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3 24. 진주성 전투 =========================================================================
다음 날인 10월 5일 새벽에 수군이 대마도로 떠나고, 고산국 원정군도 이른 아침식사를 마친 다음 진주로 행군했다. 보급수레가 100대쯤 동원돼서 행군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사천에서 진주까지의 길은 양쪽에서 포위공격 당하기 딱 좋은 계곡 지형이었다. 그래서 발 빠른 흑인 보병들을 주변 산꼭대기에 보내 매복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전진했다.
원정군은 점심때쯤 진주성 남쪽, 남강 건너편에 도착했다. 진주성을 반쯤 포위하며 압박을 가하고 있던 왜군 1만여 명이 원정군의 등장에 놀라 많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민호는 강 건너에서 왜군들이 지켜보는 중에 대놓고 진채와 임시 가교를 건설했다.
진주성을 지키던 군사들과 백성들이 촉석루 쪽으로 나와서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성 바깥에서 성원하는 의병들 말고 최초로 제대로 된 원군이 진주성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휘관은 조건 없이 백성들에게 베풀기로 유명한 이민호였고, 군사들은 대부분이 무시무시하기로 소문 난 총병이었다.
고립무원이라고 여겼던 진주 백성들이 기뻐 날뛰는 중에 진주목사 김시민이 남강에 배를 띄워 이민호를 초청했다. 이민호는 계복에게 진채 건설을 맡기고 배를 탔다. 남강을 건너서 바위를 지나 계단을 오르니 작은 문루에서 김시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애공 합하(閤下)!”
“오랜만입니다, 김 목사.”
“불과 석 달 전에 이곳에서 지사 대감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천조의 황제폐하께 공작을 제수받으시고 명나라 제독총병관 대인으로서 다시 진주성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되실 줄은 저는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판관에서 바로 목사로 승진한 분도 여기 계시지 않소?”
이민호와 김시민이 오늘부터 격전의 현장이 된 진주성 동문으로 향했다. 북장대와 서장대가 높은 언덕인데 반해 동문은 유일하게 평지성이라 왜군의 공격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진주성 남쪽에는 진주 남강이 흐르고 있어서 소수의 병력만 방어를 맡았다.
“동문이 가장 취약한 곳입니다. 그래서 예비병력을 집중시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대감, 아니 대인께서는 성 안에서 싸우실 건지요, 아니면 성 밖에서 성원하실 건지요?”
“총병 1200을 임시로 김 목사에게 배속시키고 나는 성 밖에서 기마병을 거느리고 성원하겠소. 유사시에 언제든 들어올 테니 다리를 잘 지키시오.”
이민호는 간수군 600명을 평지성인 동문에 배치시키고, 북장대와 서장대에 해병 100명씩 배치시켰다. 나머지 해병 400명은 예비 병력으로 삼아 어느 곳이든 지원할 수 있도록 중간 위치에 두었다. 이민호와 김시민이 남강에 접한 촉석루로 돌아왔다.
“고맙습니다. 왜적들을 무수히 때려잡았다는 그 유명한 총병들을 지원해주셔서 무척 든든합니다. 의병들은 아무리 설득해도 성 안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을 죽을 자리로 알더군요. 이해해야지 어쩌겠습니까?”
김시민은 의도적으로 간수군과 고산국 조선 원정군을 구별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군 입장에서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임금이나 조정 대신들도 이렇게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이때 동문을 지키던 부대의 전령이 말을 타고 뛰어왔다. 촉석루에서 동문까지는 가까운 거리인데도 3보 이상 거리면 무조건 말을 타고 달리는 훌륭한 전령이었다.
“영감! 경상우병사의 전령이 와서 성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병영 군사들이 입성하고자 합니다!”
“우병사가 오셨어?”
이민호는 김시민과 함께 동문 장대로 올라갔다. 저 멀리 동쪽에서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성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진주성 공격을 멈추고 잠시 쉬고 있던 왜병들은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조선군에 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경상우병영군은 기병과 보병이 한 덩어리가 되어 앞을 가로막는 왜병들을 활로 쏘고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어 붉은 피가 흐르는 길을 만들어냈다.
그 사이 성문 밑에서 경상우병영 소속 전령이 계속 소리를 질렀다. 이 전령도 왜군들의 포위망을 단기필마로 뚫고 들어온 사람이었다. 진주성을 포위한 왜군이 어쩐지 조선군을 닮았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김 목사 영감! 어서 문을 열어주시오! 왜군이 우병영군을 바짝 뒤쫓고 있습니다! 이러다 다 죽습니다!”
“으음! 주장이 바뀌면 명령체계에 혼선이 생겨 패하기 쉽다는 것이 제가 오랫동안 가져온 소신입니다.”
원래 역사에서는 김시민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아 경상우병사 유숭인은 성 밑에서 전사하고 우병영군도 전멸한다. 그러나 김시민은 갈등하고 있었다. 관직이 더 높은 이민호가 이미 입성했으니 경상우병사의 입성을 거부한다면 논리적으로 허점이 생겼다.
물론 진주목사 김시민의 직속상관은 경상우병사였고, 이민호에게는 김시민에 대한 지휘권이 없었다. 고민하는 김시민에게 이민호가 쐐기를 박았다.
“남강에 다리가 걸려 있고 강 건너편도 아군이 단단히 지키는데 무엇이 걱정이오? 우병사가 병력을 이끌고 입성한다 해도 지휘권 문제는 절대 없을 것임을 내가 보증하겠소. 경상우병사 휘하의 보병은 김 목사의 지휘 아래에 두고 절도사와 기병은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가서 싸우겠소. 어서 문을 열어주시오.”
“알겠습니다. 대인께서도 성에 들어오셨는데 병마절도사가 못 들어올 이유가 없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사이 왜군이 정신을 차리고 경상우병영군이 진주성에 입성하지 못하도록 방어에 나섰다. 치열한 전투가 시작됐으나 동문에 배치된 간수군들이 총을 쏘아 왜병들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효율적인 엄호 사격 덕택에 우병영군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진주성 동문에 도착했다.
성문이 활짝 열리자 경상우병사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왔다. 병력은 기병 천에 보병 2천, 합해서 3천 정도였다. 다들 상처투성이에 지친 몸을 이끌고 성에 들어오자마자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진주성을 포위했다가 배후를 기습당하고 우병영군의 입성을 허용한 왜군들은 부끄러워 미치려고 했다. 멀리서 깃발을 휘날리며 급히 달려오던 왜군들도 추격을 멈추고 진주성을 지켜봤다.
“고생했습니다, 병사 영감.”
“이 지사 대감! 아니, 제독총병관 도독 대인께서는 역시 진주성에 들어와 계셨군요. 이제야 안심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요. 며칠 동안 왜군들 붙들어두느라 병사 영감이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한 달 사이에 무수한 전투가 있었고, 그 사이에 우병영 관군 2천 명이 전사했소. 왜군들이 끊임없이 진주 방향으로 몰려오고 있소. 왜병들은 다들 비쩍 마른 얼굴에 악귀 같은 형상이었소. 그래도 우린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웠소. 아주 처절하게 싸웠단 말이오!”
“대단하십니다. 병상이 그토록 고생하셨으니 진주성은 반드시 지켜낼 것이오.”
알아줄 사람 없는 곳에서 고군분투하던 유숭인을 이민호가 위로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유숭인이 눈물을 흘리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한 달 째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싸우고 오늘은 창원에서 진주까지 뛰어오느라 심신이 너무 지친 탓이었다.
다른 병사들도 마치 시체처럼 드러누워 꿈나라로 떠났다. 이민호는 남강 건너 진채에서 담요를 가져오게 해서 유숭인과 군사들을 덮어주었다.
부산 대신 김해 죽도가 왜군의 상륙 교두보가 되면서 김해에 가까운 창원이 그 동안 왜군의 끊임없는 공세에 시달렸다. 병력이 적은 경상우병영이 지금까지 왜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창원에서 버틴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이민호는 유숭인이 깨어나면 그 동안의 전투 과정을 꼭 물어보고 싶었다.
“김 목사! 진주성 방어를 위해 밖에서 죽도록 싸운 사람들이 여기 있습니다.”
“원래는 병마절도사가 와도 성문을 열어주지 않으려고 결심했었습니다만, 하마터면 후회할 뻔했군요.”
“지휘권 문제는 걱정 마시오. 김 목사만한 장수가 없으니 말이오. 만약 도원수가 성에 들어와 김 목사에게 지휘권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면 내가 도원수를 끌고 밖으로 나가겠소.”
“고맙습니다. 보급부터 시작해서 계속 대인께 신세만 지고 있습니다.”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협동 작전이지요. 진주가 무너지면 경상우도 전체가 왜군에게 점령당하고 전라도가 위협받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삼도수군 연합함대가 마음대로 작전을 펼칠 수도 없지요.”
이민호는 촉석루에 앉아 진주성을 지키는 장수들과 함께 저녁을 들었다. 남강에 건설한 다리를 오가는 하인들이 음식을 원정군의 진에서 준비해 가져왔다. 그 동안 왜군에 포위당한 탓에 신선한 채소와 고기를 못 먹었던 진주성 장수들이 오랜만에 실컷 포식할 수 있었다.
진주성을 지키는 장수들은 목사 김시민, 진주판관 성수경, 곤양군수 이광악, 율포권관 이찬종, 수성대장(守成代將) 전 만호 최덕량, 군관 이눌 등이었다. 평상시라면 이들 모두가 수군에서 싸웠어야 할 장수들이었고, 실제로 휘하 군사들 중 대부분이 수군이었다. 경상우수사 오응정이 수군을 재건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병력과 장수들을 육전에 빼앗기니 경상우수영이 예전의 성세를 되찾기 어려웠다.
성 밖에서는 삼가의병장 윤탁, 의령가장(宜寧假將) 곽재우, 초계가장 정언충 등이 진주성 동쪽에서, 합천가장 김준민은 북쪽에서, 전라의병장 최경회는 서쪽에서 성원했다. 고성가장 조응도와 복병장 정유경은 진주성 남쪽에서 활동하다가 고산국 원정군에 합세했다.
이때 고산국이 조선국의 속국이라면서 몇몇 선비 의병장들이 노골적으로 원정군을 무시한 경우가 있었다. 보급품을 달라고 요청했으면 얼마든지 지급해 줬을 텐데 만만해 보이는 고산국 병사들에게서 억지로 빼앗아간 선비도 있었다. 그 선비들은 천조국 부총병 대인에게 붙들려 곤장을 맞았다고 한다. 선비 의병장들이 곤장을 쳐 맞자 나머지 의병들의 군기가 바짝 들었다.
“이 정도면 성이 함락될 일은 없겠군요.”
“화약과 무기는 충분한데 병력이 부족합니다. 성 밖에서 활동하는 의병들이 왜군들의 시선을 최대한 끌어줬으면 좋겠지만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친 이민호는 김시민과 함께 어둠이 내린 진주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서장대부터 순시를 하면서 북장대로 올라가는데 성 밖 멀리 북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산에서 횃불을 들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조총을 몇 방 쏘더니 성 안을 향해 뭐라 소리를 질렀다.
“김 목사! 저긴 누가 있소?”
“곽 의병장 재우가 보낸 선봉장 심대승입니다, 대인.”
“뭐라 부르는 것 같은데, 안 들리는군요.”
북쪽 산에서 목청 큰 사람 몇 명이 동시에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이민호는 총소리가 그친 다음에야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전라도의 원병 1만여 명과 의령의 홍의장군이 합세하여 내일 아침에 와서 적을 죽이기로 하였다!”
“와하하하!”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호응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웃었다. 그리고 북장대를 지키는 군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전라도와 경상도 원병 1만여 명이 이미 진주성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고산국 해병 600명과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 간수군 600명, 그리고 경상우병영 기병과 보병 3천 명이 오늘 추가로 성에 들어왔다. 그러나 기병들은 하루 쉰 다음 성에서 빠져 나갈 예정이었다. 승마보병과 흑인 보병은 남강 건너편에 주둔하고 있었다.
10월 6일, 새로운 왜군 부대가 진주성 인근에 속속 도착하면서 왜군의 군세가 점차 늘어났다. 진주성을 포위한 왜군이 3만을 넘어서자 성 바깥에서 성원하던 의병들도 멀찍이 밀려났다. 왜군은 주변 산에서 나무를 베어 공성장비를 제작하느라 오늘은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뭐라고요? 저들이 전부 다 기병이라고요?”
이민호는 처음에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좋은 밥 먹고 헛소리를 하는 줄 알았다. 분명히 진주성에 들어왔을 때 천 명만 기병이고 나머지 2천 명은 보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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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오늘도 다행히 오전에 잘 수 있겠군요.
본격적인 전투는 다음 편부터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