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9 25. 차가운 바다, 뜨거운 땅 =========================================================================
왜장을 죽였다 해도 수급과 갑옷 외에는 돈이 될 만한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민호는 이런 요청을 쉽게 허락했다. 가토군 본진 뒤쪽에 병참기지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돈이 될 것을 별로 찾지 못했다. 사무라이들 입장에서는 이 은혜를 나중에 어떻게든 갚아야 하는 것이니 그들에게 빚을 지운 셈 쳤다.
“정 평사께서는 나베시마와 계속 교섭해서 왕자들을 돌려받도록 하시오.”
“그런 큰일은 제독총병관 대인께서 하셔야 합니다.”
“나는 명나라 벼슬을 겸하기 때문에 정 평사가 맡는 것이 좋겠소.”
“대인께서는 조선국에서도 고관대작이십니다. 조선을 대표해 왜병들과 협상을 진행할 충분한 자격이 있으십니다.”
“으음. 평사! 나의 지위는 높고 평사는 지위가 낮소.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대인. 당연합니다.”
이민호의 물음에 정문부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민호는 정문부 상대로 갑질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귀찮은 일을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떠맡기는 것이니 결국 갑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황공한 이야기지만 조선에 사는 어느 누구도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상대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오. 나도 그렇소. 그러니 가등청정의 시신을 인도해준 대가로 포로가 된 왕자들을 교환하는 골치 아픈 일을 평사가 맡아서 하시오. 왕자들 때문에 짜증나는 일이 많을 테니 나는 이 문제에서 빠지겠소. 일단 바쁘기도 하고, 명나라 제독총병관이기 때문이오. 이해하겠소?”
이민호에게 바쁜 일은 없었지만 얼른 고산국 궁궐로 돌아가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새해가 오기 전에 두만강 하구의 야인여진 부락에도 가야 할 것 같았다. 결국 왕자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하루 빨리 함경도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끄응! 제독총병관 대인께서는 쉬십시오. 그런 일은 제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미안하오.”
“사실 왕자님들 때문에 함경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구해주고 나면 왜 늦게 구해줬냐고 왕자님들이 저한테 뺨이나 치겠지요. 그래도 제가 신하이니 그런 모욕을 감수하고 왕자님들을 구하겠습니다.”
“과연 정 평사는 충신이시오. 만약 내가 왕자에게 뺨을 맞으면 명나라와 외교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서 그렇소. 뒷일을 부탁하겠소.”
정문부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성격 이상한 사람의 신분이 높으면 밑에 사람들은 무척 피곤해진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전쟁이 난 불안한 시기에도 평소에 하던 못된 버릇을 버리지 않았다.
군사를 모집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받고 간 함경도에서 임해군은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였으니 왜군과 다를 게 없는 짓을 한 셈이었다. 반란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었다. 임해군은 왜군에게 포로로 잡힌 것을 평생 부끄러워했으나 어째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왜 두고두고 임해군에게 욕을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고산국 원정군 중에서 전사자가 16명이나 생겼다. 중상자도 30여 명이나 되었다. 전사자는 주로 기마병에, 부상자는 해병에서 많이 발생했다.
병원선인 제3선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전사자 영현은 배 밑창에 수습했다. 눈을 다져서 얼음을 만들고 이것을 배 밑창에 가득 담았다.
고산국 궁궐에서 보이는 산기슭에 국립묘지가 있었다. 그 국립묘지에 새로운 묘비가 설 때마다 이민호는 반성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고산국 궁궐에 돌아가면 몇 가지 중요한 일을 더 이상 늦추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감마님! 대첩을 경하 드리옵니다!”
오후에 영덕 어부 김 절충이 배를 타고 와서 책성을 방문했다. 그는 이민호 앞에서 무릎 꿇고 대첩을 축하한다면서 말과 달리 엉엉 울었다.
“혼자서 정말 수고가 많았소. 절충장군이 되신 것을 축하하오.”
영덕 어부는 조정에 납속을 많이 해서 품계가 정3품 당상관으로 올랐다. 이민호는 그를 위로하고, 쌀이 얼마나 남았는지 물었다.
김 절충은 마치 다람쥐가 도토리를 숨겨놓듯 이곳저곳에 잘 숨겨놓고 관군과 의병에 군량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지원해왔다. 그럼에도 아직 창고마다 몇 만 석 단위로 남아 있었다.
“26만 석이요? 정말 대단하시오! 김 절충 그대는 충신이오!”
“모두 대감마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키워주기로 했다.
“윤선은 몇 척이 있소?”
“황소 20마리가 돌리는 중형 윤선이 모두 세 척입니다.”
“동쪽 바다로 며칠 항해하면 아이누족이 사는 땅이 나오는데 알고 있소?”
“왜인의 땅 북쪽에 털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섬 말씀이시옵니까? 어부들에게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바람을 잘 타면 나흘 만에 간다고 합니다만 어부들은 풍랑이 두렵다고 합니다.”
“흐음. 지도를 주겠소. 쇠죽 쑬 짚을 추가로 싣지 않아도 며칠 만에 왕복할 거리 이내이니 괜찮을 거요.”
함경도 장인들이 무기와 농기구를 잘 만드니 이들에게 사서 아이누 섬에 보낼까 고민했다. 해삼의 물량과 이익 배분도 미리 생각해두어야 했다.
“아이누 사람들과 무역을 하실 계획이십니까?”
“이미 다녀왔소. 그대는 아이누족을 두 달에 한 번씩 방문해서 쌀과 소금, 칼과 창, 농기구를 팔고 해삼이나 모피, 황금을 받으시오. 구슬을 보낼 테니 그것으로 여인들과 금으로 교환하시오.”
“황금과 해삼은 귀물이니 대감마님께 모두 보내드리겠습니다.”
“음. 당분간은 무역이 끝나면 계산해서 몫을 나눠주겠소. 손해는 보지 않게 해드리겠소.”
“항상 그랬듯이 대감마님께 처분을 맡기겠습니다.”
이민호가 손해 보게 한 적은 없으니 김 절충이 철석같이 믿었다. 이민호는 유구국 상선이 더 이상 아이누 섬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전라좌수영 해동상단 분점으로 보내도록 했다.
그리고 다른 편지는 분점주 앞으로 보내 함경도에 백미 30만 석을 수송하라고 지시했다. 배 수십 척을 여러 번 동원해야 했으나 동해안에 왜선이 다니지 않으니 대마도와 울산 사이만 잘 지나면 문제없었다. 영덕 어부가 했던 것처럼 밤에 지나가거나 먼 바다로 돌아가도 됐다.
“대감마님. 함경도에 쌀이 남을 것 같습니다만.”
“이건 아이누나 여진족과 무역할 때 쓸 거요. 무역이란 신기한 게 말이오, 상대를 거지로 만들 수도 있고 부자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오. 여진족 땅에 가서 상대를 봐가면서 둘 중에 하나로 만들려고 하오.”
함경도에 상단 거점이 필요했는데 김 절충이 적당할 것 같았다. 이민호는 그에게 호위 무사들과 여진족 통역을 고용하라고 지시했다.
함경도에서는 보인에 불과하더라도 삼남지방에 가면 정예기병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16세에 혼자서 호랑이나 곰을 잡더라도 자랑할 일도 아니었다. 이런 용맹한 자들을 일단 김 절충 밑에서 일을 시키다가 스카웃할 것을 생각하고 이민호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저녁이 되기 전에 왕자 송환 협상이 급물살을 탔다. 협상장에 들어가기 전에 정문부는 왜군을 단천 이남으로 물러서게 하고 마천령을 방어진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아예 함경도에서 물러날 테니 추격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협상을 하다 말고 정문부가 급하게 이민호에게 달려와 의견을 구했다. 정문부는 왜군이 퇴각할 때 고산국 전선이 바다에서 따라가면서 포격을 할 것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저는 이해를 못하겠으니 대인께서 하명해주십시오. 설마 대장이 죽었다고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대인의 배에서 포격을 할까 두려운 것이겠지요.”
“아니요. 급한 연락이 와서 한성으로 돌아갈 모양입니다. 이번 전투가 없었더라도 물러섰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함경도에는 해안도로가 잘 닦여 있지만 산길로 우회하는 방법도 있소. 나도 배로 왜병들을 따라가면서 포격할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헛일일 것 같아 포기했소.”
이민호가 부친에게 듣기로는 계사년 2월 초에 가토군이 함경도에서 벗어나 한성으로 퇴군한다고 했다. 그러나 예정보다 빨리 돌아갈 모양이었다. 왜군이 조선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목표였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만약 왜군이 물러설 예정이었다면 그 동안 치열하게 싸운 저희가 허탈해질 것 같습니다.”
“전국 팔도에서 관군과 의병이 열심히 싸웠으니 왜군이 물러나는 게지요. 함경도 군민들도 왜적을 상대로 충분히 싸웠으니 승리를 즐길 자격이 있소. 설이 되기 전에 쌀을 돌릴 테니 군사와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떡이라도 해먹도록 하시오.”
“군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위무해주시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대인.”
함경도 백성들을 위로해서 인기를 얻은 다음 나중에 반란에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함경도 빈민들이 고산국에 이민이라도 가면 좋겠다는 소박한 희망뿐이었다.
그리고 여진족을 상대할 때 지금 단계에서는 평안도보다 중요한 지역이 함경도였다. 특히 한반도 북단 온성 주변은 온갖 여진족들의 세력이 충돌하는 요충지였다. 여진족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두만강을 넘어와서 계속 싸우고 승패가 결정된 다음 돌아가기도 했다.
계산했던 것보다 쌀이 남아돌 것 같아 함경도에 쌀을 풀기로 했다. 영덕 어부 김 절충에게 시켜 함경도 고을마다 인구수에 맞춰 쌀 한 섬씩 배급했다. 그리고 전란 기간에 비워두었던 해안 창고를 다시 꽉 채웠다.
다음 날 아침 왜군이 마천령을 넘어갔다. 함경도 기병 50명이 왜병들을 선도하며 단천군수나 안변부사가 지휘하는 관군과 의병이 습격하지 못하도록 하고 안변에 가서 왕자를 모셔오게 했다.
그 사이 정문부는 군사를 동원해 영동관 책성을 수리하고 마천령에도 작은 보루를 쌓았다. 들판에 널린 왜병들의 수급과 갑옷, 무기를 거두고 모두 혜산진으로 보냈다. 배에 태워 압록강을 통해 의주 행재소에 보고하려는 의도였다.
“대첩을 경하드리옵니다, 제독총병관 대인!”
“함경도 영선생이시오?”
“그, 그렇사옵니다, 대인!”
낮에 함경감사 윤탁연이 와서 이민호 앞에서 쩔쩔 맸다. 이민호는 함경감사가 군사를 늦게 동원하는 바람에 대국의 제독총병관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엄하게 꾸짖었다.
“그대는 그 동안 어디에 있었소? 병력이 부족해 도리어 우리가 전멸할 뻔했소. 황제폐하와 주상전하께 영감이 한 짓을 알려드리리까?”
“그, 그것만은 제발! 살려주십시오, 노야!”
“아니면 지금 군령을 시행할까요?”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 노야!”
특히 군령을 시행 운운하자 함경감사의 낯빛이 퍼렇게 변했다. 늙은이에게 노야 소리를 듣는 것만큼 고역이 없어서 더 이상 족치지 않기로 했다.
이민호는 대첩을 거둔 이 전투의 주장이 정문부이며, 만약 감사가 다른 식으로 조정에 거짓을 고한다면 반드시 군령을 시행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함경감사가 천지신명께 맹세했다.
나중에 조선 국왕이 경략에게 보낸 자문은 다음과 같았다. 원래는 소소한 승리를 명나라에 보고하지 않으려 했으나 경략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티를 역력히 내는 내용도 포함됐다.
‘함경도 병마평사 정문부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11월 16일 길주성에서 650과를 참획하고 같은 달 18일 영동관 책성에서 적의 2만 대군을 맞아 싸우면서 적장 가등청정을 죽이고 왜적 1만여 명을 사살했습니다. 이때 흠차제독총병관 주애공이 관군을 도와주었다고 하니 함경도의 관군과 의병들은 모두 황제폐하의 위엄으로 전공을 세운 것입니다.
당직이 살펴보건대, 조선의 신민이 위로 천위를 의지하고 기력을 분발하여 각각 흉추(兇醜)를 초토하여 적으나마 참획이 있어 번거롭게 해부(該部)에 보고하여 제준(題准)을 거쳐 외람되게 상전을 입게 되었으니 부끄럽고 또한 두렵습니다. 우선 전보(轉報)를 정지하고 사태가 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유별로 주문하려 하였는데, 경략 병부의 자문을 받으니, 그 내용에 ‘그 나라 신민에게 엄칙하여 협력해서 왜적을 토벌하며 각도에서 참획한 것을 본부(本府)에 보고하면 자복(咨覆)에 의하여 일체 상을 준다.’ 하였으므로 본직이 감히 마음대로 그만 두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후로 얻은 적의 머리, 투구, 갑옷, 무기 등은 원임(原任) 승문원 교검 허징을 차출, 압령하게 하여 경사(京師)의 본부에 보냅니다. 대체로 수급이 1만 7백 19과요, 금칠한 투구와 갑옷이 모두 562부(部)이며, 그 외에 잡다한 기물은 별지에 적힌 대로입니다.’
이민호는 고산국 원정군 전 병력을 배에 태우고 영동관 책성을 떠났다. 항로는 북으로 잡았다. 영덕 어부 김 절충이 전선에 처음 타 보고 어리둥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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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가 또 길어져서 2편으로 나눠 올립니다.
다음 편은 여진 땅에서 펼쳐지는 내용입니다. 내일은 연재를 하루 쉬겠습니다.
추석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