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87화 (136/1,000)

00187  26. 동해여진  =========================================================================

“전하! 마보타이와 송화강 추장들이 국왕전하께 딸을 시집보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이옵니까?”

“그렇소. 멀리서 고생스럽게 어린 신부들을 데려와서 돌려보내기도 어려웠소.”

“그렇다면 제 손녀들도 받아주시옵소서. 국왕전하께서 너무 고귀한 분이라 감히 손녀를 바치지 못했는데 제가 마보타이 같은 송화강의 야만스러운 되놈들보다 못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아오지 등 동해여진 추장들이 그 동안 딸이나 손녀를 바치지 않아서 이민호가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다. 이민호는 시장이 위치한 곳의 추장들인 아오지 등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꼼짝 못하고 손녀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되놈은 북쪽 지방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려나 조선에서 여진족을 지칭했다. 한자로 도이(刀夷, 刀伊)로 표시하는데 여진족 해적이 큐슈지방을 노략질하면서 일본에도 이 이름으로 알려졌다. 동해여진이 생여진으로 불리는 주제에 조선과 교역하여 문물이 발전했다고 자부하며 아오지는 송화강 여진을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으으! 그렇게 하시오.”

“국왕전하께서 이미 훌륭한 후궁 두 분을 두셨으므로 시혼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손녀들을 잘 키워주십시오.”

“도대체 몇 살이기에 키워달라는 것이오?”

“훗! 비밀입니다.”

시혼(試婚)이란 여진족 풍습으로서 정식 결혼 전에 신랑이 시녀와 동침을 하는 것이었다. 어린 귀족자제라면 시녀와 동거를 하면서 밤일을 미리 배웠다. 부마 예정자의 경우 결혼을 앞두고 공주의 시녀를 먼저 보내 동침을 시켜보고 성격이 개차반이 아닌 것을 확인한 다음 정식으로 공주를 시집보냈다. 물론 시혼에 참가한 시녀는 첩으로 남았다.

“추장마다 한 명씩만 보내시오.”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제 손녀 하나, 제 동생의 딸, 제 처남의 딸까지 셋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제 동생과 처남도 추장이니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린 신부가 몇 명 더 늘어났다. 토성에 방이 몇 개 없는데 며칠 만에 아이들로 바글바글했다. 이민호는 토성을 증축하느니 얼른 고산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며칠 더 있다가는 어린 신부들만 계속 늘어날 것 같은 불안감도 한몫했다.

“내가 왜 진작 생각을 못했을까? 얼른 떠나는 건데 잘못했어. 설마 다른 지역에 가도 이럴까?”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크크크!”

“계복아! 앞으로 원정은 네가 가라. 신부도 네가 얻고.”

“부족장들이 정치적 결속의 의미로 국왕에게 딸을 바치는 것입니다. 도련님도 이제 포기하시고 그냥 받아들이세요.”

“아, 안 돼!”

아이누족 청년들은 사관학교로 보내고 신부들은 궁궐 안에 여자 기숙사를 만들어 교육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민호가 정식 처첩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시녀로 써먹을 수도 없었다.

적당히 수하들에게 시집보내서 수를 줄였으면 좋겠지만 조선인이든 여진인이든 일단 국왕의 소유로 넘어간 여자들에게는 절대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이민호가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이 꼬마 신부들은 이미 왕의 여자들로 확정됐다.

일본인 같으면 주군이 하사하는 주군의 첩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민호에게 일본인 신하는 많지 않았다.

호위대 중에서 여자들이 꼬마 신부들을 목욕시키고 잠자리를 돌봤다. 식사시간 때마다 마치 초등학교 급식실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민호는 손수건으로 꼬마 신부들이 먹다 흘린 자국을 닦아주느라 바빴다.

고산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민호의 요청으로 경원부사 오응태가 방문해서 고산국 기마병의 훈련을 봐주었다. 시장 옆 공터에서 기사(騎射) 훈련이 한창이었다. 조선인 출신 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아 과녁에 맞힐 때마다 여진족들이 신궁이라며 탄성을 질러댔다. 동가공주의 호위병들은 고산국 기마병들의 기사 실력에 놀라서 기가 죽었다.

그러나 오응태가 데려온 군관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계속해서 반복 훈련을 시켰다. 조선 출신 기마병들이 만약 무과시험을 준비하는 자들이었다면 제대로 된 기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대부분은 기병 정병도 아닌 보인 신분이었다. 처음에는 절대 이 정도 실력이 아니었으나 그 동안 훈련을 통해 기사 실력이 많이 늘었다.

- 두두두~ 탕!

역시나 말 타고 보병총이나 기병총을 쏘면 아직 정확성이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30보 거리에서는 사람 크기 표적을 명중시킬 정도는 됐다. 총을 기사로 쏘는 실력이 예전보다 많이 는 셈이었다.

얼어붙은 강 건너편에서는 해병들이 승마훈련을 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 멈춰 세운 다음 등자에 발을 딛고 말안장 위에 서서 보병총을 쏘았다. 해병들은 대나 여 단위로 대열을 지어 말 타고 함께 달리다가 어느 지점에 도착한 다음 말에서 내려 급속히 방진을 짜는 훈련도 실시했다.

“도련님! 여진족들에게 우리 실력을 다 드러내도 좋습니까?”

“괜찮아. 이런 걸 무력시위라고 하는 거야.”

고산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여진족들에게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미 왜군이나 노토부락을 섬멸했다는 소문만으로도 감히 대들지 못하겠지만 남아있는 여진족들의 안전을 위한 이벤트였다.

구경하던 여진족들이 감탄을 거듭했다. 총은 소문으로 듣거나 함경도를 노략질하다가 구경했겠지만 여진족들이 작은 대포라고 부르는 유탄발사기는 듣도 보도 못한 신기(神器)였다. 여진족들 중에서 혹시나 배반할 마음을 품은 자가 생기더라도 총과 유탄을 떠올리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느덧 12월 중순이 되었다. 이민호는 활성화된 시장을 내버려두고 고산국에서 가져온 상품을 아오지 첨사와 다른 추장들에게 모두 인계했다. 영덕 어부 김 절충과도 인사시켜 김 절충이 쌀과 소금을 포구에 실어 나르면 여진족들이 인수하기로 했고, 벌써 몇 번이나 시장으로 날랐다. 이민호는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오후에 전혀 뜻밖의 사건이 생겼다. 시장 앞 들판에 건주여진 기마병 수천 명이 쫙 깔렸고, 동가공주의 호위병들이 말을 탄 채 그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동가공주를 따르는 추장들 중에 해서여진 출신이 많아 두 집단 사이에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고산국 기마병과 해병들은 토성과 시장으로 방어 범위를 좁히며 불의의 상황에 대비했다. 야포를 저격용으로 활용하며 큰 공을 세웠던 수병들과 해병들이 야포 옆에 포탄 상자를 실어 날랐다. 수병 포수들이 야전을 따라다니는 것에 문제가 있어 해병에 야전포병대를 두기로 하고 지금은 교육 중이었다.

“기병이 8천에서 일만쯤 되겠는데? 들판이 온통 기병으로 뒤덮였어.”

“기병 3천입니다, 도련님.”

“그런가?”

토성의 성벽에 오른 이민호가 감탄했다. 기병은 실제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계복이 오늘따라 긴장해서 계복답지 않게 진지해진 것 같았다.

“저들이 도련님을 부르는 것 같습니다. 위험할 수 있으니 제가 대신 나갈까요?”

“누르하치 같다. 내가 직접 가겠다.”

“누르하치요? 위험한 인물 같으니 그냥 날려버리지 그러세요?”

“일단 이야기 정도는 해보고.”

이민호가 계복과 호위병들을 이끌고 토성에서 나왔다. 시장 입구에 검은 담비가죽 외투를 입은 30대 초반 남자가 갑주를 입은 장수들과 함께 이민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내내 시장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던 여진족들이 지금은 다들 멈춰서 입을 다물었다.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누르하치라고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민호는 계복과 호위병들을 거느린 채 나가서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눴다. 체구는 크고 얼굴은 길어 누르하치의 인상착의에 맞아 들어갔다. 통역을 맡은 민희와 민영이 너무 긴장한 티가 나서 이민호가 속으로 웃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 건주좌위 지휘사 동 노을하적이 인사 올립니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동 지휘사.”

복장이 화려한 계복과 같이 갔는데도 누르하치는 이민호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고산국에서 발행한 주화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민호를 바로 알아봤다.

누르하치는 아이신 기오로라는 성이 있는데도 이 시기에는 동(童) 또는 동(冬)을 중국식 성씨로 삼아 자주 사용했다.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성을 받았다는 설, 데릴사위로 들어간 한족 장인의 성이라는 설, 당시 여진족이 명나라를 상대하면서 흔히 쓰던 성이라는 설이 있었다.

“사실 저는 동가 거거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시장이 세워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커다란 시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직접 왕림해 계시다는 소식에 더더욱 놀랐습니다.”

“시장이 별로 크지는 않습니다.”

“철수 준비 중인 것을 보니 중요한 거래는 이미 다 마친 모양이군요. 저희들의 정보망이 이렇게 허술하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아니면 저희 건주여진을 적대하는 자들이 많아 정보를 차단했다는 반증이겠지요.”

누르하치도 동가공주의 숱하게 많은 구혼자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동가공주를 호위하는 자들은 누르하치를 적대시했지만 양쪽 모두 동해여진의 영역인 이곳에서 싸울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아무리 힘이 우선하는 여진족들이었지만 최소한 다른 부족의 영역을 존중해주기는 했다. 물론 약하면 바로 잡아먹었다.

“국왕전하의 병사들은 건주여진의 기마병 3천을 전혀 겁내지 않는군요. 하긴, 왜군 2만 병력과 싸워 그 절반 이상을 죽였으니 제 부하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당연하겠지요.”

“알고 계시는군요.”

영동관 책성에서 승리한 지 겨우 한 달도 안 됐다. 국경 너머 멀리 있는 누르하치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국왕전하께서는 동가 거거를 만나보셨습니까?”

“예. 홀딱 넘어갈 뻔했습니다.”

“하하! 저는 그 어린 여자아이에게 이미 넘어갔답니다. 국왕전하는 역시 다르시군요.”

유부남이 대놓고 다른 여자에게 구혼한다는 것을 이민호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동가공주는 누르하치의 첫째 딸보다 어린 여자였다.

“동 지휘사라면 충분히 자제할 수 있을 텐데 반하시다니요. 목적이 따로 있어서 동가공주를 취하려 하는 겁니까?”

“전하께서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예허부는 해서여진의 핵심이고, 지금은 저희와 서로 원수사이니까요. 제가 만약 예허부와 관계를 개선할 수만 있다면 여진 일통은 꿈이 아닙니다. 그것을 아는 다른 부족들이 제가 동가와 맺어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방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명나라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방해합니다.”

“여진족의 통일이라. 좀 무섭습니다.”

“국왕전하께서는 저를 전혀 겁내지 않으시면서 엄살이십니까?”

여진족 기병 3천은 겁나지만 누르하치는 토성에 배치된 야포의 사정권 내에 잡혀 있었다. 이민호가 가진 능력으로 이 자리에서 누르하치를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 몇 만 명이 복수하겠다고 나선다면 곤란했다. 그럴 경우 이민호가 다시는 여진족 땅에 발을 붙이기 어려워졌다.

“저야 멀리 떨어진 섬에 사니까 그렇고, 국경을 접한 명나라나 조선은 긴장하고 있을 겁니다.”

“명나라는 저의 원수이니 징치하고 싶지만 아직 그럴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조선을 침공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혹시나 승리하더라도 얻는 것 없이 손해만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자식들이라면 그런 멍청한 결정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조선을 지키고 계시니 쉽게 생각하지 못하겠지요.”

이민호가 기억을 떠올려보니 실제 역사에서 누르하치는 조선을 침공한 적이 없었다. 사르후 전투에 조선이 명나라를 위해 지원군을 보내 후금을 치려고 했는데도 후금은 조선에 반격하지 않았다.

그 아들 홍타이지는 후방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핑계로 조선을 두 번이나 침공했다. 정묘호란은 홍타이지가 청 태종으로 등극하고 나서 재위 2년차인 1627년에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