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84화 (133/1,000)

00184  26. 동해여진  =========================================================================

“이상한 걸 알면 됐다. 혹시 날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럴 리가 있나요? 만약 그런 생각이 든다면 차라리 자살할래요.”

“어?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민영이 너는 절대 죽으면 안 돼.”

이민호와 민영이 닭살 돋는 애정 행각을 펼치자 여진족 추장이나 유력자들이 죽일 듯한 눈으로 이민호를 쏘아 보았다. 동가공주의 미모에 이민호가 넘어가 재산을 바치려 할 때도 미워하더니, 미혹에서 빠져나오자 증오심은 더 불어났다.

“흥! 그럼 다음에 봬요.”

돌아선 동가공주가 깜빡 잊었다는 듯이 발걸음을 멈췄다. 이민호는 몹시 불안했으나 동가공주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제가 서역의 금화를 몇 개 봤었지만, 금화에 새겨진 사람 얼굴을 실물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전하께서 금화와 똑같이 생겨서 더 놀랐어요.”

“풋!”

“민영이 웃지 마!”

금화와 은화에 이민호의 얼굴을 새긴 탓에 조선 왕들이 가끔 유희로 한다는 미행(微行)이나 민정시찰 같은 것은 꿈에도 못 꾸게 됐다. 적지에 잠입해도 금방 들킬 테니 그런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것이다.

추운 겨울에도 하늘거리는 얇은 옷을 입은 동가공주가 신분이 높은 자들로 구성된 인간 양탄자를 밟고 다시 마차로 날듯이 들어갔다. 이민호는 그 동안 동가공주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심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공주가 마치 인간에게 길들어 새장 속으로 돌아가는 애완용 새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가공주와 공주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시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거대한 천막촌을 형성한 채 머물렀다. 이들은 고산국의 물건을 구입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남았고, 이 지역 추장들에게 천막을 칠 자리를 요구했다. 아오지 등 이 지역 추장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굽실거리기 바빴다.

동가공주를 호위하는 자들은 여러 여진족 부락의 추장이거나 그 후계자들이라서 다른 여진족 집단들이 감히 시비를 걸지 못했다. 이들 덕택에 시장이 확실히 안전해진 느낌이었다.

저녁이 되어 철시한 시장 여러 곳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요 며칠 간 술에 취한 여진족들이 밤마다 다툼을 벌였으나 오늘은 고산국 군사들과 동가공주를 따르는 자들이 날카롭게 기세 싸움을 하고 있어서 술꾼들은 얌전히 앉아서 술을 마셨다. 가끔 여진족끼리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을 할 때도 입을 다물고 싸워서 해질녘의 시장은 긴장 속에서도 평화로웠다.

이민호는 혹시나 동가공주를 따라온 자들이 공격할까 걱정돼 토성 성벽에 올라가서 살폈다. 그러나 건너편 천막촌은 붉은 저녁노을 아래 너무도 조용했다. 야포를 다루는 수병들이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보고했다.

“여진족들은 그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 아니었나?”

“아니에요, 주인님. 저들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남의 영역에서 함부로 설치지는 못할 거여요. 동해여진이 비록 약하고 수가 적다해도 자기 영역을 지킬 힘은 있어요.”

이민호는 민희, 민영과 함께 성벽에서 내려왔다. 근무를 끝낸 기마병과 비번인 해병들이 토성 안에서 뒤섞여 술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곳을 지나갔다. 원정 기간 중 음주 규정이 따로 정해져서 얼마 안 되는 술에 적당히 취한 해병들이 이민호를 불렀다.

“국왕전하! 헤헤! 노래 한 번 불러보세요.”

“흥을 돋우는 데는 춤과 노래가 최고입니다.”

“어? 나는 노래 잘 못하는데.”

이민호가 사양했으나 민희와 민영이 팔을 잡아당겼다.

“주인님! 저번에 저희에게 가르쳐줬던 노래 같이 불러요.”

“여기서? 창피하게.”

“좋은 노래잖아요. 같이 불러요. 네?”

이민호가 민희와 민영에게 21세기 노래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될 것 같아 몇 가지 옛날 노래를 골라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민희와 민영은 가사를 여진어로 바꿔 불렀다.

“너와 나의 기쁨과 사랑을 노래한 지난 여름 바닷가를 잊지 못하리.”

“그 얼굴에 노을이 물들어 오고 머리카락 바람에 헝클어질 때~”

이민호가 조선말로 남자 파트를 부르는데 민희가 처음에 백 코러스를 넣어주었고, 나중에 민영이 듀엣으로 함께 불렀다. 이민호는 노을이 내려 붉게 물든 민희와 민영의 뺨을 어루만졌다.

“너와 나의 기쁨과 사랑을 노래한 여름날의 바닷가를 잊지 못하리.”

비슷한 가사가 계속됐지만 다들 즐겁게 들어주었다. 노래가 끝나자 병사들이 환호했고, 이민호가 손을 흔들어주고 숙소로 돌아갔다.

토성 근처에서 이 노래를 들은 여진족들이 따라 부르기도 했다. 나중에는 모든 여진족 땅에서 남자가 구혼하고 여자가 승낙할 때 남녀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전하께서 노래 부르는 것을 봤어요. 부러워요. 두 분이 단순한 호위병이나 후궁이 아니라 진정 전하께서 사랑하시는 분들이었군요.”

저녁을 먹고 방에서 쉬던 이민호가 깜짝 놀랐다. 요물이 나타났다.

“헉! 너 어떻게 토성에 들어왔어? 조선말을 할 줄 알아?”

“약속한 대로 밤에 전하를 만나러왔다고 했더니 호위병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들여보내주더군요. 여진 귀족에게 한어와 몽골어, 조선어는 기본이에요. 그런데 이거 반말이죠?”

호위 체계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공주가 밤에 은밀히 방문한다면 호위병이 막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동가공주는 앙큼하게 남자의 상상력을 자극해 간단히 호위병들을 통과했다.

호위병들이 최소한 안내나 통보는 해줬어야 했다. 이민호는 나중에 호위병들에게 교육을 시키면서 한바탕 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린애한테는 반말이 제격이지. 그런데 너같이 예쁜 애가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하지 않아?”

“답답해서 가끔 혼자 돌아다녀요. 지금도 고모가 지켜주고 있어요.”

아이누족 아이들에게 목욕을 시키고 나오던 민희와 민영이 화들짝 놀랐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배에 놔두고 왔는데 애들이 자꾸 운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

이민호가 동가공주와 그녀의 고모라는 소녀를 안내해 탁자에 앉혔다. 아이누족 아이들까지 같이 밥을 먹기 때문에 기다란 식탁이었고, 의자도 긴 나무의자였다. 토성을 지을 때 대충 만든 것이라 왕의 식탁치고는 소박했다.

동가공주의 고모는 언니라고 해도 믿을 만큼 비슷하게 생긴 미인이었고 나이는 17세 정도였다. 고모와 조카가 나이 차가 별로 안 나는 것을 볼 때 할아버지였던 패륵이 후처를 많이 거느렸던 모양이었다.

“너 참 특이하더라. 진짜 열 살 맞아?”

“열세 살인데 어려 보이도록 일부러 신체 성장을 늦춘 거여요. 그래야 어린 나이에 비해 현명한 여자라는 평가를 받기 쉬우니까요. 제가 얼굴만 예쁘다면 예쁜 여자 수십 명을 첩으로 거느린 패륵들이 좋다고 따라다니겠어요?”

“맙소사!”

이민호는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단순히 미녀라는 타이틀만으로는 콧대 높은 패륵들을 절대 유혹할 수 없었다. 나이가 어린 것도 남자를 유혹할 때 보통은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예허부의 공주라는 고귀한 신분과 더불어 나이에 비해 월등한 현명함이 동가공주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지금도 실제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는 동가공주가 어른 수준으로 이민호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어떤 목적을 위해 이렇게 딸을 키운 예허부의 패륵이 조금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예전에 이민호가 유성에서 살 때 로리콘이 뭔가 해서 검색해본 적이 있었다. 원작 소설 롤리타의 여주인공은 그래도 13살이라도 됐지만 일본 애니에서 말하는 로리콘은 유치원생 이하의 어린아이에게 집착하는 소아성애자였다. 그리고 원작 소설의 롤리타는 어른을 유혹하는 팜므 파탈도 아니고 그저 중년 남성이 어린 소녀를 강간하는 이야기를 현란한 문장으로 잘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남자들이 당해본 적이 있더라도 관심도 없고 민망해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어린 계집아이가 성인 남성을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현실에서 흔히 일어났다. 어려 보이는 아이누족 아이들도 가끔 이민호에게 야릇한 성적 신호로 해석될 수 있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애들이 성욕을 느낀다거나 어린 나이에 까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인 여성이 됐을 때를 대비해 미리 역할 연습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남자애들이 전쟁놀이를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것을 구분 못할 이민호가 아니라서 아이들을 다독이면서 큰 문제없이 넘겼다.

“그래도 예쁘긴 정말 예쁘다. 웬만한 남자는 홀랑 넘어가겠어. 그렇게 예쁘게 태어나니 사는 게 불편할 것 같기도 해.”

“태어난 게 아니라 사실은 만들어진 거여요. 좋은 음식과 약재로 피부와 얼굴을 가꿨어요.”

“음식과 약재?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다시 봐도 동가공주는 역시 예뻤다. 그러나 이민호는 어린 아이의 미모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칭찬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민희와 민영이 허둥거리며 차를 내왔다. 아이누족 아이들은 동가공주가 아니라 고모라는 소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간세들을 고용해 여진 전역에 소문을 퍼뜨렸어요. 세상에 세 살짜리 미인이라니! 도대체 말이나 돼요?”

“그건 정말 이상하다.”

“이 일은 부친이 해서여진의 패권을 잡으려고 20년 전부터 계획한 거여요. 언니와 동생들, 고모들까지 동원됐지요. 지금은 제가 동가공주이지만 사실 그 전에는 동가공주가 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 어렸을 때는 고모가 너 대신 나섰겠구나. 대단한 미인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국왕전하.”

동가공주의 고모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이민호는 나이가 찬 고모가 더 마음에 들었다. 15세 이전에 결혼하는 여진족 귀족들의 풍습에 따르면 고모는 벌써 노처녀 축에 들었다. 그러나 이복 오빠의 권력욕이 고모를 처녀로 잡아두고 있었다.

“고모가 저하고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사람들이 속아 넘어갔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 자매에게 장가를 들었어요. 야만적인 풍습이죠?”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실제 역사에서 1593년에 누르하치의 측실이 되며 나중에 홍타지이를 낳고 제1황후로 추존되는 예허나라씨 효자고황후는 동가공주 대신 누르하치에게 시집간 고모였다. 고모는 비슷하게 생겼으면서도 동가공주가 갖지 못한 성숙한 매력이 넘쳐흘렀다.

“그런데 만들어진 미인이라니? 소문이야 그렇다 치고 미인을 만들 수 있는 거야?”

“어렸을 때 머리를 돌로 눌러 머리 모양을 바꾸는 편두를 아시죠?”

“응. 옛날에 유목민들이 편두를 했지. 지금도 하나?”

편두는 고대에 코카서스 산맥 북쪽 초원지대나 훈족과 여진족 일부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다. 고조선은 물론 가야와 신라에서도 편두 흔적이 발견됐다.

“편두에서 발전한 거여요. 성장하기 전에 얼굴뼈에 손을 대서 이상적인 얼굴 모양으로 교정해요. 원나라 때 황실 후궁에서 이런 기술이 발전했어요.”

“예쁜 황후에게서 태어난 공주들이 잘 먹어서 예쁜 게 아니라 그렇게 바꾸는 거였구나.”

옛날에 의느님이 없었더라도 인간들이 미를 추구하는 욕망은 같았다. 그리고 예허부는 원나라 황궁에서 오래도록 실시한 실험을 통해 여자들을 미인으로 가꾸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하를 호위하는 후궁 중에서 키가 작은 분하고 저를 비교해보세요. 저 분이 낫죠. 그러나 사람들은 더 유명한 제 얼굴만 보기 때문에 제가 더 미인 같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거여요.”

이민호가 민희와 동가공주가 아니라 민희와 민영을 번갈아가며 살폈다. 객관적으로는 민희의 얼굴이 더 예쁘긴 한데 민영은 청순하게 생겨 이민호의 취향에는 민영이 더 잘 맞았다. 그러나 민영은 체구가 커서 이 시대 미인상에서는 조금 벗어났다.

셋을 나란히 앉히고 보니 셋 다 예뻤다. 동가공주가 예쁘긴 한데 특출하게 예쁜 것은 아니었다. 이민호가 보기에는 고모가 제일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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