겨준 공으로 얻은 작위였다.

부총독이 입을 열고 나머지 상인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동안 옥 도자기나 진주를 거래한 것은 메인 이벤트 전에 변죽을 울린 것에 불과했다. 에스파냐 상인들이 고산국으로 급히 달려온 실제 목적이 모피에 있다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 이민호가 우는 소리를 했다.

“모피요? 어휴! 그게 말이오. 여진 지역이 요즘 정치적으로 좀 복잡해서 모피를 많이 구하지 못했소. 명나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모피 수요가 크고 가격을 충분히 받으니 물량을 구하기가 생각보다 힘들더군요.”

이민호가 줄을 잡아당기자 시녀들이 모피 몇 종류를 가져왔다. 여진에서 수입한 것과 아이누 섬에서 교환한 여러 가지 모피 중에서 한 가지씩 고른 상품이었다.

지난 2년 동안 거래했던 류큐 상인들이 아이누인들에게 무두질을 가르쳐 예전보다 모피 품질이 훨씬 나아졌다. 그 동안 류큐왕국 상인들이 아이누 섬에서 구입한 모피는 재가공을 거쳐 모두 고산국 궁궐 창고에 쌓여있었다. 류큐 상인들은 2년에 한 번 조공할 때가 아니면 북경에서 상거래를 할 자격이 없었으니 그들이 모피를 팔 곳은 고산국밖에 없었다.

“아! 역시 추운 지방 모피라서 그런지 품질이 아주 좋습니다. 무두질도 잘 되어 있군요. 유럽의 귀부인들이 아주 좋아할 만합니다.”

“러시아에서 수출하는 검은담비보다 훨씬 품질이 좋습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군요.”

탄광이 개발되고 유럽 가정에 석탄 난방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추운 유럽에서는 실내생활을 할 때도 체온 유지를 위해서 동물의 털가죽에 의존해야 하는 시기였다. 귀부인의 사치품이 아니라 북유럽 모든 인간들의 생존에 직결된 상품이 모피였다.

“북유럽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 침대 안에서 강아지들을 껴안고 잔다면서요?”

“하하! 정말 야만적이지요. 강아지는 그나마 부자나 가능하고 평민들은 돼지를 껴안고 잡니다. 홀란드의 변태들은 늙은 마누라 내쫓고 암염소를 껴안고 잔다죠.”

“설마 그 변태 놈들이 암염소를 껴안고만 자겠습니까?”

농담하는 와중에도 에스파냐 상인들은 검은담비 가죽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이민호는 비싼 상품에 침이 떨어질까 봐 걱정됐다.

“전하! 검은담비 가죽이 정말 훌륭합니다. 이것이 가장 비쌀 테고 그 다음이 담비, 수달피, 여우, 늑대, 사슴 가죽, 곰 가죽이군요. 종류가 다양하고 품질은 유럽산보다 훨씬 좋습니다.”

“북경의 부호들과 경쟁해서 빼돌린 상품이니만큼 가격이 녹록치 않아요. 부총독께서 특별히 부탁하지 않았다면 가격이 부담돼서 사오지 않았을 것이오. 검은담비는 외투를 만들기에는 너무 비싸니 모자나 만들면 될 것 같소.”

“담비가죽만으로 외투를 만들려면 수십 마리 분량의 가죽이 필요하겠지요. 웬만한 귀족들은 입을 엄두도 못 내겠습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담비 가죽은 거의 보물입니다.”

“거의 보물이라뇨? 이보다 비싼 보물이 있소?”

“정정하겠습니다. 보물 이상입니다.”

이민호가 적당히 부풀린 탓에 모피 가격이 확 뛰어올랐다. 특히 검은담비 가죽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게 가격이 정해졌다.

담비 가죽은 조선과 명나라에서도 최고의 사치품으로 여겼으니 에스파냐 상인들에게 바가지를 씌운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유럽에서 유통되는 모피 가격을 알고 있었고, 충분히 이익을 낼만한 가격에 산 것이다. 서로 만족할 만한 거래가 됐다.

청나라 건륭제 때의 권신이며 대표적인 탐관오리인 화신은 당시 청나라의 12년치 국가예산보다 많은 9억 냥을 치부했고 가경제가 즉위하면서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 목록을 보면 금은보석과 각종 사치품 외에 남자 비단옷이 3808벌이나 되는데 남자용 담비가죽 옷은 713벌에 불과했다. 일상적으로 입는 흔한 비단옷과 달리 권력자가 평생 최대한 모은 물량이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최고 사치품이 담비가죽 옷이었다.

검은담비 가죽은 산지에서부터 비싼 가격이라 여기까지 와서 팔아도 별로 많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이민호에게는 다른 모피가 있었다.

“검은담비의 털도 좋지만 이건 멀리 북쪽의 얼음바다에 산다는 전설적인 동물 해달의 모피요.”

“아아! 털이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에스파냐 상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해달의 털을 만졌다.

“다른 동물과 달리 해달은 피하지방이 아니라 털만으로 추위를 견딘다고 들었소. 전에 심심해서 세어보니 1평방 인치에 털이 159만 6387개나 나 있더군요. 내 말이 맞는지 세어 보시겠소?”

“아닙니다. 국왕전하께서 직접 세어보셨다면 맞겠지요. 이것도 주르첸에서 난 것입니까?”

“그렇소. 주르첸에서도 아주 북쪽, 바다가 얼어붙은 곳의 차가운 물에 사는 동물이오.”

이민호의 말과 달리 해달 모피는 여진 지역에서는 구하기 어려웠다. 해달은 주로 북태평양이나 알래스카에서 살기 때문이다.

유럽에 해달 모피가 소개된 것은 러시아 탐험대가 베링해협을 발견한 18세기 중반 이후였다. 이후 해달 모피가 최고로 인정받아 남획이 이뤄져 멸종 위기를 맞기도 했다.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싸게 팔아치운 것은 당시 해달의 수가 급격히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런던과 세인트루이스의 모피 거래소에서 해달 모피 1장 당 2~3천 달러에 거래됐다.

그런데 해달은 아이누 섬 북부, 그리고 캄차카반도로 이어지는 사이의 섬들인 쿠릴 열도에 수십 만 마리가 서식하고 있었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사이 알류산 열도와 알래스카, 일부는 캘리포니아 연안에서도 서식했다. 그리고 가끔 조선에서도 발견됐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아직 해달을 접해본 적이 없었다.

“두 장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 국왕폐하 내외분께 바치는 조공품이오. 나머지 세 장은 유럽의 모피 상인들에게 그 가치를 물어보는 용도로 쓰시오. 판매는 나중에 하겠소.”

“국왕전하! 해달 모피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겠습니다. 지금 파십시오. 검은담비의 두 배 이상을 쳐드리겠습니다.”

“아직 제대로 된 가치를 모르시는구려. 유럽 모피상들에게 물어보고 내년에 다시 오시오.”

에스파냐 부총독과 상인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나 이민호는 그 이상 받아낼 자신이 있었다.

갑자기 접견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웬 인간들이 호위병들을 뿌리치며 접견실에 난입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국왕전하! 주르첸에서 모피를 구해오셨다면서요?”

“어? 오셨구려. 조금 늦은 것 같소.”

에스파냐 상인들과 거래하는 중에 뒤늦게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들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러나 모피의 절반 이상이 이미 에스파냐 상인들에게 넘어간 다음이었다.

두 나라 상인들 사이에 경쟁이 시작되면서 다시 모피 가격이 뛰어올랐다. 늦게 온 포르투갈 상인들은 좀 더 비싸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운송비를 빼고도 손해 볼 가격은 절대 아니었다.

“겨우 8만 장이면 얼마 안 되는군요. 너덧 배 정도 더 구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리고 해달 모피를 좀 판매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해달 모피는 사실 몇 장 안 되오. 내가 가진 건 겨우 몇 십 장인데 팔기보다는 우리 식구들에게 먼저 줄 거요. 해달 사냥꾼들에게 부탁을 해놨으니 내년 봄에 몇 백 장은 구할 수 있을 것 같소.”

“더운 지방에서 모피를 입으면 병에 걸릴지도 모르니 그것도 파십시오. 그리고 유럽 사교계에 해달 모피를 유행시키려면 최소한 수천 장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르하치와 협의한 모피 10만 장 중에서 5만 장을 사서 이미 다 풀었다. 3만 장은 아이누 섬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귀여운 해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이누인들에게 해달을 좀 잡으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해달 모피는 천천히 풀어서 유럽 귀족부인들이 안달이 나도록 해서 가격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글쎄요. 동물들 씨를 말릴 수는 없지 않소? 추운 지역이라 한 번 사냥하고 나면 몇 년 동안 숫자가 회복이 되지 않아요. 주르첸이 넓다 하나 모피를 이런 식으로 많이 판매하면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거요.”

이민호는 모피 무역을 통해 큰 이득을 얻었고, 아이누 섬은 일단 비밀로 했다. 당분간 해달 모피를 독점하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호의 진짜 목적은 유럽에 모피를 충분히 공급해 모피 가격을 떨어뜨리는 데에 있었다.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진출하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였다.

러시아는 1581년부터 코사크족을 중심으로 동방원정대를 조직해 우랄 산맥을 넘어 시비르한국을 1598년에 최종적으로 정복했다. 그리고 모피를 구하기 위해 계속 동쪽으로 확장해 1619년에는 바이칼 호수 북쪽의 예니세이 강, 1629년에는 흑룡강 북쪽의 레나 강에 이르고 1637년에는 오호츠크 해까지 진출했다. 모피라는 경제적 동기에서 시베리아 정복이 추진된 만큼, 러시아가 모피에서 얻는 이득을 줄여 시베리아 진출을 막거나 늦출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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