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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89화 (138/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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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순행

흘수가 깊은 범선 네 척은 아리수 하구의 요새 아래 포구에 정박하고 전선 8척은 고산국 궁궐 아래 선착장까지 들어갔다. 혜영과 혜진을 비롯한 궁궐 사람들과 원정에 참가한 병사들의 가족들이 마중 나왔다.

구름처럼 몰린 사람들 앞에서 취타대가 연주하는 중에 이민호가 가장 먼저 배에서 내렸다. 마중 나온 3천여 승마보병 병사들이 환영의 의미로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배에서 내린 이민호에게 혜영과 혜진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 동안 아이누족 아이들에 이어 여진족 아이들에게 시달린 탓에 오랫동안 굶었던 이민호는 둘이 평소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이민호의 눈빛을 읽은 혜영이 부끄러워했다.

“혜영, 혜진이 그 동안 궁궐을 잘 지켜줘서 고맙다.”

“저희들이 할 일인 걸요? 그런데 주인님 굉장히 피곤하셨나 봐요. 눈가가 시커멓게 변했어요.”

이민호가 턱을 치켜들어 기함에서 끝없이 내리는 꼬마 신부들을 가리켰다. 화려한 여진족 전통 혼례복장을 입은 여자애들이 조심스럽게 널빤지를 지나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혼자 걷기 어려운 애들은 호위대들이 안고 내렸다.

배를 타고 고산국으로 오는 겨우 며칠간의 여정은 이민호에게 정말 끔찍한 날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질질 짜거나 높은 왕한테 시집간다고 기뻐하던 꼬마 신부들이 며칠도 되지 않아 본색을 드러낸 탓이었다. 아이들끼리 친해져서 장난치며 배에서 돌아다니고 호기심에 온갖 것을 건드려 배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같은 배에 탄 해병들은 국왕의 후궁들에게 감히 손도 못 댔고, 호위병들이 뛰어다니며 꼬마 신부들을 말려야 했다. 신부들을 따라왔던 시녀들을 돌려보낸 것이 이민호로서는 가장 큰 실수였다.

식사시간과 애들을 재울 때가 가장 힘들었다. 기함에서 애들을 재울 방이 부족해 함대사령관실의 큰 침대에 열 명을 재워야 했다. 이민호는 이번에도 바닥에서 잤다.

“설마!”

“그래. 여진족 추장들이 보낸 신부들이다. 시녀로도 못 써먹어. 여자용 기숙사가 딸린 여학교를 만들어서 교육시켜줘.”

기숙사와 여학교를 떠올린 이민호는 치마 길이가 짧은 교복을 먼저 생각했다. 그러나 꼬마 신부들을 다시 보곤 유치원 애들이 입을 노란색 아동복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주인님에게 후궁이 많아지는 것은 왕실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지만 이 정도면 너무 많아요. 그리고 너무 어리잖아요!”

“그러게. 나중에 성인이 되면 자유의사를 물어보고 적당히 궁에서 내보내야지.”

“설마 후궁 자리를 버리고 궁궐에서 나갈 여자가 몇이나 있겠어요? 그리고 쟤들도 책임감이 있어서 함부로 궁에서 나가지 못할 걸요?”

“부모 때문에? 끙! 그렇겠구나.”

어쨌든 궁궐 안에 큰 건물 하나를 내어 기숙사 겸 여학교로 만들었다. 최 선생이 급히 보모 몇 명을 수배해 꼬마 신부들을 돌보게 하고 교육과정을 짜서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최 선생! 조선말과 궁궐 예절을 급히 가르치는 것은 좋아요. 그런데 쟤들이 애들이라고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함경도 여자들보다 드세다는 여진족 여자들입니다.”

“기마훈련을 계속해서 시키라는 말씀인가요? 어려서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르다니 따르겠습니다.”

“민희와 민영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호위대로 키울 생각이신가요? 그럼 대원수께 승마교관을 배치해달라고 하겠습니다.”

“호위대에서 직접 가르치는 게 낫겠소. 민희나 민영과 협의해서 결정하시오. 어쨌든 여자애들에게 체육 시간을 많이 내어달라는 뜻이오. 일반적인 후궁으로 쓸 여자들이 아니니 최 선생이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소.”

“예. 고민희, 고민영 귀인들의 조력자들을 키운다는 마음으로 교육하겠습니다. 그런데 국왕전하께서는 후궁에게 일을 시키시네요?”

“누구든 일을 해야 먹을 자격이 있지 않겠소? 최 선생은 일을 열심히 하니 내 후궁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소.”

“됐습니다!”

최 선생이 냉기를 폴폴 날리며 집무실에서 나갔다. 안경이 잘 어울리고, 다시 보니 전에 거부했던 몸에 착 끼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날씬한 종아리가 예뻤다.

원정에 참가했던 해병과 기마병은 일단 귀가했다가 내일 오전에 다시 집결하라고 명령한 다음 해산시켰다. 간부들이 병사들의 보수를 계산하느라 머리가 빠개질 지경이 된 다음 밤늦게야 퇴근할 수 있었다.

이민호는 궁궐에서 급히 처리해야 할 문서부터 살폈다. 혜영이 대부분을 처리했지만 명나라 황실에서 보낸 여러 가지 칙서에 대한 답신 내용은 이민호가 최종 결정해야 했다.

“왜란이 한참인데 명나라 황제는 여진족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군.”

“왜군이 이제는 수세에 몰려있으니까요. 제독 이여송이 4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어요. 해동상단에서 잘 준비했는지 명나라 군사들에 대한 지공 문제는 아직까지 없다고 해요.”

“곧 평양성을 탈환하겠지. 일단 내버려두고, 황제께 상주문부터 써야겠군.”

이민호는 두만강 동쪽에서 야인여진 일부를 규합해 시장을 만들어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고 명나라 황제에게 사실 대로 보고했다. 그리고 작은 영역을 떼어 고산국의 속령으로서 가칭 동해국을 건립해서 건주여진의 배후를 위협하면 어떨지 황제의 의사를 물었다.

이민호가 초안을 잡은 상주문을 혜영과 미카가 읽고 검토했다. 그 사이 이민호는 미카가 제출한 몽골 지역의 변화에 관한 보고서를 읽었다. 해서여진과 동몽골 지역 부족들이 결혼을 통해 인적으로 결합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9개 부족이 결합하는 것에는 당연히 뭔가 목적이 있었고, 군사적 혼인동맹이 노리는 대상은 건주여진밖에 없었다.

“주인님께서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하셨군요. 하지만 이렇게 하시면 건주여진이 성장을 못할 텐데요. 주인님은 명나라의 우환을 공짜로 걷어주실 건가요?”

“아니! 건주여진이 얻는 무역 이익이 좀 줄어들더라도 설마 망하겠어? 누르하치를 직접 만나봤는데 꽤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졌더라. 개간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무역을 금지하더라도 건주여진이 즉시 망하지는 않을 것 같아.”

이 시기 누루하치는 무순 동쪽의 황무지를 의욕적으로 개간하고 있었다. 시하, 무안, 삼차하 등 강변에서 농경지가 확보되면 비록 기후가 불순한 북쪽 땅이라 해도 어느 정도 식량을 자급하게 된다. 명나라에서 최근에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이 건주여진의 개간지였다.

“우리가 거래하는 곳은 대부분 더운 곳인데 모피는 왜 이리 많이 가져오셨어요? 북경에 가져가서 팔 건가요?”

“아! 마카오와 마닐라에 연락해서 유럽 상인들 오라고 전해. 그들에게 팔 거야.”

“주인님이 돌아오시는 것을 보고 상관에 있던 상인들이 벌써 배를 보냈어요.”

북풍을 받은 배가 아무리 빨리 마카오나 마닐라로 간다 해도 다시 올라올 때는 역풍을 맞으며 천천히 북상해야 했다. 이민호는 모피를 보고 상인들이 얼마나 놀랄지 기대가 됐다.

고산국 궁궐에 돌아온 다음 날 이민호는 전군을 모아 국립묘지에서 장례식을 거행했다. 함경도에서 왜군과 싸울 때 전사자가 16명이 발생했고 중상자 30명 중에서 추가로 다섯 명이 죽어 전사자는 총 21명이었다.

장중한 분위기에서 취타대가 장송곡을 연주하는 동안 예복을 입은 모든 군인과 민간인들이 묵념했다. 흰색 예복을 입은 이민호가 경건한 자세로 흰 국화꽃을 제단에 올린 다음 향불을 피웠다. 그 다음 유가족들이 차례로 헌화했다.

이민호는 따로 국립병원에 들러 중상자들을 위로했다. 왜군을 공격하는 동안 낙마해서 팔다리가 부러진 기마병들이 다수였는데 일부는 완치가 가능해서 다행이었다.

상이군인이 되어 퇴역하는 병사들에게는 적당한 보상과 함께 직업을 마련해주는 것이 정해진 국법이었다. 이민호는 이들 전부를 병무행정을 맡은 부서에 몰아넣었다. 글을 간신히 읽을 줄만 아는 병사에게는 글을 가르쳐서 일을 시키도록 했다. 고산국은 인원이 부족하니 교육도 강제적, 전투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원정에 참가한 해병들과 기마병들에게 며칠간의 포상휴가를 주었다. 그리고 새로 전마를 갖추게 된 승마보병들에게는 본격적인 승마훈련을 시켰다. 크고 사나운 몽골 전마를 타게 된 승마보병들은 처음에는 말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쩔쩔맸으나 금방 익숙해졌다.

“오! 잘 탄다. 조금만 더 훈련을 시키면 승마보병을 완전한 기병으로 전환시킬 수 있겠는데? 어떠냐?”

“턱도 없습니다.”

이민호와 함께 사열대에 오른 계복과 감동, 감불, 민희와 민영이 동시에 내뱉은 말이었다. 이민호는 낙담했으나 그렇다고 기병을 확대하지 않으면 여러 모로 곤란했다. 현재 보유한 기병 300은 지나치게 적었고 그나마 이번에 1할에 가까운 손실이 발생했어도 충원하기 어려웠다.

“몽골에서 용병을 모집할까? 동해여진에서 뽑으려고 해도 그 좁은 기반 하나 지키기도 부족해.”

“요동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 모집에 응하겠어요? 차라리 왜란을 일찍 끝내고 조선 기병을 활용하는 게 어때요, 도련님?”

기병이 필요한 곳은 북중국과 조선, 여진, 그리고 일본이었다. 남양 여러 곳은 기병을 운용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일본을 칠 때 조선인들이 많이 참가하겠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닥쳐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에서 일본 정벌에 대한 논의는 간간이 있었지만 조선의 영토 전역에서 전쟁을 치렀으니 파탄 난 민생부터 챙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황제한테 칙서 하나 써달라고 하세요.”

“그래야겠구나. 고산국이 중심이 되는 일본 원정에 조선을 강제로 참가시켜야겠다.”

이민호는 원래 평양성 탈환도 고산국과 조선의 힘만으로 하려 했다가 생각을 바꿨다. 조선 왕실에 대한 명나라 황제의 영향력을 당분간 계속 유지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명나라 황제가 내린 높은 관직을 갖고 있는 이민호로서는 그게 나았다.

그래서 평양성을 공격할 때 이민호는 고산국 군사들을 직접 참전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조선 출신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모든 전투에 이민호가 나서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주르첸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신 전하께 경하의 말씀을 올립니다.”

“어서 오시오. 말이 나라지 그냥 무역거래소에 불과하지요. 앉으시오.”

접견실 탁자 상석에 이민호가 앉았다. 마닐라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에스파냐 부총독과 상인들이 탁자 주변에 배치된 의자에 차례로 앉았다. 주르첸은 몽골에서 여진을 부르는 말이었다. 당시 여진은 스스로를 주션이라고 불렀다.

여진에 갔다 온 사이에 이민호가 평소에 일하는 집무실 옆 접견실은 화려함의 극치로 변했다. 고산국 궁궐 대부분이 검소한 편이지만 딱 한 곳, 상담을 하는 접견실만은 고급 상품의 전시실을 겸해서 무척이나 호화로웠다. 이민호가 앉은 자리에는 호피가 깔렸고 의자와 탁자는 흑단목에 자개를 입혔다. 옥 도자기 찻잔에 고급스런 향이 나는 차를 마시면서 송나라 때 만든 병풍을 배경으로 차분히 상담을 했다.

“옥 도자기 수입물량을 좀 더 배정해주시길 원합니다. 나전칠기도 작은 화장대 위주로 더 수입하면 좋겠습니다.”

“생산이야 더 할 수도 있지만, 같은 양을 받기로 한 포르투갈 상인들이 반발하지 않겠소?”

유럽 귀족사회에서 옥 도자기의 인기가 좋아 아직 압도적인 판매자 시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가격을 올리지 않은 것을 유럽 상인들이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유럽에서 경쟁을 피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적당히 시장을 나눠서 판매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저번에 베니스를 통해 일부 물량이 오스만제국에 들어갔는데 오스만제국 황실에서 판매를 요구하는 서신을 직접 에스파냐 황실에 보냈습니다.”

“원하신다면 물량을 늘려주겠소. 그들이 좋아하는 특별한 도안이 있다면 알려주시오.”

오스만제국이라면 상관없었다. 포르투갈이 인도양 쪽에서 아랍 여러 나라에 판매하는 옥도자기가 다시 오스만제국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산국에서 아랍이나 오스만에 직접 판매하면 이익이 몇 배로 불어나겠지만 아직 여력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오전에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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