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85화 (134/1,000)

00185  26. 동해여진  =========================================================================

“사람 셋이서 떠들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낸대요.”

“계속 소문을 내서 사실로 믿게 만든다고?”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는데 동가의 부친은 그 속담을 실행에 옮긴 셈이었다. 동가가 사람들 앞에서 실제로 얼굴을 내미는 경우는 극히 드무니 사람들은 동가가 면사로 얼굴을 가린 모습만 보고도 천하절색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문이 퍼지면서 과장된 평가가 사람들의 미적 기준에 실제로 영향력을 미쳤다. 사람들이 동가공주를 만났을 때 그 미모를 실제보다 더 올려서 평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민호도 민희가 자주 동가공주의 미모를 칭찬했기 때문에 실제로 처음 봤을 때 좀 더 과대평가한 감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시장에서도 동가공주의 뒤통수만 보고도 천하제일 미녀라고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민호는 기억해냈다.

“그리고 오늘 시장에서 제 미모를 칭찬하던 사람들 중 수십 명이 제 부친이 풀어놓은 사람들이에요.”

“맙소사! 그래서 뒤통수만 보고도 미녀라고 떠들어댔었구나. 나는 쥐떼 중 하나였던 거야? 그런데 왜 이런 비밀 이야기까지 하는 거야? 너희 가문의 치부가 될 수도 있잖아?”

가문의 비밀을 밝힌 동가공주가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전하! 저를 데리고 가주지 않겠어요?”

“가출하고 싶어? 미안. 네가 평범한 여자라면 몰라도, 모든 여진족의 시선이 너에게 가 있으니 나는 도저히 용기가 안 난다. 그리고 죄 없는 이곳 사람들이 학살당하도록 만들 수는 없잖아.”

이민호가 이곳에 다시 올 생각이 아니라면 동가공주를 몰래 배에 태우고 도망가기는 쉬웠다. 그러나 이곳 동해여진 사람들은 아주 곤란해질 것이다. 동가공주를 호위하던 유력자들이 만만한 희생양을 찾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동해여진 사람들이 작정하고 막는다면 방어가 가능하겠지만 갑작스럽게 공격해오면 허무하게 무너질 수도 있었다.

“전하도 어쩔 수 없나 보군요. 저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억지로 정략결혼을 해서 평생 한숨짓는 불행한 희생자가 되겠죠.”

“공주로 태어난 죄야. 어쩔 수 없어. 그 사이 잘 먹고 잘 살았잖아? 누릴 건 다 누리고 책임을 피하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구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저를 비난하다니, 너무해요!”

“정략결혼이 다 나쁜 건 아니야. 어차피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공주들을 잘 키우는 거니까, 그냥 순응해라.”

원해서 공주로 태어난 것은 아니겠지만 그 동안 호강했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냉정한 대답이었다. 갑자기 동가공주가 이민호의 품에 파고들었다. 비싼 향수를 썼는지 공주의 몸에서 향기가 났다.

그러나 이민호에게는 명절 때 귀찮게 달라붙는 조카아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열 살이든 열세 살이든 상관없었다.

“제가 아름답지 않나요? 저하고 같이 멀리 도망쳐요.”

“나하고 고산국에 가봤자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서 심심해 미칠 걸? 웬만하면 가족들 있는 고향에서 살아라.”

“흑흑! 너무해요.”

이민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동가공주 스스로 가출을 결정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동가공주 아버지의 지시가 있었을 거라고 예상했다. 동가공주와의 결혼을 미끼로 다른 부족을 멸망시킨 적이 있는 예허부 패륵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알 수 없었다.

건주여진과 일촉즉발의 분위기인 예허부에서 다급하게 몽골 부족들도 끌어들이는 마당에 고산국이라고 영입 명단에서 빠질 이유가 없었다. 아니, 함경도에서 왜군 2만을 섬멸했다는 고산국 원정군을 같은 진영으로 끌어 들인다면 누르하치를 상대로 필승의 카드로 사용할 수 있었다.

“가짜로 울지 말고.”

“헹! 전하는 재미있는 분이세요. 다음에 또 봐요. 오늘 이야기는 비밀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도저히 믿지 못하겠지만요.”

진짜 성격은 발랄한 모양이었다. 공주가 일어나자 이민호는 민희와 민영을 시켜 동가공주를 안내하도록 했다. 토성 바깥에 어느새 모여든 동가공주의 호위 추장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저를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여진족의 앞날을 위해 고산국 국왕전하와 정치적인 대화를 나눴을 뿐이에요.”

“국왕과 정견을 나누시다니, 역시 공주님은 현인이십니다.”

“하지만 공주님은 우리 여진족의 보배이시니 호위에 만전을 기하십시오.”

마치 사이비 종교 교주를 모시는 듯했다. 추장들이 동가공주를 찬양하며 화려한 천막으로 모셔가는 동안 이민호가 창문을 통해 지켜봤다. 동가공주의 고모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배가 부른 아이누족 아이들은 일찍 잠에 빠져들었다. 큰 침대에서 애들 넷이 자고 있는 이 방에는 기함과 달리 작은 침대가 따로 없어서 같이 북적대며 자야 했다.

여자 호위병들도 꼬마 애들을 좋아했지만 어린 애들은 누가 자길 더 좋아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아이누족 아이들은 민희, 민영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주인님은 아까 왜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셨어요?”

“황금을 바치겠다는 것? 글쎄.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동가공주가 갑자기 굉장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아프더라.”

이제 와서 보니 동가공주가 거울을 보면서, 혹은 실제 사람을 앞에 두고 수천 번 연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무협지에나 나오는 섭혼술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끼리 표정만으로 대화하는 방법이 있었다. 마치 거지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는 것처럼, 표정만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민호는 예전에 추운 겨울에 지하도에 꿇어앉은 거지가 불쌍하다고 지폐를 꺼내 적선을 하고 나서 열 발짝도 걷기 전에 후회해본 적이 있었다. 동가공주를 거지와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비슷한 점이 확실히 많았다.

“뭔가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내가 부자라는 자랑도 하고 싶었어. 사실 그 동안 힘들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기도 했어. 그래서 말이 헛나왔는데 민희 덕에 손해는 안 봤으니 됐지 뭐.”

이민호는 동가공주가 어려 보인 탓에 성적인 매력은 거의 못 느꼈다. 동가공주도 그것을 알아채고 일부러 불쌍한 표정을 지어 이민호에게서 받아내려고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동가공주를 따라다니는 남자들은 답이 없었다. 어린 미녀에게 홀려서 홀랑 털린 주제에 자기들끼리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단합도 잘 됐다. 똘똘 뭉쳐서 다른 남자들의 접근을 막는 저들이 무서워서 웬만한 남자들은 구혼도 못할 것 같았다.

“주인님은 처음 공주님을 만날 때부터 이상했어요. 말 한 마리에 은 여섯 냥은 너무하셨어요. 아무리 몽골 말을 좋게 봐줘도 다섯 냥이면 충분했어요.”

“저 멀리 몽골에서 여기까지 끌고 왔다잖아? 괜찮아. 동가의 부친이 그 돈을 군자금으로 쓸 테니까. 건주여진의 공격을 조금 더 오래 막을 수 있을 거야.”

“설마 일부러 말을 비싸게 사준 거였어요?”

“일부러는 아니고. 나도 비싸게 샀다는 후회를 했는데 나중에는 그런 생각도 들더라.”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는 이민호였다. 이민호가 실제로 손해를 본 것은 공주를 만난 초반이었다. 동가공주가 여진족 제일의 미녀라는 소문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처음부터 긴장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말 값을 필요 이상으로 올려주어 공주에게서 환심을 사려 했다. 그러나 공주가 면사를 벗는 순간 어린 얼굴을 보고 나서 그 즉시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 직후 이민호의 상태 변화를 눈치 챈 동가공주가 전략을 바꿔 애절한 표정을 지었다. 비언어적 의사소통에 약한, 남자인 이민호는 공주의 눈빛과 얼굴 표정에 자기도 모르게 설득돼 뭐든지 갖다 바치려 했다. 동가공주는 예허부의 패륵 가문에서 10여 년 동안 교육시켜 키워낸 강력한 앵벌이였던 셈이다.

만약 민희가 옆에 없었다면 큰 낭패를 봤을지도 몰랐다. 비합리적인 상황에 저항하는 힘은 이민호가 민영보다 약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시장이 열렸다. 고산국의 물건뿐만 아니라 여진족들 사이에서도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말을 만 필 넘게 수입하는 일을 마친 이민호가 떠날 준비를 하는데도 시장은 날이 갈수록 점점 커졌다.

“이 시장을 계속 유지했으면 좋겠소. 아 첨사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민호가 추장 아오지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진족으로서 역동적인 인생을 살아왔을 아오지는 평생 소문으로나 접할 대단한 사건들을 최근 며칠 동안 겪고 있었다.

그 강하다던 노토부락 기마병들이 단 한 순간에 눈앞에서 몰살당하고 여진족 최고 미녀라는 동가공주를 구경했다. 그리고 고산국 국왕에게 첨사 벼슬을 받았다.

“그렇긴 합니다만, 전하! 저희 신하들은 힘이 약하옵니다. 강한 부족이 와서 이곳 시장을 내놓으라고 하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지키라고 하면 무리한 요구요?”

“저희들은 강적이 마을을 침범해올 경우 경원부로 도망가서 보호를 받을 생각이었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국왕전하의 신하가 되었으니 조선 땅으로 도망가지 못하고 유사시에 국왕전하께서 만드신 포구로 후퇴해 언덕길을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삶의 터전을 버리더라도 목숨은 구해야겠지요. 보병총을 주기는 좀 그렇고 조총을 몇 십 정 구해드릴까요?”

동해여진을 너무 강하게 만들어주면 근처 함경도의 고을과 방어진에서 불안에 떨 수도 있었다. 그래도 다른 여진족 부락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할 테니 이민호는 아이누족보다는 조금 좋은 왜군 조총을 넘길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오지 추장의 의견은 달랐다.

“그건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전하! 누르하치가 조총과 대포를 구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화약무기를 절대 여진족에게 팔지 않습니다. 조선에서는 평소라도 여진족에게 조총을 팔지도 않겠거니와 지금은 더구나 왜군과 전쟁 중입니다. 누르하치가 화약무기를 구할 곳이 없습니다. 만약 저희가 조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누르하치가 반드시 이곳을 공격해 빼앗아갈 것입니다.”

“그렇겠구려. 여진족 기마병 몇 만 상대로 해병 몇 백 명 배치시켜봤자 의미가 없을 테고. 쩝!”

고산국 해병은 계속 규모를 늘렸지만 다 합해서 2000명에 불과해 이곳에 1개 려 이상 배치시킬 여력은 없었다. 이민호는 아이누에도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고 유일하게 필리핀에 1개 대, 25명을 배치했을 뿐이었다.

병력을 특정한 지역에 고정 배치하려면 교대 병력을 비롯해 병참 지원하는 배까지 해서 그 몇 배의 병력이 필요했고, 유사시 연락수단도 갖춰야 했다. 아직 전체 병력도 부족한 판에 벌써부터 병력을 분산시키는 일은 피해야 했다.

“경원부에서 가끔 순찰을 나온다면 이곳을 조선 영토로 인정해주는 여진족이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 조선 영토는 두만강까지라고 발표했으니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요.”

“그렇다면 이 지역을 묶어 고산국의 속령이나 속국으로 정하면 어떨지요? 마침 이 근처 부락 추장들 중에는 명나라 직첩을 받은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오지 추장의 말과 달리 외국인에게 주는 명예직 벼슬 이름을 적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직첩은 영토 경계를 획정하는 일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명나라 직첩을 받은 여진족 추장이 다스리는 지역을 명나라 영토로 인정한다면, 명나라 도독첨사 직첩을 받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큐슈 영지를 명나라 영토로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명나라에서는 요동과 그 동쪽 여진족 거주 지역 전체를 노아간도사라는 행정기구가 명목상 다스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주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해 통치한 적도 없고 여진족들에게 세금을 걷은 적도, 군역이나 요역을 부과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요동 지역에 길게 쌓은 요동 변장의 존재도 거슬린다. 현대 중국의 학자들은 요동에 세운 긴 담인 요동 변장(邊墻)을 한족 거주 구역과 형제 민족 거주 구역 사이를 구분한 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변명하지만 북경 북쪽 만리장성 지역처럼 병력 다수를 배치했으니 누가 봐도 국경선이었다. 즉, 만주 땅은 여진족의 것이거나 아직 무주공산이라는 이야기였다.

“속령이나 속국이라. 그게 좋겠소. 속국을 만듭시다. 동해여진이니 동해국이오!”

“이름이 좀 그렇습니다.”

이민호가 나라 이름을 대충 촌스럽게 짓는 버릇은 여전했다. 그러나 고산국은 대만 섬을 지칭하는 여러 가지 유서 깊은 이름들 중에 하나였다.

============================ 작품 후기 ============================

이어지는 내용 한 편은 내일 연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