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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80화 (12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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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동해여진

올해는 추워서 바다에 벌써부터 부빙이 떠다녔다. 전에 의용공주와 함께 타이타닉 놀이를 했더라도 전선을 빙산에 충돌시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이민호는 낮에만 조심스럽게 항해하도록 했다. 밤에 두 번 함경도 포구에서 정박했는데 영동관 책성에서 대첩을 거뒀다는 소식이 이미 함경도 전역에 퍼져 있었다.

오후에 경성에 정박했을 때는 밤부터 아침까지 백성들이 계속해서 몰려와 이민호에게 축하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다들 피난살이하느라 없는 살림에 선물을 싸들고 와서 이민호는 어쩔 수 없이 고산국에서 발행한 한 냥짜리 은화를 답례품으로 돌렸다. 전쟁 중인데도 쌀값이 많이 오르지 않아 쌀 한 섬에 은 한 냥 정도에 교환되고 있다고 하니, 그것으로 김 절충에게서 쌀 한 섬을 사도록 했다.

11월 24일에 고산국 전선 8척이 육지 깊숙이 들어간 만에 도착했다. 두만강 하구에서 북쪽 30km, 굴곡이 심한 두만강 하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동쪽 10km 거리이며 나중에 러시아 포시예트만이라는 이름이 붙은 지역이었다. 러시아의 군항이 되는 블라디보스토크 남서쪽이었다.

해안에 개펄이 쌓인 것을 본 기함의 선장이 단정을 앞세워 수심을 재면서 조심조심 해안에 접근했다. 이곳 바다는 얼지 않았다. 함경도 바다에서 떠도는 부빙은 북쪽 오호츠크해에서 떠내려 온 것 같았다.

“위험한데 감불이 네가 꼭 척후로 나가야겠냐?”

단정 두 척을 내리고 감불과 기마척후 네 명이 탔다. 이민호가 갑판 위에서 감불을 말리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여진족 말을 아는 사람이 몇 명 없지 않습니까? 혹시 제가 고향에 돌아왔다고 도망갈 것 같아서 겁나는 겁니까? 그렇죠? 맞죠, 도련님?”

“네 까짓 놈 가려면 언제든지 가라. 네놈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속이 후련할 것 같다.”

“우헤헤! 그럼 반드시 돌아올 게요.”

감불이 기병들과 함께 언덕을 넘어 사라졌다. 고산국에서 이미 신분이 높은 감불이 도망가지야 않겠지만, 그 성질머리에 혹시나 여진족들과 괜한 시비가 붙어 싸우지나 않을까 걱정됐다. 감동이 나머지 기마병들을 지휘하고 있어서 함께 보내지 못해 아쉬웠다.

한반도 최북단 온성에서 방향을 꺾어 남쪽으로 흘러가는 두만강의 동쪽 지역에는 무수한 여진족들이 각자 마을을 세우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이들 여진족들 중에 일부는 건주여진이나 해서여진에 속했으나 나머지 대부분은 동해여진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통일되지 않고 동해여진 자체도 건주여진이나 해서여진과 달리 구심점이 없었다.

이때 여진은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과 그 북쪽의 해서여진, 그리고 동쪽의 야인여진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세부적인 부족 단위에서 서로 결혼으로 동맹을 맺거나 이해관계가 엇갈려 같은 여진 안에서도 정치적으로 무척 복잡한 시기였다.

건주여진은 건주위, 건주좌위, 건주우위로 구분됐다. 건주좌위에 속했던 누루하치가 건주 삼위를 통합한 것이 바로 이 해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러나 건주여진에 속한 백두산여진 3부는 아직 통합시키기 전이었다.

명나라와 교류가 많은 숙여진(熟女眞)인 해서여진이나 건주여진과 달리 야인여진은 명나라 입장에서 보기에 문명이 떨어지는 생여진(生女眞)으로 분류됐다. 주로 동쪽에 거주하는 야인여진은 때로 남쪽의 동해여진과 북쪽의 흑룡강여진으로 나누기도 했으며, 각 부족이나 마을들이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기마병에 이어 해병들이 상륙을 마치고 수레에 짐을 싣고 있는데 감불이 여진족 몇 명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다. 감불은 추장을 만에서 북서쪽 20km 거리의 고개 너머 들판에 살고 있는 여진족 추장이라고 소개했다. 뜻밖에 추장이 조선말을 잘 구사했다.

“저는 이름도 없는 강변 여진 마을의 추장 아오지입니다. 조선말로 검은 돌이라는 뜻입니다. 고산국의 국왕전하이시며 명나라의 제독총병관이시며 조선에서도 정헌대부이신 높으신 분께서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영접하러 나왔습니다.”

“환영해줘서 고맙소. 조선말을 잘 하시는구려.”

추장이 멀리서부터 말에서 내린 다음 땅에 엎드려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아오지는 여진어로 검은 땅, 검은 돌이라는 뜻인데 현대의 아오지 탄광과 연결 돼 불타는 돌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었다.

“예! 전하. 저도 한성에 입조하여 낮으나마 조선국의 6품 관직을 제수 받았습니다. 저희들이 원래 보을하진과 온성부 읍성 밑에서 조선국 변장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었는데 회령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몇 달 전에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자기들은 조선에 협력하는 번호(藩胡)라는 주장이었다. 추장은 조선 왕궁에 입조한 적도 있다고 했는데 입조 자체가 조공무역의 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번호들은 상황에 따라 조선 영토를 노략질하는 적호로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뒤집힐 수 있었다. 심지어 건주 3위를 통합한 이후 강성했을 무렵의 누르하치마저 조선국의 번호를 자칭하며 조선국 관직을 달라고 청했을 정도였다.

“본직은 물건을 팔고 말을 사러 이곳에 왔소.”

“우왓! 정말이십니까? 에구! 죄송합니다. 제 입이 방정입니다.”

추장이 좋아서 얼굴 근육과 몸이 가만히 있질 못했다. 추장의 반응으로 미루어 이민호는 이번 무역이 잘 될 것으로 예상했다.

조선에서 압록강변에 무역시장을 연 것은 1593년이었고 이후 임진왜란 기간 중에 함경도에서도 고을별로 시장을 개설했다. 그 전에는 두만강 주위에 거주하는 여진족 추장들이 한성에 입조해서 토산품을 바치고 회사품을 받는 전형적인 공무역을 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입조를 할 수 없게 되고 함경도의 방어가 약화되자 두만강 주위에 살던 여진족들이 노략질로 전환했다. 군사가 적은 함경도 고을이나 번호를 침범해 농기구와 필수품을 약탈해간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함경도에서 시장을 연 다음부터 노략질이 대폭 줄어들고 여진족들이 구름처럼 찾아와서 무역에 참가했다.

그 전에도 명나라가 요동에서 여는 시장이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러나 무역의 이익을 해서여진과 건주여진이 독차지하고 있어서 요동과 거리가 먼 야인여진들은 다른 여진족을 통해 물건을 몇 배나 비싸게 구입해야 했다. 이민호가 배를 몰고 옴으로써 동만주의 야인여진 부족들에게는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저절로 굴러 들어온 셈이었다.

“그대의 마을 바깥 물을 구하기 쉬운 곳에 시장을 열어 며칠 거래했다 가면 좋겠소.”

“무역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전하! 넓고 좋은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조선의 쌀과 면포, 농기구를 가져 오셨습니까?”

“비단과 구슬도 팔겠소. 양이 많으니 다른 지역에도 알려주시오. 시장을 열고 성책을 지을 땅에 대한 임대료와 전령 수고비는 드리겠소.”

“귀한 분께서 직접 멀리서 오셨으니 마땅히 무료로 땅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저희 동해여진 부족들이 수십 년 일궜던 땅을 버리고 와서 곤란한 점이 많았었는데 전하 덕택에 부흥의 기회로 삼겠습니다. 그러니 일을 시켜주시면 견마지로를 다 하겠습니다. 믿어만 주십시오! 멀리 해서여진은 물론 몽골지역에도 알려 말을 팔라고 전하겠습니다!”

“건주여진에는 알리지 마시오. 건주여진에서도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장사꾼에게 도매로 팔 생각은 없소.”

건주여진이 분포한 백두산 북서쪽은 산악지역이고 북동쪽 현재의 길림성 연변 지역은 낮은 산이 많은 가운데 평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건주여진이 자리 잡은 만포 북쪽 압록강 건너편보다는 동해여진이 사는 두만강 주변 지역이 말을 키우기에 더 적합했다. 건주여진이 무순에서 명나라 상인들에게 파는 말은 다른 지역에서 사와야 했다.

“저도 건주여진이 좋을 일은 해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전령을 보내 북쪽 흑룡강의 생여진과 북서쪽 해서여진 여러 부락에 알리겠습니다. 말은 얼마나 사실 계획이신지요?”

“일단 일만 마리 정도 살까 하오. 몇 만 마리 넘어도 상관없소.”

“흐익! 해서여진 예허부에 연락해서 몽골 말 몇 천 마리를 사오라고 전하겠습니다.”

“전마로 쓸 테니 체구가 큰 편이 좋소.”

“몽골말이 다 작은 것은 아닙니다. 철기가 타는 말은 큰 편입니다.”

추장의 안내를 받아 고개를 넘어 가보니 나중에 훈춘이 되는 지역이었다. 두만강으로 합류하는 지류들이 어지러이 서에서 동으로 달리는 평원 곳곳에 여진족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실록에 언급됐듯이 당시 여진족들은 주로 물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선조실록에는 누르하치가 물가에서 떨어진 산에 성을 쌓고 살며 갖가지 방어 시설과 기계장치를 갖춘 것을 알고 선조 임금이 충격을 받는 내용이 있다.

아오지라는 추장이 이끄는 부족은 500명도 되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아오지 추장과 혈연관계라는 주변 다른 두 마을의 추장들이 이민호에게 인사하러 왔다. 이민호는 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무역을 하는 동안 협조를 받기로 약속했다.

이미 겨울이라 얼음이 두껍게 얼어서 강은 교통에 방해되지 않았다. 이민호는 방어하기 편한 강변의 언덕에 목책을 세우고 그 앞 너른 들을 시장으로 지정했다.

해병 600명과 겨울에 할 일이 별로 없는 여진족들을 시켜 산에서 통나무를 베어 오고 강에서 진흙을 굳혀 벽돌을 만들었다. 이틀 정도 공사를 하니 제법 그럴듯한 성채가 만들어졌다. 물론 내년 장마철이 지나면 무너질 허름한 토성이었지만 일단 무역하는 동안은 버틸 만한 거주지 겸 방어시설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두만강 동쪽에 시장이 열렸다고 여진족 전체에 소문이 나면서 며칠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여진족들이 몰려들었다. 해병들이 토성을 지키며 일부는 장사에 나섰다. 아이누 섬에서 처음 장사할 때는 쑥스러워 하던 해병들이 여기서는 목청껏 소리 질러 손님을 모으고 능숙하게 가격을 흥정했다.

이민호는 영덕 어부 김 절충과 함께 말을 대량으로 매매하는 거래에만 참가했다. 멀리 북쪽 송화강 유역에 사는 여진족 추장의 아들이 말 300필을 몰고 와서 이민호가 직접 살펴봤다. 감동과 감불, 아오지까지 아주 좋은 말이라는 평가를 내리자 이민호가 가격을 매겼다.

“전마로 사용할 만한 상등품 말들로만 모아 오셨군요. 한 필에 면포 50필 혹은 백미 4석, 또는 은화 4냥을 주겠소.”

“우와! 많이 쳐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키워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전마로 쓰기에 정말 좋은 말입니다.”

이민호는 조선에 가면 면포 500필에 거래되는 상등품 전마를 마음껏 싸게 매입했다. 조선 초기 세종 때 조공무역을 하면서 여진에서 큰 말 상등품을 오승포 45필에 사서 명나라에 면포 500필을 받고 팔았다.

고려 말에 면화를 생산하던 초기 말 값은 면포 5필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조선에 면화가 대량 생산되면서 면포 가격이 떨어졌다. 면포 한 필의 가격은 조선 전기 흉년에는 쌀 5되일 때도 있었고, 후기에 쌀 생산이 늘어나면서 3말일 때도 있었다. 17세기에 조선 조정에서 쌀 3석에 면포 50필을 기준으로 삼았으니 면포 한 필에 쌀 한 말이 안 될 때가 많았다.

평소 동해여진이나 흑룡강여진 부락에서 건주여진에게 파는 말 가격보다 훨씬 높이 쳐준 탓에 하루에 말을 천 필씩 살 수 있었다. 여진족 전역에 소문이 나서 지금도 멀리서 말떼를 몰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제는 무엇으로 하시겠소?”

“은화로 주십시오, 국왕전하! 그 은화로 고산국의 쌀과 소금, 면포를 적당히 나눠서 사겠습니다. 딸아이들이 시집갈 때가 돼서 비단 몇 필을 사고 싶지만 전란과 흉년으로 인해 부족민들이 굶고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말을 300필이나 거래했고 멀리 여기까지 몰고 오셨으니 시집갈 따님들을 위해 비단 세 필을 선물로 드리겠소. 부인께는 채색 유리구슬을 몇 개 드리시오.”

“헉! 고맙습니다.”

이민호는 송화강 유역에 사는 부족장들에게 특히 많이 베풀었다. 인구는 적으나 여진족의 원류가 살던 곳이고 거리가 멀어서 건주여진이 함부로 공격해서 복속시키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건주여진이 강성해져서 몽골로 가는 길이 막힐 경우 송화강에 퍼져 사는 여진족들을 통해 몽골과 연결될 수도 있으니 미리 좋은 관계를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유리구슬은 떡밥이었다. 파랗고 빨간 소용돌이가 치는 모양에 홀린 남자들이 여자에게 선물로 줬더니 인기가 치솟았다. 나중에는 채색 구슬 하나에 은 한 냥씩 거래됐다. 특히 송화강 유역에서 채색 구슬은 가격이 싸면서도 아름다운 보석 장신구 취급을 받았다.

============================ 작품 후기 ============================

추석 잘 지내셨는지요?

일단 하나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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