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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77화 (126/1,000)

00177   25. 차가운 바다, 뜨거운 땅  =========================================================================

“대인! 가등청정과 강강자가미가 모든 군세를 이곳에 집결시킨 것 같습니다. 끝없이 몰려옵니다!”

“예. 많군요.”

이민호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정문부가 말한 것처럼 영동관 책성을 향해 몰려오는 왜병들이 등에 꽂은 깃발은 두 종류였다.

가등청정 외에 강강자가미(江江者加未)는 나베시마 나오시게, 즉 과도직무(鍋島直茂)가 가진 직함 카가노가미(加賀守)의 음차였다. 나베시마는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2군 소속으로서 1만 2천 군세를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가했다. 병사들의 군기를 엄정히 세우고 풍부한 전쟁 경험으로 아직 젊은 가토 기요마사를 도왔다.

고산국 기마병과 조선 기병들을 책성 남쪽으로 물리고 책성에는 해병 600명과 함경도 의병 중에서 보병 400명을 배치했다. 책성 자체가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온 반도 지형이라 200미터 폭의 한쪽 면만 지키면 되니 방어상 유리한 점이었다.

그러나 책성이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해 있고 성벽 대부분이 석성이 아닌 통나무로 얽어서 만든 낮은 목성이라 방어하기 불리한 점이 많았다. 길주성 정도만 됐어도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고산국 원정군이 강력한 함포와 총을 갖췄어도 적이 너무 많았다.

이민호는 전선 8척에 비상을 걸고 해안에 일렬로 늘어서서 함포를 쏠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전선에 남은 해병 400명이 갑판에 올라서 사격 준비를 마쳤다. 마치 성곽이 바다 쪽으로 늘어난 형세였다. 계복에게 함대 지휘를 맡겼으니 걱정은 없었다.

이민호가 지시해서 책성에 남아있던 아이누족 훈련병 50명을 서둘러 배에 태웠다. 그리고 단정을 물에 내려 대기시켰다. 혹시라도 책성이 왜군에 점령당할 것 같으면 의병들을 최대한 배에 태우고 물러설 작정이었다.

이때 서쪽 마천령 방향에서 고령첨사 유경천이 이끄는 기병들이 내려왔다. 숫자가 꽤 줄어들어 간신히 200기 정도 남아 이민호가 아까워서 속이 몹시 쓰렸다. 잠시 후 마천령 쪽에서 함경도 기병들을 쫓아 왜병 수천 명이 쏟아져 내려왔다. 결국 영동관 책성 북쪽에서 서쪽에 이르는 작은 들판에 1만 6천여 왜병들이 꽉 들어찼다.

기마병이나 의병이나 다들 꿋꿋이 서 있었지만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특히 정문부는 이민호에게 미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대인! 제 불찰로 좁은 지역에서 대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마천령 북쪽 작은 재를 지키지 못한 제 실책입니다. 죄송합니다, 대인! 저를 참수해서 군사들에게 경계를 삼으십시오.”

“포위당하면 어떻습니까? 배 타고 도망가면 되죠.”

정문부에게 대꾸해준 다음 이민호가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앞으로 내렸다. 배마다 탑재된 함포들이 불을 뿜었다.

- 퍼퍼펑!

3인치 함포의 최대 장점은 이 시대 다른 화포에 비해 사거리가 길어서 적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빠른 시기에 포격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군 화포가 최대 1000보까지 포탄을 날릴 수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3인치 함포는 천자총통이 아니었다.

전선 8척에서 쏘아대는 함포의 화력은 실로 가공했다. 대열을 갖추려던 왜병들 한가운데서 포탄이 터지자 왜병 수십 명이 한꺼번에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 콰쾅! 쾅!

조선 기마병의 돌격에 대비해 집결한 기마무사들 한가운데에서도 포탄이 터졌다. 밀집대형을 갖춘 기마무사들이 말과 함께 한꺼번에 쓰러졌다. 전선에서 함포가 끊임없이 불을 뿜어냈다. 책성에 배치한 지상전용 대포 2문에서도 포탄을 연속 발사했다.

“대포의 위력이 어마어마합니다. 대인! 적이 혼란에 빠진 지금 기병을 집결시켜 적진 중앙으로 돌입하겠습니다.”

“지금은 아니고 조금 있다가 그렇게 하시오. 적이 너무 많소. 마침 열을 지어 몰려오고 있소.”

정문부는 문관이면서도 병마 북평사를 맡았던 만큼 기병 위주의 공세적인 전술을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정문부가 돌격을 외칠 때마다 이민호가 매번 말려야 했다. 그러나 다른 함경도 무장들에 비한다면 겁쟁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정문부는 매사에 신중한 편이었다.

위력이 엄청난 포격을 당하면서 당황하던 왜병들이 한꺼번에 책성을 향해 돌격해왔다. 작은 책성에 빽빽이 들어선 해병들이 사격자세를 갖췄다. 전선에 탄 해병들도 옆에 탄약상자를 쌓아놓고 사격을 준비했다.

“쏴!”

- 타타탕!

이민호가 지시하자 전 병력이 일제 사격을 가했다. 실탄에 무연화약을 쓰는데도 하얀 연기가 책성 주위에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선두에서 가장 빨리 몰려오던 왜군 기마무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해병들은 말과 기마무사를 가리지 않고 쏘았다.

뒤이어 창병 대열과 좌우 조총병, 궁병의 대열이 천 명 단위를 갖춰 몰아쳐왔다. 이들도 조총 사거리가 되기 전에 해병들이 집중 사격을 가해 몇 개 단위를 몰살시켰다. 그러나 왜병들은 끊임없이 몰려왔다.

- 탕!

이민호도 목책 밖으로 총구를 내놓고 총격에 가담했다. 민희와 민영이 총구를 돌리면서 주로 이쪽을 향해 조총을 겨누는 철포병을 노리고 쏘았다. 목책에 배치된 해병 600명이 끊임없이 총탄을 퍼부었고, 의병들은 화살을 날렸다.

들판에서 등에 깃발을 매달고 달려오는 왜군은 별로 무섭지 않았다. 그저 총이나 함포의 표적일 뿐이었다. 그러나 일단 단병접전에 들어가면 왜병들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1605년에 에드워드 미셸본이 이끄는 영국 해적들도 왜구들과 칼싸움을 하면서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감동과 감불은 교대로 진출과 퇴각을 반복해라!”

“예! 도련님!”

이민호가 지시하자 먼저 감동이 기병 150명을 이끌고 책성 왼쪽에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왜병들에게 접근해 최대한의 화력을 한꺼번에 퍼부었다.

말을 탄 채로 달리면서 보병총과 기병총, 유탄을 쏘아대는 기마대는 고산국의 최정예 병력이면서 이민호의 자랑이었다. 왜병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이민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윽! 저런!”

왜군 대열에서 조총을 일제사격 방식으로 쏘자 고산국 기마병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낙마했다. 이민호가 아까워서 신음소리를 냈다.

감동을 비롯해 기마병들이 낙마한 동료들을 말에 태우고 돌아왔다. 평소 훈련할 때 이민호는 무기를 잃어도 상관없으니 반드시 동료만 살려서 돌아오라고 반복 지시했다. 기병총이든 유탄발사기든 끈으로 몸에 매고 쏘니 무기를 잃은 경우는 거의 생기지 않았다.

감동이 지휘하는 기마병들이 책성 뒤로 들어오고 이번에는 감불이 뛰쳐나갔다. 역시나 왜병들에게 타격을 가하고 예닐곱 명이 조총탄에 맞아 낙마했다. 방탄복을 입었으니 낙마한 기마병들이 다 죽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중상을 입고 무력화되었다. 말발굽에 밟힐 경우 답이 안 나왔다.

기마병들이 말에 싣고 온 부상자들을 인수받은 수병들이 단정에 태우고 노를 저어 제3 전선으로 옮겨 태웠다. 3선은 군의들이 근무하고 진료실과 병상이 갖춰진 병원선을 겸한 전선이었다. 대정 계급장을 단 간호병들이 군의들과 함께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고산국 기마병들을 따라 함경도 기병들도 공격에 가담했다. 300명 단위로 쏟아져 나간 기병들이 화살의 비를 왜군 대열에 쏟아 부었다. 역시나 조총탄이 빗발치듯 날아와 한 번 나갈 때마다 기마병들이 몇 명씩 꾸준히 쓰러졌다.

- 퍽!

이민호가 서 있는 곳 바로 옆 통나무에 조총탄이 박혔다. 그러나 이민호는 사선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 대신 민희와 민영이 이민호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 쾅!

책성에 들어와 있는 해병의 절반 정도가 총격을 하다 말고 수류탄을 던졌다. 왜군이 그만큼 목책에 바짝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에 대비해 각 대별로 쌓아놓은 수류탄 상자와 탄약 상자가 빠르게 소모되었다.

왜군 쪽에서도 뭔가 둥그런 것을 끈에 묶어 빙빙 돌리더니 책성 안으로 집어 던졌다. 색깔은 까맸지만 겉은 구리로 만들어 마치 요강처럼 생긴 포락, 또는 포락옥(炮烙玉)이었다. 왜병들이 도자기로 만든 작은 포락도 던졌다.

- 쨍강! 퍼엉!

이민호는 등에서 후끈한 감각을 느꼈으나 계속 사격하는데 집중했다. 왜병들이 목책 바로 앞까지 돌격해왔다.

“끼요오옷!”

왜장이 칼을 치켜들고 넘어오다가 의병이 찌른 창날에 배를 찔렸다. 왜장 뒤에 나타난 왜병이 장창을 높이 들었다가 그 의병에게 내리쳤다. 다른 의병이 활을 쏘아 왜군 창병을 쓰러뜨렸고,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이 활을 쏜 의병의 가슴을 피로 물들였다. 왜병들이 꾸역꾸역 넘어오고 있었다.

- 탕! 탕! 탕!

민희가 기병총을 연속 발사해 목책을 넘은 왜병들을 사살했다. 그러나 왜병들은 끊임없이 넘어왔다. 나중에는 목책을 도끼로 내리치거나 통나무끼리 연결한 밧줄을 끊어서 옆으로 치워버렸다. 왜병들이 몰려드는 중앙을 향해 해병들의 공격이 집중됐다.

- 콰쾅! 탕! 탕!

어쩐지 이민호가 위치한 책성 중앙 방향으로 공격이 집중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책성 좌측은 기병 천여 기가, 우측은 전선 8척이 화력을 쏟아 붓고 있었으니 책성 중앙이 화력이 가장 약한 편이기도 했다.

해병들은 의병들과 힘을 합쳐 목책을 넘어온 왜병들을 몰아내기에 바빴다. 이민호가 왜병들을 막기가 조금 버겁다 싶었을 때 지원 병력이 몰려왔다.

- 타타타탕! 쾅!

목책을 넘어온 왜병들이 순식간에 쓰러지고 목책 앞에 몰려든 왜병들에게 수류탄이 마구 날아갔다. 이민호는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을 확인했다. 감동에게 보내서 기마병으로 활용하고 있던 여진족 남녀 호위병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겨우 20여 명이었지만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주인님! 저희 왔어요.”

“왜 왔어? 감동이 하고 같이 있으라니까.”

시전부락에서 포로로 잡혔던 여자애들 중에서 열 명이 민희와 민영을 도와 호위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고산국 궁궐에서 시녀나 하급 관리로 일했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됐지만 벌써부터 여사님 소리 듣는 나름 엘리트들이었다.

여진족 남자애들은 기마병이나 호위병으로 일했다. 마카오에서 서양 학문을 배운 애들도 유학을 마치고는 대부분 군에 입대했다. 피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이민호가 받아들였다.

“깜둥이가 보냈어요. 주인님 걱정된다고요.”

“알았어. 빨리 쏘기나 해.”

호위대에게 자리를 비워주고 이민호는 한 걸음 물러섰다. 긴장이 풀린 이민호가 담벼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민희가 앞을 주시하는 사이 민영이 이민호의 등에 상처가 없는지 자세히 살폈다. 작은 파편 같은 것이 등 뒤에 잔뜩 박혀 있었으나 두꺼운 가죽 외투를 뚫지 못했다.

이민호는 간신히 한숨을 돌리고 주변을 살폈다. 목책을 넘어와서 죽은 왜병들이 수백 명에 달해 시체를 밟지 않고는 걸어 다니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넓지 않은 책성 바닥을 대부분 왜병들이 흘린 시뻘건 피로 적셨다.

목책 안에서 죽은 아군은 해병은 거의 없고 의병들이 대부분이었다. 해병들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은폐와 엄폐를 하면서 싸웠으나 의병들은 말 그대로 의기가 앞서서 싸울 때 몸을 가릴 줄을 몰랐다.

물론 해병들 중에서도 사상자가 나왔다. 눈에 보이는 전사자만 두 명이었고, 후송을 맡은 해병과 수병들은 부상자부터 들것에 실어 병원선으로 날랐다.

“적이 물러난다! 이겼다!”

“우와! 믿을 수 없지만 이겼다.”

의병들이 환희에 가득 찬 함성을 질러댔다. 이민호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왜병들이 등에 맨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해병들은 쉬지 않고 총을 쏘아댔고, 함포탄이 도주하는 왜병들을 뒤쫓았다.

- 두두두두두~

책성이 위기에 빠진 순간에도 인내력을 발휘해 방어에만 전념하던 함경도 기병들이 드디어 뛰쳐나갔다. 그리고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왜병들의 등짝에 창날을 박거나 곤봉을 휘둘러 머리를 깨고 지나갔다. 함경도 기병 천여 기가 비록 패주 중이지만 아직 일만 명 가까이 남은 왜군들을 몰아쳤다.

============================ 작품 후기 ============================

한 편만 더하면 북관대첩 끝납니다. 오전에 올리겠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여진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쉬고 내일은 연재하지 않겠습니다.

추석 잘 쇠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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