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76화 (125/1,000)

00176   25. 차가운 바다, 뜨거운 땅  =========================================================================

함경도가 워낙 추운 곳이라 포위 작전의 핵심은 길주성을 점거한 적이 땔감을 못 얻게 산으로 통하는 길을 막는 것에 있었다. 실제로 왜병들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습격을 받아 참수가 수십 급에 달했다.

그러나 왜병들이 아무리 추위에 약하다지만 건물이 여러 채 있는 성 안에 웅크리고 있고 반대로 정문부 군은 야외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자칫 동상에 걸려 전투력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가급적 빨리 전투를 끝내는 게 나았다.

한국전쟁 때 미국 언론들은 제1해병사단의 장진호 전투를 진주만 이후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꼽았지만 포위공격에 나섰던 중공군 9병단은 예하 7개 사단이 무력화됐다. 중공군 사상자 대부분은 전투 중이 아니라 미 해병대가 포위망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중에 동상에 걸려 발생했다. 함경도의 추위를 만만히 볼 수 없었다.

“이렇게 포위하고 있지만 왜적들이 성에 숨어서 저렇게 조총을 쏴대니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길주성을 무너뜨려도 되겠소?”

“예? 대인께서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이민호가 신호를 보내자 기마병들과 함께 온 수병들이 말 여러 마리에 나눠 실린 대포 2문을 다시 조립했다. 전선에 탑재하는 3인치 함포와 규격은 같으나 지상전에 사용하기 위해 포가를 경량화시킨 대포였다.

잠시 후 3인치 대포가 길주성의 성문 위 장대를 노렸다. 전각처럼 생긴 장대 아래에 남문이 있어 그곳에 왜군 조총병들이 가장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 쾅!

한 방 맞은 장대 전체가 흔들리고 기와지붕에 쌓인 눈이 처마 아래로 쏟아졌다. 그리고 몇 초 후, 다른 대포에서 쏜 포탄에 맞은 장대가 우르르 무너졌다. 왜군 조총병 십여 명과 다른 왜병들이 거대한 지붕에 깔렸다.

수병들이 대포 2문을 계속해서 발사했다. 포탄 몇 발에 남문 바깥 옹성이 무너지고 철판을 얇게 두른 성문은 단 한 방에 뚫렸다. 성문 좌우의 성벽 두 곳도 무너져 내려앉았다. 강력한 화력에 다른 이들이 모두 놀라 넋이 나간 사이 먼저 정신을 차린 정문부가 이민호에게 건의했다.

“무너진 성벽으로 기마병을 돌격시키겠습니다!”

“기다리시오. 정 평사의 기마병들이 적에게 돌입할 기회를 반드시 주겠소.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요.”

이민호가 대포를 가리키면서 정문부를 말렸다. 정문부는 조총보다 빨리 쏘는 대포를 잠시 지켜보더니 수긍했다. 수병들은 시간과 포탄만 충분하다면 길주성을 평지로 만들어버릴 기세로 꾸준히 대포를 쏘아댔다.

포격이 계속되는 동안 함경도 기병들이 길주성으로 돌격할 채비를 마치고 대기했다. 경원부사 오응태, 종성부사 정현룡, 고령첨사 유경천은 각자 거느린 기마병들이 섣불리 앞으로 달리지 못하도록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단속하고 있었다.

아직 포탄은 많이 남았다. 포격이 계속되는 동안 길주성의 남쪽 성벽이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다.

“와아아!”

갑자기 왜병들이 나타나더니 무너진 성벽의 잔해를 넘어왔다. 성 안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간 다 죽을 판이라 결국 참다못한 왜병들이 성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다. 길주성 남쪽에 조선과 고산국 기병 1300여 기가 있는데 돌격하는 왜병은 600여 명에 불과했다.

“제독총병관 대인! 왜적들이 나옵니다!”

“정 평사! 기병들은 아직 대기시키시오! 사격대형!”

남문 앞에 쭉 늘어선 고산국 기마병 300명이 총구를 수평으로 내렸다. 그리고 이민호의 사격 지시에 따라 기마병들이 연속 사격했다. 보병총 3발을 쏠 때 기병총은 6발을 쏘았다. 왜병들이 몰려있는 곳마다 유탄이 날아가서 폭발했다.

빗발치는 총격 속에서도 왜장들이 선두에 서서 왜병들을 이끌고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눈에 발목이 푹푹 빠져서 빠르게 이동하지는 못했다. 움직임이 느린 왜병들이 기마병들의 총격에 절반쯤 쓰러졌을 때였다.

“정 평사! 돌입시키시오!”

“예. 대인! 감사합니다. 돌겨어억~”

정문부가 이끄는 기병 천여 명이 300명쯤 남은 왜병들의 대형을 향해 돌진했다. 병력 절반 이상을 총격으로 잃은 왜병들이 중기병의 돌격에 대열 곳곳이 속절없이 돌파 당했다.

보병이 기마병에게 대열을 돌파당할 경우 그 후의 과정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함경도 기병들이 말 위에서 내려친 무기의 힘을 왜군 보병들은 감당하지 못했다.

게다가 함경도 기병이 왜군 보병보다 세 배 이상 많았다. 더욱이 진흙탕이 아닌 눈밭에서는 기병이 보병보다 훨씬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장창을 들고 눈밭에서 허우적거리며 도망가던 마지막 왜병이 뒤에서 달려온 기병이 내리친 곤봉에 맞아 쓰러졌다.

“이겼다~ 왜적들을 몰살시키고 길주성을 탈환했다!”

그 사이 정문부군 소속 보병들이 남문으로 들어가고 북문을 넘었다. 보병에 이어 기병들까지 난입해 왜병들을 소탕한 다음 길주성을 완전히 점령했다.

기쁨에 겨운 기병들이 길주성 주변 눈밭을 말을 타고 마치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길주성을 포위한 지난 며칠 동안 끔찍한 추위 때문에 고생한 것이 드디어 승리로 보상을 받는 순간이었다.

“제독총병관 대인께 보고 드립니다. 길주성 내외에서 왜병 650여 명의 수급을 베었습니다.”

“수고하셨소. 기마병들이 훈련이 아주 잘 되어 있었소.”

이민호가 정문부를 칭찬했다. 정문부가 이끄는 기병들 중에는 전쟁 전부터 함경도 기병으로 복무했던 군인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은 의병이었다. 함경도는 인구에 비해 땅이 넓어 먼 거리를 걸어 다닐 수도 없고 교통수단이라곤 말밖에 없었다. 삼남 지방과 달리 함경도에서는 마치 여진족들처럼 평소에도 말 타고 사냥을 다녔기에 기병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이민호는 함경도 기마병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정문부는 고산국 기마병을 더 부러워했다.

“고산국 기마병들은 왜적을 마치 벌레 잡듯 쉽게 죽이더군요.”

“무기의 힘이지요. 총을 수입하는데 돈이 많이 들었소.”

“저 총이 요즘 인기가 좋은 수군총의 원형입니까? 또 다른 총에서 포탄을 쏘는데 마치 비격진천뢰가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수군총의 원형 맞소. 이 통제사 대감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비슷하게 복제해냈지요. 저 작은 포탄은 화약의 힘으로 쏘아 보내는 질려포통이라 생각하시오. 신기전 중에도 화약의 힘으로 날아가서 터지는 비슷한 무기가 있지 않소?”

“대인 덕택에 이번에 새로 눈을 뜨게 된 것 같습니다.”

전장 정리를 마치고 일단 목책을 세워 길주성의 남문을 복구했다. 그때 단천군수 강찬이 보낸 전령이 정문부를 찾아왔다. 단천은 영동관에서 남서쪽으로 100리쯤 떨어진 해안지대인데 그 중간에 마천령이 있었다.

“단천을 공격하자고? 군수 입장에서야 고을을 탈환하고자 욕심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흐음!”

적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정문부가 고민에 빠졌다. 이민호는 정문부가 왜 그러는지 궁금해졌다.

“정 평사! 문제가 있소?”

“조금 있습니다, 대인. 청정의 군세가 흩어져 있긴 하나 주력은 함흥과 안변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다 합해서 2만이 넘는다는데 이 군세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마천령을 막을 계획입니다. 그럼 함경북도는 안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일단 영동에 가서 생각합시다.”

정문부가 승첩 장계를 써서 군관에게 들려 의주 행재소로 보냈다. 보내기 전에 장계초를 이민호에게 보여줬는데 정문부는 여러 곳에서 벌어진 전투들을 눈앞에서 보듯 매우 상세히 작성했다. 이민호와 합동 작전을 펼쳤다는 영동 전투만 이민호가 요구한 대로 대충 어물쩍 넘어간 느낌이었다.

이민호는 날이 저물기 전에 정문부군과 의병들까지 이끌고 영동으로 내려왔다. 의병들은 보병으로 싸우는 자들도 이동할 때는 말을 타고 다녀서 정문부군의 전체 기동력은 무척 뛰어났다.

영동에 도착하기 직전에 마천령에 보낸 척후가 말을 타고 달려와 보고했다. 영동에서 마천령을 넘으면 단천이 있었다.

“가등청정이 휘하 전 병력을 이끌고 단천에 도착했습니다. 내일 낮에 마천령을 넘을 것 같습니다.”

함흥에 나베시마군의 주력이, 그 남쪽 안변에 가토 기요마사군의 주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길주성이 포위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출발한 것 같았다.

“정 평사! 어떻게 하실 거요?”

이민호가 묻자 정문부가 한참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우린 기병이 주력이니 평원에서 싸우는 편이 좋겠지만 사실 승리는 산악지대에서 매복을 통해 더 많이 거뒀습니다. 당장 마천령으로 올라가 왜적이 넘어오기 전에 고갯길을 선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등청정은 2만이 넘는 군세를 이끌고 오고 있소. 우린 다 합해서 4천에 불과하오. 내 생각에는 바닷가로 유인해 함포로 쓸어버리는 게 좋겠소.”

“길주성을 무너뜨린 그 대포가 배마다 4문씩 있군요. 무섭습니다.”

장수들을 모아 회의를 연 결과 저녁을 지어 먹고 밤에 기병 일부가 마천령에 오르기로 했다. 아침에 적 선봉이 마천령에 올라오면 매복 공격했다가 영동으로 후퇴해서 평지에서 적과 싸운다는 전술이었다. 그 사이 밤늦게까지 영동관 책성을 수리했다.

함경도는 강원도처럼 도로 대부분이 바닷가 해안분지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백두산에서 시작된 고산준령의 마천령산맥이 동해까지 뻗어 있어 영동에서 단천까지는 해안분지의 평탄한 도로가 아닌 험준한 산길을 이용해야 했고 그 산길 정상에 마천령이 있었다. 마천령은 바다에서 거리가 10km가 넘어 함포 사격으로 지원해주지 못하는 곳이었다.

선실에서 잔 이민호가 아침에 일어나서 책성으로 나왔다.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간밤에 또 눈이 내려서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대인! 기뻐해주십시오. 고령첨사가 마천령 너머에서 왜적의 선봉대를 만나 쳐부수고 수급 60과를 베었습니다.”

정문부가 달려와 보고했다. 하필이면 밥 먹는데 수급 이야기를 해서 이민호가 간신히 구토감을 참으며 물었다.

“왜군은 얼마나 된답니까?”

“2만은 안 되고 1만 6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가등청정이 지휘하는 왜병들은 추위에 얼어 죽고 굶어죽고 의병에게 맞아죽고, 심지어 괜히 압록강 건너 노토부락을 공격하다가 패배해 여진족에게 떼죽음 당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풍신수길에게 오랑캐 땅은 조선의 2배 정도로 넓고 명나라로 진출하려면 타타르, 즉 몽골을 지나야 하므로 무리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오랑캐 땅에는 쌀은 안 나고 잡곡뿐이므로 군량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도 보고했다.

이민호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이틀 동안 그저 추위에 떨어야 했다. 고령첨사 유경천이 이끄는 기병 300기가 마천령에서 가토군을 이틀 동안이나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정문부가 유경천에게 웬만하면 퇴각하라고 전령을 보냈지만 아직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보고했다. 필사적으로 막을 필요가 없는데 유경천이 괜히 영화 <300>을 찍듯이 필사적으로 막는 것이 아닌가 걱정됐다.

영동관 책성 북동쪽 개천은 하류에서 둘로 갈라지는데 그 앞에 커다란 바위 두 개 위에 기다란 바위가 걸쳐져 있었다. 이민호가 하품을 하다가 물었다.

“바위가 특이하네요. 마치 문 같습니다.”

“예. 그래서 저곳 이름이 쌍포(雙浦)입니다. 여진말로 쌍가, 그러니까 구멍이라는 뜻입니다.”

“아! 지리지에서 읽었습니다. 이곳도 옛날에는 여진 땅이었지요.”

조선에서는 합포(合浦)라고 쓰고 합개라고 읽으니 쌍가를 쌍포라고 표기한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 바위 뒤에서 왜병 수천 명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저 뒤로 왜군이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적이 배후로 침투했다! 전투 준비!”

정문부가 다급하게 지시를 내렸다. 마천령이 있는 서쪽이 아닌 길주 방향인 북쪽에서 왜군이 몰려올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왜병들은 처음에 수백이었는데 수천을 넘어섰고 이제 1만 명을 훨씬 웃돌았다. 가등청정군의 주력이 틀림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