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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78화 (127/1,000)

00178   25. 차가운 바다, 뜨거운 땅  =========================================================================

그러나 왜병들이 완전히 패주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열을 갖추고 버티고 선 왜군의 진영이 아직 여러 곳이었다.

전열이 무너져 도주하던 왜병들이 그 진영 뒤로 숨었다. 장창 진영 옆에 나선 조총병들이 패잔병들을 추격하던 함경도 기병들에게 총격을 퍼부었다. 함경도 기병들은 조총 사격을 받아 희생자가 늘어나자 얼른 뒤로 물러섰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왜군의 일차 공격을 겨우 막아냈을 뿐이었다. 이번과 비슷한 공격이 두세 번 계속된다면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은 책성 수준으로 막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양쪽 중에서 둘 중 하나는 전멸할 수도 있었다.

이민호가 적진을 살피다가 왜군 방진에서 창날이 반사하는 빛 너머 조금 먼 곳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이민호가 직접 포병들에게 다가갔다.

“이봐, 수병! 적의 본진이 저기 북쪽 산 밑에 있다. 맞힐 수 있나?”

“삼면을 가린 휘장 안에 뾰족한 투구를 쓴 왜장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전하.”

“맞히면 여기서 포를 쏘는 수병들 모두에게 백은 100냥씩 주겠다.”

“감사합니다. 당연히 맞힐 테니 편히 앉아서 구경이나 하십시오.”

수병들이 신중하게 대포를 조준했다. 함포를 휴대용으로 개조해 쓰고는 있지만 무거운 포가만 개조해서 경량화가 아직 미진했다. 포신 길이를 줄이고 주퇴복좌기를 작은 것으로 바꾸면 말 몇 마리에 싣고 다니며 기병포나 산악포 정도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민호에게는 항상 시간이 부족했고, 장인들에게만 떠맡기기에는 그들의 기술이 부족했다.

산 아래 약간 높은 언덕에 휘장을 치고 왜장이 앉아 있었다. 주변에 화려한 갑옷을 입은 왜장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수시로 전령이 와서 의자에 앉은 왜장에게 보고했다. 관군이나 의병들이 보기에는 다들 비슷한 왜장들이겠지만 이민호는 저들을 다이묘와 가신, 하타모토로 대충 구분할 수 있었다.

접의자에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왜장이 쓴 것은 통째로 투구인지 아니면 투구 위에 덧씌운 모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세로로 아주 높아서 키높이 구두처럼 키높이 투구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남무묘법연화경은 가토군의 군기인데 보통 병사들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써서 등에 메고 다녔다. 그러나 왜장이 앉은 곳 뒤에는 붉은 바탕에 금색으로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구마모토의 다이묘 가토 기요마사가 틀림없었다.

- 쾅!

“빗나갔다. 장전! 우로 2도.”

포탄이 터지기도 전에 수병이 포 조준을 수정했다. 그 사이 본진 주변에 포탄이 떨어져 폭발했다. 파편과 폭풍에 의해 군기 여러 개가 넘어지고 휘장이 찢겨나갔지만 왜장은 꼿꼿이 앉아 있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고 버티는 바로 그것이 전투 중에 다이묘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실제 전투현장의 지휘는 보통 가신대장이나 사무라이대장들이 맡아서 수행하고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포의 정확성이 떨어질 거라고 판단했는지 주변에 포탄이 떨어지는데도 피하지 않았다.

- 콰앙~

“좌로 1도! 이번에는 반드시 맞힌다.”

또 살짝 빗나갔다. 마인을 들고 무릎을 꿇고 앉았던 아시가루 하나가 폭발에 휘말려 죽었다. 사무라이들이 황급히 왜장에게 몰려와 어서 피할 것을 권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몸으로 막아 주군을 지키려는 의도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로 추정되는 왜장은 여전히 본진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진이 공격 직전이고 퇴각했던 왜병들도 다시 돌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다이묘가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 콰쾅!

“맞았다! 다 날아갔다!”

수병들이 함성을 질렀다. 본진 중앙에서 폭발이 일어나 가토 기요마사로 추정되는 왜장과 고위 가신단, 그리고 근습무사단인 하타모토(旗本) 수십 명이 한꺼번에 폭사했다. 왜장을 확실히 죽이기 위해 수병들이 같은 곳을 향해 포를 몇 발 더 쏘았다.

“잘했다! 이번에는 저쪽 나베시마 나오시게다. 쏴라!”

가토군의 본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베시마군의 본진이 있었다. 이민호는 당연히 그곳도 포격으로 초토화시키길 원했다.

그러나 수병들이 포를 돌리고 조준하는 사이에 나베시마는 호위하는 사무라이들에 의해 언덕 뒤로 이동해 버렸다. 그리고 민간인이 명백한 왜인들이 본진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포탄이 본진에 떨어졌을 때는 나베시마는 이미 사라지고 작업에 동원된 왜인들 몇 십 명만 죽었다.

들판에 늘어선 왜군들이 다시 공격 준비를 갖추었으나, 공격 명령은 내려오지 않아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사이에도 끊임없이 포탄이 날아와 폭발이 일어날 때마다 진영 한쪽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니 왜병들은 포탄이 터지고 동료들이 죽어가도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왜병들이 하릴없이 얻어맞고 있을 때 나베시마군의 본진 쪽에서 기마전령들이 여러 진영으로 달려갔다. 전령들이 사무라이대장급의 왜장들과 대화하더니 곧이어 왜군이 전체적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전사하고 고위 가신단도 전멸하자 지휘권이 확실히 나베시마군 쪽으로 넘어간 것 같았다.

왜병들은 진영을 갖춘 채 서쪽 마천령을 향해 퇴각했다. 전선에서 계속 함포를 쐈으나 왜병들은 보병방진을 풀지 않은 채 물러섰다. 포탄이 터질 때마다 희생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했으니 현대인인 이민호 입장에서 보면 아주 멍청한 짓 같았다. 그러나 이유가 있었다.

함경도 기병들이 일제히 추격전에 나섰다. 그러나 왜군 제2군은 나베시마가 여러 방진을 지휘하며 차근차근 퇴각했다. 기병들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면서 전과를 확대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오히려 추격하는 함경도 기병에서 희생자가 늘어나자 정문부는 기마병 전체를 물러서도록 지시했다.

포탄에 몇 발 맞더라도 기병에게 전체가 짓밟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베시마는 냉정하게 판단하고 실행에 옮겨 많은 왜병들의 목숨을 구했다. 이민호가 통나무를 걷어찼다가 발끝을 잡고 외발로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나 기동력이 빠른 함경도 기마병들이 활약할 공간은 많았다. 본진 쪽에 있다가 미처 도주하지 못한 하인과 상인 등 민간인 왜인들이 기마병들에게 포위돼 몰살당했다.

무기가 없다고 왜인들이 두 손을 들거나 엎드려 절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함경도 기마병들이 왜인들을 왜병 대하듯이 활을 쏘거나 환도를 내리쳤다. 대부분 조선 관군이나 의병들은 왜병들을 따라다니는 왜인들이 민간인이라고 구분하지 못했다. 구분하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마천령으로 이어지는 길 앞에서 후퇴를 멈춘 왜군이 다시 진영을 단단히 구축하고 있었다. 왜군은 다시 공세를 취할 수도 있다는 자세로 척후와 조총병들을 내보내 함경도 기병을 도발했다. 괜히 병사들에게 함성을 지르라고 시켜서 사기를 높이기도 했다.

간신히 이겼는데 이렇게 추격이 막히고 나니 이민호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기마병 300명을 끌고 가서 유탄 세례를 퍼부어주려 책성에서 나오는데 왜군 쪽에서 전령을 보냈다.

“전령이오! 카가노가미 나베시마님의 전령이오!”

함경도 기마병들 사이를 뚫고 등에 풍선을 지고 다니는 왜군 전령이 영동관 책성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이민호는 왜병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인 책성 앞으로 나가서 그 용감무쌍한 왜군 전령을 맞이했다. 호위병 20여 명이 주변을 감싸고 정문부도 따라왔다.

“무슨 일이냐?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너희들은 침략자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이 땅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아니 그 후에도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추격은 승리한 자의 당연한 권리, 저희 주군 카가노가미님은 그 권리를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가토 주계두(主計頭) 기요마사님의 시신을 인도해줄 것을 원합니다.”

“조선말 잘하네.”

왜군 전령의 조선말 실력에 감탄한 이민호가 북쪽 가토군의 본진을 살폈다. 아까 가토 기요마사가 폭사했을 때와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전군이 후퇴하는 중에 가토군 사무라이들이 가토 기요마사의 시신을 거두려다가 포탄에 떼몰살 당해 시신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사실 일본에서는 살아있을 때야 다이묘지 이미 죽은 시체 따위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같은 동양권 국가라도 시신에 부여하는 가치가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토군 사무라이들은 주군과의 의리 때문에 허망하게 목숨을 바쳤다.

“시신을 인도해주면 그 대가는 뭔가?”

“두 왕자 저하를 돌려드리겠습니다.”

“임해군과 순화군 말인가? 으음!”

왕위를 이어받지 못할 왕자들이 이 기회에 사라져준다면 조선 왕실 입장에서도 나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왕자가 포로가 된 것만으로도 국가의 체면이 이미 손상됐는데 만약 일본에 끌려간다면 이보다 망신은 없었다.

조선의 국가 체면에 관계된 일이라 이민호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자칫 정치적인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해줬다.

“왕자들은 안변에 있고 가등청정은 저곳에 있다. 왕자들을 모시고 오는데 며칠 걸릴 것이다. 지금 가등청정을 내준다면 너희들이 약속을 지킨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가토군의 고위 가신들이 인질이 되겠다고 자처했습니다.”

늙은 고위 가신들은 가토 기요마사가 위치한 본진 근처에 있다가 같이 죽었지만 실세를 가진 가신들은 단위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 무사 가신들이 인질을 자처할 정도로 가토 기요마사는 신하들에게 존경 받는 다이묘였다. 물론 이민호나 조선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적에게 사나우면서도 자기 부하들에게는 유독 잘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살아남은 놈들이 있었던 모양이군. 좋다. 시신을 넘겨주겠다. 너희들도 약속을 지켜라.”

“즉시 인질을 넘겨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시신도 너희들이 직접 수습해가라. 서류나 도장 같은 것도 필요하면 다 챙겨 가. 다만 가등청정이 쓰던 창은 남겨둬라. 그건 전리품이다.”

“전하께서 아량을 베풀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 주군도 고산국 국왕 전하의 배포에 감탄하실 것입니다.”

뜻밖에 왜군은 이곳에 이민호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정체도 알아보았다. 이민호는 등골이 약간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닌자가 조선이나 고산국에 와서 이민호를 암살할 일은 없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도노께서 훌륭한 후퇴작전을 구사하는 바람에 본작이 무척 아쉬워한다고 전해줘라.”

“저희 주군을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민호는 ‘이만 나오시게’라고 썰렁한 농담을 하지 못했다. 전령 사무라이가 인사를 마치고 기쁜 얼굴로 돌아갔다. 협상이 잘 진행된 것보다는 자기 주군이 칭찬받은 것이 더 기쁜 것 같았다.

이민호는 기마병들을 시켜 이미 무너진 가토군의 본진으로 향하는 사무라이들을 감시하도록 했다. 사무라이들이 찔찔 짜면서 가토 기요마사의 시신을 수습해서 왜군 진영으로 옮겼다. 몇몇 젊은 사무라이들은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걸었다.

다이묘가 전사하거나 대가 끊기면 그 다이묘를 모시던 사무라이들은 실업자인 낭인 무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무사 개인이 아닌 가문 단위로 몰락해서 이는 혈족집단 전체에 심각한 생존의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전투가 아무리 불리해도 무사들은 목숨을 걸고 다이묘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가토군의 사무라이들은 전쟁의 승패보다 중요한 주군의 목숨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 되었다.

오후에 몇몇 사무라이들이 영동관 책성에 찾아와서 이민호 앞에 무릎 꿇고 빌었다.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닌데 사무라이들이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좀 웃겼다.

물어보니 가토군 고위 가신들의 자제나 형제들이었다. 이민호는 그들이 부친 시신과 유품을 수습해 가도록 허락했다. 사무라이들 일부는 종군승을 불러서 화장을 하고, 몇몇은 시신을 말에 태우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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