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3 25. 차가운 바다, 뜨거운 땅 =========================================================================
저녁에 아이누족 전사들을 배에 태우고 쓰가루해협을 지나는 동안 밥을 해서 먹였다. 한 판 거하게 전투를 한 데다 평소 먹던 것보다 맛이 좋은지 아이누족 전사들이 식판을 싹싹 핥아먹었다. 아이누들이 평소에 쌀밥을 먹기도 힘들지만 반찬에 들어간 소금 간이 식욕을 자극한 듯했다.
이민호의 지시에 따라 한 번씩 더 배식했다. 아이누들이 역시 다 먹어치우고 혹시 더 주나 하고 눈알을 굴렸다. 해병들이 측은하게 여겼으나 배탈이 날까봐 더 이상 밥을 먹이지 못했다.
아이누족은 예전에 수렵과 어업, 농업의 비중이 비슷했으나 요즘은 농업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요즘도 여전히 배를 타고 어업을 하기 때문에 뱃멀미로 고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이누족 전사들은 오늘 강력한 화력을 보여준 직할군 해병들의 통제에 잘 따랐다. 간수군과 달리 직할군 해병들은 고산국 원주민이나 백인, 흑인들과 자주 접해봐서 다른 인종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물살이 강하게 흐르지 않는 해안에 닻을 내리고 아이누족을 배에서 재웠다. 선실 배정도 못해주고 바닥에서 재웠는데 추운 줄 모르고 잘들 잤다. 승리에 들뜬 아이누족 몇몇이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것 외에는 사고 없이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하코다테 앞 바다에 도착했다. 하코다테는 아이누족 원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마다 불탔으나 혼슈 북단에서 가깝고 섬에 퍼져 사는 아이누족들과 교역하기 편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에 의해 금방 재건되곤 했다.
아침에 갑판에 몰려나온 아이누족 전사들이 바다에서도 하코다테를 알아보았다. 아이누들이 와진을 모조리 죽이고 우스케시를 불태우자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하코다테를 공격하고 싶다며 이민호에게 자기들을 배에서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우스케시, 즉 하코다테는 오다테와 달리 포격을 퍼부은 다음 안전하게 점령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아이누족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먼저 쇼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민호는 전선 8척을 모아놓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일본어 모르는 옥카요들에게 전해줘라. 고산국 왕이 우스케시를 손 안 대고 멸망시키겠다고.”
아이누족 전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총의 위력은 절감하더라도 높은 성벽을 공격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는 의견을 냈다.
“왕! 조총으로 쏴도 성벽에 숨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남자들이 우스케시를 공격하다가 죽었습니다.”
“방법이 있다. 그것을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다만 아이누들이 지금까지 우스케시를 통해 교역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저 성이 없어지면 와진들과 더 이상 교역을 하지 못한다. 내가 두 달마다 무기와 화약, 철제 농기구를 실은 배를 보내주겠지만 너희들이 불편할지도 모른다. 불편을 감수하고 우스케시를 공격하겠느냐?”
이민호가 아이누족 전사들에게 고산국이냐, 일본이냐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아이누족 전사들이 수군거렸다.
아이누 어부들이 일본인들에게 수산물을 팔지 못한다면 경제적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산국은 너무 멀어서 아이누가 잡은 물고기를 사줄 의향이 별로 없었다.
“교역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와진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와진과의 교역을 끊는 게 낫습니다.”
“맞습니다. 왕께서 철제 무기와 농기구를 저희들에게 정기적으로 팔아주신다면 와진과 교역을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다들 수염이 길어서 이민호는 마치 키가 큰 드워프들과 회의를 하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아이누족들이 자기들끼리 중구난방으로 떠벌였다.
“왕은 혼자서 오다테를 점령하고도 우리에게 전리품을 챙기도록 해주었다. 밥을 주고도 밥값을 받지 않았다. 공짜로 따뜻한 배에서 재워주기도 했다. 우리를 소중한 친구로 대한 것이다.”
“맞다! 왕은 우스케시를 멸망시키겠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가 왕에게 대답할 차례다. 왕은 우리의 친구다.”
결론이 났다. 일본인들은 아이누족들을 죽이고 멸시했지만 이민호는 적을 무찔러주고 공짜로 밥도 먹여주는 사람이었다. 애들한테 공짜로 사탕을 줬다는 소문이 퍼지자 호감이 더 커졌다.
이민호가 호수마을에서 여자애들한테만 사탕을 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절반은 남자 애들이었다. 이민호가 상상조차 못했지만 수염을 기르지 않은 아이누족 남자 아이들은 다른 지역의 아이들도 다 그렇듯이 귀엽게 생겼다.
“왕이시여! 우리는 왕을 우리의 친구로 생각하며, 와진들과 전쟁을 할 때는 지도자로 인정하고 따르겠습니다.”
“좋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선장! 하코다테에 포격 개시!”
드디어 아이누족들이 결정을 내렸다. 이민호도 이에 부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아이누족들에게 아직 가진 힘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전선 여덟 척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일렬로 늘어선 다음 하코다테 관에 포격을 퍼부을 준비를 갖췄다. 하코다테 관은 바다 쪽으로 튀어 나온 하코다테 산의 북쪽 기슭에 세워져 있었다. 하코다테의 영주는 조총병과 병사들을 바다 쪽으로 배치시켜 상륙전에 대비했다.
- 쿠쿠쿵!
“우아악!”
함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아이누족들이 굉음에 놀라 나자빠졌다. 겁에 질려 바다에 뛰어들려는 아이누족 전사들을 해병들이 간신히 붙잡은 경우도 생겼다.
차가운 바다에 빠지면 익사를 면한다 하더라도 저체온증으로 금방 죽어버릴 수 있었다. 한 번 겪어본 이민호의 등줄기에 진땀이 흘렀다.
- 콰쾅! 쾅!
하코다테는 성이 아닌 관이므로 천수각과 성벽을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누족의 공격에 대비해 방어용 구조물은 튼튼한 편이었다.
포탄이 직격할 때마다 성벽처럼 높은 담벼락이 무너지고 천수각을 흉내 낸 망루가 주저앉았다. 포탄이 터지면서 파편 폭풍이 성벽에 일렬로 늘어선 왜병들을 휩쓸었다.
“계속 쏴! 서 있는 건물이 없어질 때까지 잔해로 만들어!”
전선에서 함포를 열 발쯤 쐈을 때 하코다테의 모든 건물이 다 허물어졌지만 그 후로도 계속 포격이 이어졌다. 저 정도 포격을 받으면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믿기 쉽지만, 인간이란 생물은 의외로 생존력이 높았다.
“아직 절반은 살아있을 것이다. 해병이 선두, 아이누가 뒤를 따른다. 기마병은 배후에서 접근하는 원병을 차단하라.”
이민호가 명령하자 전선 여덟 척이 차례로 포구에 접안해 병력을 하코다테 시가지에 쏟아 부었다. 교역하러 하코다테에 온 아이누족들이 멀찌감치 물러서서 전쟁을 구경했다.
아이누족 전사들도 우르르 배에서 내렸다. 이들이 앞서가다가 조총에 맞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해병들이 선두에 나섰다.
- 탕!
- 타타탕!
선두에서 전진하던 해병 한 명이 왜군 조총병이 쏜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 그 직후 세 방향에서 쏜 총탄에 왜병이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아이누족 전사들은 아무리 왕의 병사라도 조총에 맞으면 죽을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닫고 약간 괴리감을 느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조총에 맞은 병사가 가슴을 붙잡고 일어선 것이다.
“아우~ 아파라.”
“조심해야지.”
아이누족 전사들은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물론 왕이 주술을 써서 병사들을 불사신으로 만들었다는 식의 미신을 믿지는 않았다. 조총의 탄환을 막는 장치가 군복이라 부르는 갑옷에 있음을 알았다.
“왕의 군대는 무적이다!”
“왕을 따르자!”
이민호가 듣기에 몹시 민망한 소리를 지르며 아이누족들이 해병을 따라 하코다테 관에 진입했다. 멀리서 구경하던 아이누족들도 상품 대신 창칼을 쥐고 전투에 가담했다.
역시나 하코다테 관의 잔해에 숨은 왜병들은 아직 많았다. 그러나 영주와 무사들이 이미 죽었는지 조직적인 저항은 하지 못했다. 상륙이 시작되고 겨우 10분 만에 30여 명의 중상자를 포로로 남기고 하코다테 수비군은 전멸했다.
이민호는 포로들을 아이누족 전사들에게 내주었다. 그들이 평소 교역을 하던 오다테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는 바로 왜병들의 목을 쳐서 창대에 꽂아 내걸었다.
“와아! 이겼다!”
싸움은 해병들이 다 했는데 기분은 아이누족 전사들이 내고 있었다. 이민호가 그들에게 물었다.
“오늘 싸움을 본 소감이 어떤가?”
“대왕의 위엄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앞으로는 대왕의 말씀을 무조건 믿고 따르겠습니다.”
“저희들을 보호해주소서! 다스려주소서!”
아이누족 전사 천여 명이 이민호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약간 부족했던 오다테에서와 달리 하코다테를 포격으로 쑥대밭을 만들고 나서는 이민호가 원하던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 배에 남아있던 해병들이 아이누족들이 고향 마을에 돌아갈 때 쓸 식량과 소금 등을 포대에 담아 나누어주었다. 대왕의 은전이라며 아이누족 전사들이 몹시 감격했다.
일본과의 교역로는 끊겼지만 아이누의 해산물 수출길이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었다. 온대의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가 있고 한대의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가 따로 있었다. 맛이 다른 만큼 잘 말리면 먼 곳에도 수출할 방법이 있었다. 이민호는 몇 가지 해산물 종류를 지정해서 고산국에서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몇 가지 건어물은 조선이나 명나라에 팔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며칠 전에 이민호가 해삼을 잡아서 말리는 방법을 가르쳐줬으나 아이누들은 그런 이상하게 생기고 맛없는 해산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말린 해삼 100마리에 농기구 두 개 또는 조총 하나와 바꿔주겠다고 약속하자 아이누족들이 해삼의 씨를 말릴 기세였다.
해삼을 500마리로 늘리고 나서야 적당한 가격에 도달했다. 해삼의 종묘를 키워서 바다에 뿌리지 않으면 조만간 멸종할 것 같아 이곳에도 종묘장을 만들기로 했다.
“왕이 이곳에 자주 들르겠다. 내가 직접 오지 않더라도 두 달에 한 번 정도 신하를 보내서 너희들의 어려움을 듣고 해결해주겠다.”
“감사합니다, 국왕전하!”
배가 떠나자 아이누족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전선들이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무릎 꿇고 있는 자들도 많았다. 이로써 아이누 섬은 고산국의 보호령에 포함됐다.
이민호는 풍신수길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국서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다. 하지만 사신을 보내면 풍신수길이 잡아 죽일 것이 빤하기 때문에 포로를 통해 보내기로 했다.
고산국에 유학을 가기로 한 청년들은 모두 기함에 태웠다. 전원 남자로만 50여 명이었다. 이들의 신분을 일단 훈련병으로 삼아서 김학에게 지도를 맡겼다.
김학은 서당 훈장을 해본 적이 있어서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청년들을 잘 지도했다. 김학이 며칠 배우지 않은 보병총을 능숙하게 분해 조립한 이후 아이누족 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김학이 조선말과 관습을 하나씩 차근차근 가르쳤다.
“그런데 애들은 뭐야?”
전선들을 서쪽으로 향하게 한 다음 선실로 돌아온 이민호는 깜짝 놀랐다. 수건에 싸여 있는 것이 처음에는 웬 털 많은 짐승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아이누족 여자아이들이었다. 민희와 민영이 애들을 목욕시켰는지 아이들의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민희가 말하길 어제까지만 해도 안 보였는데 배가 하코다테를 떠난 다음에야 아이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아마도 기함에 탔던 아이누족 추장들이 그 동안 숨겨놓았던 것 같다고 민희가 의견을 냈다.
“추장들이 주인님께 딸을 바쳤나 봐요. 저번에 추장들이 정식으로 딸을 주겠다고 했을 때 주인님이 거절했잖아요.”
“말도 안 돼! 돌아가서 돌려줘야겠다.”
“돌아가면 애들이 어떤 대우를 받겠어요? 그냥 받아들이세요, 주인님.”
민희와 민영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체념했다. 이민호가 앞으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일은 앞으로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지금 내 여자가 몇 명인데? 혼자서 감당 못해. 앞으로도 이런 경우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니 당장 영토 확장을 멈추고 싶어.”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으니 당분간은 계속 확장하거나 다른 나라들과 친교를 다져야 해요.”
“이런 꼬마 애들을 받아들이라고?”
“이런 애들은 일단 시녀로 궁궐에서 키운 다음 양녀로 삼아 공신에게 시집보낼 수도 있어요. 그렇게 하면 어느 쪽도 불만이 없을 거여요.”
“그 방법이 좋겠다. 처녀로 평생을 보내게 할 수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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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늦었네요. 죄송.
오전에 아마도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