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1 25. 차가운 바다, 뜨거운 땅 =========================================================================
전선 8척이 혼슈 북안의 해안 포구들을 불태우며 점점 동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꺾이는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다. 가끔 일본 영주들이 연합해서 세키부네 몇 척으로 도전했지만 모두 물 고기밥이 되었다. 영주들에게 병력은 아직 남아있더라도 조선과의 전쟁에 모두 징발돼서 싸울 배가 없었다.
며칠 지나 전선 8척이 혼슈 북단과 아이누 섬 남단 사이의 해협 서쪽 출구에 도착했다. 마침 태양의 남중이 가까워서 항해사와 항법사가 경도를 재는 사이 배를 잠시 대기시켰다. 밖에 나갔던 계복이 다시 함교로 들어왔다.
“11월 초인데도 춥지 않군요.”
“빨리 문 닫아! 얼어 죽겠다.”
아이누 섬, 북해도의 남서쪽 오시마 반도는 난류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도 춥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털옷을 입고 털모자를 쓰고도 함교에 난방장치를 가동시켰다. 민희와 민영은 덥다고 나가더니 함수 쪽 갑판에서 차가운 바닷바람을 쐬고 있었다.
“이 근처에 오다테 성이 있다고 했는데 안 보이네.”
“북서쪽 해안에 성읍이 보입니다!”
망루에 오른 무상이 바람소리에 지지 않을 큰 소리를 질렀다. 털옷을 입고 털모자에 방풍 고글까지 쓴 무상이 살을 에는 바람을 맞으며 망루에 올라가 있었다.
이민호는 영하에 갔을 때 모래바람을 맞던 것이 생각나서 방풍고글을 만들어 지금도 잘 쓰고 있었다. 미카 밑에서 일하는 해중국 해녀들이 쓰는 물안경보다 훨씬 쉽게 만들 수 있었다.
“영주가 있는 마을인데도 손바닥만 하네.”
이민호가 함교에서 어촌 마을보다 조금 큰 시가지를 살폈다. 오다테라는 바닷가 마을 중앙에 큰 목조건물이 서 있었는데 주변을 돌담과 목책으로 대충 두른 것으로 봐서 행정 건물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밑에는 시가지와 상점, 주택가가 형성돼 있었다.
아이누 섬 서남쪽 오시마 반도에서도 다시 서남부 지역 끝단을 오다테라고 불렀다. 예전에 이 섬에 일본인의 무역 거점을 뜻하는 다테, 즉 관(館)이 12개나 있었다가 1457년 발생한 코샤마인 봉기 때 대부분 불탔다. 그때 아이누인들의 반란을 진압한 무사 가문이 저 작은 지역을 근거로 아이누 섬 전체와 교역을 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나중에 가문의 이름을 따라 마쓰마에로 바뀐다. 그러나 이 지역 영주 가문 이름이 아직 가키자키였던 때였다.
오다테의 영주 가키자키 요시히로는 현재 군사를 이끌고 히젠 나고야 성에 가 있었다. 조선에 건너가지는 않았지만 도요토미에 의해 일단 참전한 것으로 인정받았고, 그 전에 독립된 영주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쌀이 생산되지 않는 지역이라 석고 수 없는 일개 도주 취급을 받았다.
이민호는 전선 8척을 오다테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움직이게 했다. 남서쪽으로 돌았다가 북쪽으로 항해해 오다테가 안 보이는 언덕 너머 북서쪽 해안에 정박했다.
그리고 단정을 통해 해병 600명과 기마병 300기를 상륙시켰다. 언덕길 양쪽에 병력을 배치한 다음 이민호가 직접 오다테 주변을 정찰했다. 계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누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들었는데 왜 저래요?”
“반란이 벌써 진압됐나? 뒤섞여서 사니 침투하기는 편하겠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오다테에는 아이누족과 일본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작은 관 아래 마을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이 있었다. 그 아래 포구에는 왜선 수십 척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이란카랍테! 안녕하십니까?”
아이누인들의 갑작스런 등장에 깜짝 놀란 해병들이 숲으로 총구를 겨눴다. 털옷을 입은 털북숭이 아이누인 여덟 명이 숲에서 나왔다.
아이누어와 일본어를 섞어 쓰는 아이누인들을 이민호가 불러서 대화했다. 등짐을 잔뜩 진 것이 오다테에 장사하러 가는 사람들 같았다.
“너희들은 뭐하는 사람들인가?”
“저는 북쪽 큰 호수 주변에 사는 작은 사냥꾼 마을인 포로토코탄의 추장입니다. 포로토코탄은 큰 호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순록 모피를 무역하러 오다테에 가는 길입니다. 처음 보는 복장인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이누족은 일본인에 비해 체구가 큰 편이고 오다테의 일본인들보다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매번 전쟁 때마다 형편없이 밀렸다. 조선인들도 왜군과의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밀렸으니 이민호가 할 말은 없었다.
온몸에 털이 많고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높은데도 이들은 백인 계통이 아닌 고아시아족으로 분류됐다. 피부색은 진한 편인데 원래 피부색인지 아니면 햇빛을 받아서 그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고산국의 국왕이다. 일본과 전쟁을 하러 왔다.”
“국왕이요? 혹시 오다테의 영주님이나 류큐 상인들의 두목하고 비교하면 누가 높습니까?”
“내가 훨씬 높다. 내 부하가 만 명, 그러니까 백 명 부대를 백 개나 갖고 있다.”
“와! 와진(和人)들을 바다에 쓸어 넣어버릴 수도 있겠군요.”
이 아이누족 추장은 일본인들과 무역을 하고 있으면서도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민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인들 때문에 지금까지 아이누족이 숱하게 죽었고 이민호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학살당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동족을 팔아먹는 자들이라면 대화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왔다. 아이누족이 일본인과 전쟁 중이라고 들어서 급하게 왔는데 아무 일이 없으니 어떻게 된 건가?”
“지금도 전쟁 중입니다. 여기서 북쪽 사흘 길에서 많은 일본 무사와 아주 많은 옥카요, 그러니까 우리 종족 남자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전쟁이고 장사는 장사지요. 저도 무역을 마친 다음 부족민들과 함께 전쟁하러 갈 겁니다.”
아이누족은 아직 철기를 다룰 기술이 없으니 일본의 철제 기구를 절실하게 원했다. 그러나 아이누족이 팔 만한 물건은 물고기와 모피뿐이니 일본에 일방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역 구조였다.
“류큐 사람들을 아는가?”
“물론입니다. 그분들이 작년하고 올해 조총과 무기, 농기구를 가져 왔습니다.”
“혹시 어떻게 결제하는가? 그러니까, 뭘로 얼마나 바꿔주는가?”
“쇠로 만든 농기구나 조총을 받고 모피와 사금을 줍니다. 올해는 류큐 사람들이 조총을 많이 가져와서 모피가 부족해서 사금을 많이 줬습니다.”
“사금이라고?”
이민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민호는 작년에 류큐왕국에게 아이누족을 지원해주라고 부탁하면서 경제적 혜택을 몇 가지 주었다. 그러나 교환 대가로 금을 받는다면 류큐 상인들이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멀리 북동쪽 바닷가 근처 강바닥에서 누런 사금이 납니다. 불에 녹이거나 두들겨서 간단한 도구를 만들 수 있지만 철보다 약합니다. 류큐인과 일본인들은 사금을 아주 좋아하더군요.”
“나도 금을 좋아해. 교환비율, 그러니까 어느 정도씩 바꾸는가?”
“와진들은 사금 한 덩이, 또는 좋은 모피 두 벌에 쌀 한 석을 줍니다. 류큐인들은 쌀 두 석을 줍니다. 그래서 류큐인들에게 사금을 팔려고 하지만 일 년에 한 번만 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바가지를 씌우다니! 나는 쌀 다섯 석을 주겠다! 더 자주 오겠어. 조총 값은 어떻게 치루지?”
사실 류큐 상인들은 아이누족과 교역하기 위해 배 두세 척을 일 년 내내 묶어놓은 셈이었다. 봄에 남풍을 타고 가서 교역하고 가을에 북풍을 타고 돌아가야 하니 자주 올 수 없었다. 이 당시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 상인들도 마찬가지였으니 계절풍을 타고 다니는 범선들의 한계였다.
“보통 이 정도 크기 열 개를 원하더군요.”
아이누족 추장이 주먹만 한 금덩이를 이민호에게 보여주었다. 최소 열 냥은 될 것 같은 크기였다. 조선 같으면 백미 100석은 줘야 할 양이었다.
“조총은 주먹만 한 사금 열 덩이에 삽니다. 일본인들이 조총을 절대 안 팔아서 류큐 상인들에게서 삽니다. 화약은 작은 나무통 한 통에 사금 다섯 덩이입니다. 그래서 큰 부족에서나 조총을 몇 개 쓰지 저희 같은 작은 마을에는 딱 하나 있습니다.”
“씨발!”
이민호 입에서 조선도 아닌 한국식 욕이 절로 튀어 나왔다. 아이누족을 진작 신경 썼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무슨 뜻입니까?”
“아니. 좋다고. 앞으로 일본인이나 류큐 상인들보다 두 배 이상 줄 테니 사금은 무조건 나하고 교환하자.”
“역시 듣던 대로 다른 지역에서는 금이 비싼가 보군요. 금은 너무 물러서 장신구밖에 못 만드는데도 비싸다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반짝이는 장신구로 쓰니까 많이 비싸지. 다만 여기에 자주 오기 힘들어. 너무 멀고 위험해.”
“맞습니다. 류큐 상인들은 일 년에 겨우 한 번, 배 두 척에서 세 척이 옵니다. 그래도 류큐인들 덕택에 우리 종족 남자들이 쇠로 만든 창과 칼을 갖췄고 조총도 몇 개 생겼습니다. 덕택에 와진들이 남쪽으로 많이 밀려났습니다.”
그래도 류큐 상인들을 이곳에 보낸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가키자키 가문은 기어코 도요토미에게서 아이누와의 독점적 교역권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물론 아직은 교역권 수준이고 아이누족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는 단계이니 이민호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일본 역사에서 홋카이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것은 에도 막부가 끝난 메이지시대였다.
“저 배에 쇠로 만든 창칼, 철제 농기구, 면포, 쌀과 소금이 아주 많다. 이 구슬은 어때?”
“포로 피리카!”
“무슨 뜻이야? 일본어로 말해봐.”
“크고 아름답습니다. 어느 여자라도 넘어오겠군요. 그 영롱한 구슬을 저한테 파십시오! 같은 무게의 금과 바꿉시다! 아니면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이민호가 나중에 아이누족 여자들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여자들은 입 주변에 문신을 새기고 원색의 둥근 돌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엮은 목걸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여자들 입 주변 문신은 입이 찢어진 모양인 조커의 빨간색 분장을 검은색으로 바꾼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여자? 추장 나이가 60 넘지 않았나?”
“저 겨우 스무 살입니다. 수염이 길어서 일본인들이 착각하는 경우가 많더니 왕도 착각하시는군요. 수염은 남자의 상징입니다. 왕은 수염이 나지 않았군요. 하하!”
“각자 다른 모양의 구슬 세 개를 주겠다.”
“여기 있습니다!”
이민호가 아이누족 추장에게 구슬 세 개를 내밀자 추장이 주먹만 한 금덩이를 넘기면서 구슬을 빼앗듯 받아갔다. 이민호와 추장 둘 다 만족한 교환을 마친 다음 좋아서 입이 찢어질 정도였다.
전쟁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황금에 눈이 뒤집힌 이민호는 일단 장사부터 하기로 결정했다. 전쟁이 있어야 조총이 더 비싸게 팔릴 거라는 얄팍한 생각도 들었다.
“당장 너희 마을로 가자. 너희들이 원하는 물건을 얼마든지 팔아주마. 주변 다른 마을 사람들도 불러라.”
아이누족 8명을 배에 태우고 북쪽으로 항해했다. 아이누족 추장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더니 하루 동안 어느덧 400km나 항해했다. 진작 걸어서 열흘 거리라고 말했으면 더 좋을 뻔했다.
아이누족 마을에 도착해 본격적인 교역을 시작했다. 쌀과 소금, 철제 농기구와 조총, 화약을 팔고 사금과 모피를 대금으로 받았다. 소문이 나서 멀리서도 포로토코탄 마을로 찾아왔다.
가격은 아이누족 사이에 통용되는 가격의 절반을 불렀다. 그래야 주변 아이누족들이 당장 필요가 없더라도 사금과 모피를 총동원해서 상품을 살 것이고, 이익을 얻으며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결정했다.
특히 여러 가지 색을 넣은 유리구슬이 아주 대박을 쳤다. 이민호는 야인 여진에는 나중에 팔더라도 여기서 최대한 사금을 많이 확보하려 했다. 이민호를 따라다니며 장사꾼 역할도 많이 해본 해병들에게 판매를 맡겨 놓고 이민호는 아이누족에게 조총과 승자총통 사격 연습을 시켰다.
“승자총통이라는 건 탄환 수십 발을 한꺼번에 쏘는 거야. 자루를 겨드랑이에 단단히 끼우고 대충 앞을 겨눈 다음 쏘면 돼.”
- 파앙!
“좋아, 좋아.”
승자총통을 처음 쏴본 아이누족이 강한 반동으로 인해 땅바닥에 나뒹굴었지만 위력은 충분히 입증했다. 앞에 표적으로 세워둔 허수아비가 누더기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