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8 25. 차가운 바다, 뜨거운 땅 =========================================================================
25. 차가운 바다, 뜨거운 땅
삼도수군 통제영이 절반쯤 한산도로 이동해서 이제는 더 이상 통제영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전라좌수영 여수로 돌아왔다. 매번 개선할 때마다 그렇지만 수군에서 복무하는 가족을 마중 나온 백성들로 경강 포구와 수영성 주변이 북새통을 이뤘다.
소포는 여전히 피난민들과 장사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해동상단 대방이 분점 사무실에서 이민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이 계속돼도 이민을 가지 않던 백성들이 도련님이 연이어 올리신 승첩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번 달에는 지난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고산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거 참 희소식이군요.”
이왕이면 더 강한 자에게 보호를 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었다. 그래봤자 한 달에 겨우 몇 천 명 수준이라 기대한 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이민호는 이럴 때마다 왜군이 조선에서 마음껏 설치도록 내버려둬서 유민을 대량으로 발생시킬까 고민하곤 했으나, 마음이 약해져서 그만 두었다.
“하지만 조정에서 견제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원군을 위한 지공을 절반 정도 대신해준다는 식으로 조정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명나라 군대가 병참을 상인들에게 의존하고 있는데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부터 병참지원이 곤란해질 것으로 요동도사와 조선 조정에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백성 얻자고 쓰는 돈이니 아끼지 마시오. 그런데 왜 자꾸 통제영에서 돈을 벌어오는 거요? 대방! 오늘 한 번 따져봅시다.”
“그, 그게. 도련님!”
어떻게 된 일인지 이민호가 분명히 통제영을 무상으로 무한 지원하라고 해동상단에게 지시했는데 오히려 돈을 벌어 와서 대방이 곤란하게 됐다. 전라좌수영에서 지난 일 년 동안 간척지와 천일염전을 충분이 넓혀서 여기서 나오는 자금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철광산을 아직 개발하지 않은 고산국에 꾸준히 철을 수출하기 때문에 전쟁 비용이 부족하지 않다고 한다. 수영의 봉산동 철장뿐만 아니라 좌수영에 소속된 5관 5포에서도 철을 여유 있게 만들어 고산국에 수출하고 있었다.
여기에 통제사 이순신이 필요한 물품은 반드시 은이나 면포를 주고 사서 쓰기 때문에 딱히 해동상단이 물품이나 자금을 지원해줄 것도 없었다. 다른 수영이나 병영에는 무료 또는 외상으로 군수품을 지원하는데 반해 전라좌수영에는 돈을 받고 파니 이민호가 대방과 분점주에게 자꾸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퍼주고 싶어도 퍼줄 방법이 없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통상께서 능력이 워낙 출중하니 도와드릴 방법이 없구려. 수군들 돌아갈 때 양식이나 넉넉히 챙겨주시오.”
“통제영에서 나온 이익금을 수군들에게 노자로 쓰라고 나눠줬습니다. 내륙 지역의 물품 유통을 위해서라도 산골 수군들이 은이나 면포를 가지고 집에 가는 편이 좋습니다.”
“잘하셨소.”
서류를 보니 나눠준 돈이 노잣돈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 년 내내 전쟁에 동원된 수군들이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했을 테니 경제적인 보상이 필요했다. 이들이 가진 은과 면포를 노리고 중소상인들이 쌀과 소금을 내륙 깊숙한 곳까지 운반해준다면 더욱 좋았다.
“그런데 도련님! 여진족에게서 말을 사신다고 하셨습니까?”
“경상우병사 이 양반이 이상하게 싸우는 바람에 말이 계속 필요할 것 같소. 만리장성 인근에서 마시(馬市)가 열린다면서요?”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싸우는 방식은 전에 없던 것이 아니었다. 창의 숲을 향해 전마를 전속력으로 몰고 가서 말의 몸으로 밀어버리면 창병들은 못 막는다. 일반 말은 겁이 많아서 못하더라도 훈련된 전마는 가능했다. 말에게는 미안하지만 확실히 기병이 덜 죽게 되는 방법이었다.
물론 보통은 보병방진에 돌입하기 전에 충분히 활을 쏴서 와해시키는 전술을 썼고, 활 사거리가 조총보다 길다고 알려져 있는 지금도 그 방법이 나았다. 하지만 조선에서 각궁의 우세한 사거리를 이용할 만한 넓은 전장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순과 청하 등 네 곳의 관에서 마시가 열립니다. 특히 심양 동쪽 무순에서 가장 활발하게 마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건주여진의 새로운 본거지인 흥경 바로 서쪽입니다.”
“몽골은 너무 멀고 여진에서 사야겠소. 요동지역 구경도 할 겸 내가 직접 가보겠소.”
“3년 전에 건주여진을 누르하치가 일통한 이후 요동 지역의 정세가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도련님께서 직접 가시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런 사소한 일에는 저희들을 부리십시오.”
“그렇다면 해서여진에게서 사면 될 거 아니오?”
“해서여진은 몽골 혼혈이 다수 섞였고 예전부터 명나라에 적대적인 경우가 많아서 명나라에서 일부러 건주여진을 밀어줬습니다. 무순 바깥은 건주여진의 영역입니다. 해서여진에게서 말을 사기는 더 어려울 겁니다.”
“급한데 아무한테서나 사면 되는데 말이오.”
“마시무역은 유효하니 명나라 상인들도 아직까지는 건주여진을 통해 말이나 모피를 사고 있습니다.”
“유목민이라 말을 많이 키우나 보군요.”
조공무역은 명나라가 필요에 따라 주변국 또는 세력에게 부여하는 특혜였다. 토목보의 변으로 역사적 규모의 망신을 당한 영종 정통제의 원정도 마시 무역에 불만을 품은 오이라트의 에센이 산서성을 공격한 것에서 시작됐었다.
“건주여진은 유목민이 아닙니다. 옛날과 달리 지금은 여진족 전체가 유목보다는 수렵과 농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은 비옥해도 기후가 나빠 식량 자급을 못하고 있습니다. 여진족은 명나라와 계속 무역을 해야 생활이 가능해서 무역 의존도가 무척 높습니다.”
“수출입 상품은 뭐가 있습니까?”
“말과 인삼, 모피와 진주를 명나라에 수출하고 쌀과 소금, 면포와 철제 농기구를 수입해 갑니다.”
여기서 인삼은 산삼인데, 어울리지 않는 품목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작고 반짝이는 것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물건이었다. 돈 벌어주는 물건이라 이민호도 아주 좋아했다.
“진주라고요?”
“송화강에서 민물홍합을 양식해서 진주를 생산한다고 들었습니다. 건주여진이 아니라 야인여진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야인여진에서는 진주를 품을 확률이 높은 민물홍합을 양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종패에 인공적인 핵을 심어 인공진주를 생산하고 있었다. 담수진주는 반구형이거나 타원형이며 알이 잘고 해수진주에 비해 광택이 떨어졌다.
“가만! 건주여진은 압록강 건너편 낮은 산악지역에 웅거하고 있소. 말을 대량으로 키울 만한 곳이 절대 아니오. 주변에 대수림도 없고, 산악지대에서 모피를 얻을 곳이 있다지만 대부분 낮은 곳이라 얼마나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인삼은 백두산에서 캐겠구려. 아니! 장백여진 4부가 사는 곳이라 건주여진이 갈 곳도 아니오. 진주는 야인여진에서 수입하고. 그럼 도대체 건주여진에서 생산하는 것은 뭐요?”
“그, 그것이.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보니 건주여진이 중개무역을 하나 봅니다.”
“건주여진이 상업을 하는 족속이란 말이오? 그거 뜻밖이구려.”
여진족 정복자로만 생각했던 누르하치가 실은 상업적 수완이 뛰어나다는 이야기였다.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25세에 얻은 8명의 부하와 무역을 허가하는 명나라의 칙서 30장을 갖고 세력을 불려나갔다.
그 칙서는 부친과 조부가 명나라 군사에게 오사를 당하면서 이성량에게서 보상으로 받은 문서였다. 1580년대 초반 해서여진 하다의 부족장은 칙서 1000장을 손에 넣고 칸을 칭하기도 했으니 누르하치가 칙서를 많이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민호가 대방과 대화하는 중에 조용히 서 있던 민희가 나섰다.
“무역도 하지만 건주여진의 주요 수입원 중에 약탈이 있어요. 주변 약한 부족들을 공격해 전리품을 챙기거나 공물을 받아요. 복속된 부족 사람들을 병사로 동원하면서 서서히 흡수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경제구조가 무척 취약하겠네. 명나라에서 건주여진을 망하게 하려면 3년이면 되겠는데? 무역만 못하게 해도 망하겠다.”
명나라가 실제로 건주여진에 무역금지 조치로 경제적 압박을 가했을 때 치명적인 손실을 입은 건주여진은 그 이듬해 1616년에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에게 선전포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 몇 십 년 동안 명나라와 전쟁을 하면서도 건주여진이 망하지는 않았다. 건주여진은 무역이 막히자 대규모 농지 개간을 통해 위기를 넘겼다.
만약 명나라가 마음먹고 고산국을 망하게 하려면 교역 중단 1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심각한 무역의존도로 인해 건주여진보다 더 취약한 곳이 고산국이었다. 물론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당장 돈이 된다고 산업기반을 무시하고 중개무역에만 치중하다가는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처럼 경제위기를 맞아 뿌리째 흔들리기 쉬웠다. 그래서 이민호도 국내에 경제 기반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식량 자급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 강한 건주여진이 3년 만에 망해요? 설마요.”
“산적한테 화전만 일궈서 먹고 살라고 하면 굶어죽지. 요동으로 가려고 했는데 차라리 두만강 너머로 가는 게 낫겠다. 민희와 민영은 그쪽 지리 잘 알아?”
“여자가 마을 밖으로 돌아다닐 일은 없잖아요.”
“말은 잘만 타면서.”
통역하고 여진족 관습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민호는 지금은 사라진 민희와 민영의 고향에 가보기로 했다. 북병영 군사들에게 공격당한 마을 말고도 시전부락에 속하는 몇몇 마을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부락에 흡수된 것 같았다.
“대방은 무순의 마시를 통해 전마로 쓸 말을 사오시오. 전마 천 마리는 제주도에, 천 마리는 통제영에, 5백 마리는 경상우병영에 보내고 나머지는 되는 대로 구해서 고산국 승마보병에게 넘길 계획이었는데, 늦춰야겠소. 일단 500마리만 사서 경상우병영에 넘기시오. 운송수단이 부족하지 않겠소?”
“예. 이번에 수군이 돌아오면서 대형 외륜선에 여유가 있습니다. 전마 500마리는 명나라 상인을 통해 입수하겠습니다.”
상단 대방이 명나라 상인인 척하고 무순에서 무역을 할 용기는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여진족이 파는 말 값은 조선에 비해 훨씬 싼 편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조정에서 허락을 받아 압록강이나 두만강에서 말을 무역한다면 국내가격의 10분의 1에 살 수도 있었다.
이번 무역은 명나라 제독총병관인 이민호가 사서 경상우병영에 넘길 말이라서 어느 나라 소관인지 애매해졌다. 명나라 관리에게 임검을 받을 경우에 대비해서 이민호가 이끄는 고산국 병력에서 사용할 말을 구매한다는 증서를 대방에게 써주었다.
“민희는 다른 부족 사정을 좀 알아? 야인여진이라면 말을 별로 안 키우겠지?”
“부족민들이 쓰기에 말이 부족하지는 않을 거여요. 하지만 팔 수량은 안 될 테니 야인여진에게 해서여진에서 말을 사라고 해서 그것을 사세요. 해서여진은 건주여진과 사이가 안 좋은데도 지금은 명나라에 말을 팔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건주여진에 말을 싸게 팔고 있어요. 야인여진을 통해 해서여진의 말을 사면 무순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싸게 살 수 있을 거여요. 부족하면 몽골에서 사서 수량을 맞춰줄 거여요.”
야인여진은 동해여진이라고도 불린다. 두만강 북쪽부터 송화강 유역까지 넓게 퍼져 살아서 단합하기도 힘들고 여진족 중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적었다.
“그렇군. 참! 고산국에서 온 서신 좀 읽겠소.”
“여기 있습니다, 도련님.”
고산국에서 혜영이 보고한 내용은 주로 필리핀과 해남도 개발에 관한 것들이었다. 옥남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특히 려족이나 묘족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옥남은 운남성에 소수민족들이 많이 사는데 그들과 무역을 하면서 우호관계를 다지는 것이 어떨지 문의하기도 했다. 이민호는 즉각 답장을 써서 이익이 나지 않더라도 소수민족들과 무역을 추진하도록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