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62화 (111/1,000)

00162  24. 진주성 전투  =========================================================================

“백성들이 너무 기대하는 것 같아서 부담 가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하시면 될 거여요.”

민희와 민영이 이민호에게 방탄판을 붙여주면서 격려했다. 이민호는 둘 덕택에 몇 번이나 살아난 것 같아 고마움을 느꼈다.

“민희와 민영이 그 동안 고마웠다. 이제 전쟁은 얼마 안 남았어. 앞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테니 조금만 더 참자.”

“저희들은 지금이 더 좋은데요. 어머머!”

말을 꺼낸 민영의 얼굴이 빨개지고 민희가 민영의 팔을 꼬집었다. 이민호가 원정 중에는 경호를 맡은 둘만이 이민호를 독점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젯밤에도 셋이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냈다.

전선에 여자들을 태우고 다닌다고 욕 좀 먹었지만 둘은 분명히 이민호가 정식으로 받아들인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부친 이응화가 인정한 공식적인 첩의 신분이었다. 전쟁터에 나온 장수가 음행에 빠졌다고 이민호를 비난하던 어떤 선비가 나중에 둘의 신분을 알고 백배 사죄한 적이 있었다.

부산진첨사 정발의 기생첩 애향은 성이 함락될 때 자결했다. 동래부사 송상현의 첩 김섬은 동헌의 지붕에서 기와를 던지며 끝까지 항전하다 죽었고, 또 다른 첩 이양녀는 절개를 지키며 일본에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정식 첩이라면 음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선은 성이나 다름없으므로 핑계거리로 충분했다. 이민호를 옹호해주는 선비들은 민희와 민영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을 들어 세종 때 김종서의 여진족 첩과 비교하곤 했다.

이민호도 지금이 나쁘지 않았다. 궁궐에 있을 때는 항상 바쁘고 쉬는 시간에도 머리를 써야 했는데 전쟁터에 나오면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큰 실수를 해서 무의미하게 병력을 잃은 적도 없었다.

이민호는 작전회의 때 잠깐 고민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극히 짧은 시간에만 지휘했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에 실제로 부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계복이었고, 부대를 운영하면서 터져 나오는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도 역시 계복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 즈음이 되면 파김치가 되는 계복을 볼 때마다 이민호가 얄밉게 웃었다.

연합함대가 하동과 남해 사이 노량을 빠져 나갔다. 바로 그 동쪽에 사천이 있었다. 연합함대 소속 전선들은 미리 계획된 작전에 따라 움직였다. 수군 판옥선들이 넓은 강 같은 바다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 선진리 사천왜성 앞에 진을 치고 화포를 쏘았다.

판옥선 100여 척이 쏟아내는 화력은 실로 가공해서, 아직 미완성인 석벽과 목책이 단 몇 번의 포격에 모두 무너져 버렸다. 왜성 앞에 정박된 크고 작은 왜선 20척도 단번에 박살나 판자 무더기로 변했다.

그 사이 왜성에서 약간 남쪽 해안에 대규모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고산국 소속의 배 수십 척에서 승마보병 3천과 흑인 보병 3천, 그리고 해병들 중 5분의 3인 600명이 내렸다. 연합함대의 유군에서도 이곳에 간수군 절반을 넘는 600명을 상륙시켰다. 군속 역할을 맡은 마부와 하인도 3천 명이나 되었다.

“빨리 빨리 움직여! 거기 뭐하나? 길을 비켜줘야지!”

헌병 역할을 맡은 기마병들이 질서를 유도했으나 턱도 없었다. 만 명을 약간 넘는 병력이 내리는 동안 시간도 많이 걸리고, 병사들이 각자 자기 말과 보급품을 찾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그 동안 상륙 훈련을 몇 번이나 했는데도 아직도 상륙 초기의 혼란은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이럴 때 적에게 공격받으면 몹시 곤란할 수도 있어서 이민호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두 시간 정도 지나서 간신히 병력을 정리해서 대열을 세울 수가 있었다. 이제 북쪽으로 진군해서 왜군을 전멸시킨 다음 숙영지를 세우면 오늘 하루를 마감할 수 있을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그러나 그 사이 멀리 왜성에서 판옥선이 쏟아 붓는 포탄을 맞으며 고산국 원정군의 상륙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왜군들은 이민호의 기대를 따라주지 않았다. 왜군이 갑자기 왜성을 버리고 쏟아져 나오더니 일제히 동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판옥선 100여 척에서 쏘는 화포도 못 견디겠는데 기병을 포함한 7천여 병력이 상륙하자 기가 죽은 것이다.

“서전부터 왜 이래? 계복아! 기병 2천 이끌고 왜군의 퇴로를 막아!”

“도련님도 참! 쟤들은 기병이 절대 아니라니까요.”

“말에 탔으면 그게 그거지 뭐.”

계복이 툴툴거리면서 승마보병 2천을 이끌고 추수가 끝난 들판을 달렸다. 농민들이 수확을 한 것이 아니라 왜군들이 이삭만 땄는지 이삭 없는 볏짚이 논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민호는 간수군들을 왜성으로 보내 전리품을 수거하도록 했다. 그리고 승마보병 천을 4개 려씩 둘로 나눠서 남쪽과 북쪽에 배치시키고, 기마병 300을 진주 방향으로 정찰을 보냈다.

그 사이 하인 3천과 흑인 보병 3천, 해병 600명에게 교두보 건설을 시켰다. 썰물에도 판옥선이나 전선이 접안 가능하도록 바다로 길게 나오는 선착장을 만들고 주변을 목책으로 둘러 간단한 방어시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바깥에 숙영지 건설을 서둘렀다. 우물 다섯 개를 파고 바닷가 가까운 곳에 변소를 설치했다. 풀을 베어 천막을 칠 공간을 만들고 천막 사이에 배수로도 팠다. 하인들 중에 건축기술자가 몇 명 섞여 있고 그 동안 병사들을 훈련시킨 보람이 있어서 짧은 시간에 해낼 수 있었다.

“왕! 이런 간단한 일을 시키면서 병사들에게 월봉을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냐?”

피그미족 전령이 이민호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예전에 처음 봤을 때 민희와 민영이 아이인 줄 알고 전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성인임을 알고는 정중하게 사과해야 했다. 전령은 자주 겪었는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봐! 넌 일꾼이 아니라 군인이야. 죽거나 죽이거나 해야 하는 군인이란 말이야. 이런 안전한 일을 시키면 오히려 행복한 줄 알아야지.”

“쳇! 나는 호구왕의 주머니가 걱정돼서 해준 말이었다.”

“내가 왜 호구왕이야!”

이민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전령이 그 짧은 다리를 움직여 후다닥 도망갔다. 이민호가 고산국 병사들 사이에서도 호구로 낙인찍힌 것 같았다.

흑인들이 말을 잘 못 타서 전령과 척후 문제가 심각했다. 어쩔 수 없이 흑인 보병부대의 척후는 일부 조선 출신 병사들이 맡게 되었다. 흑인 보병은 항상 이민호 주변에 있기에 멀리 떨어진 곳에 전령을 보낼 일이 아직은 없지만 만약 분산 배치될 경우 기마 전령도 필요했다.

- 타타탕! 탕!

멀리서 총성이 울려서 이민호가 고개를 돌렸다. 왜군은 창원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넘기도 전에 승마보병들에게 따라잡혔다. 그래도 예상보다 훨씬 멀리 도망간 셈이었다.

왜군이 방진을 형성해 바깥에서는 창병들이 기다란 창대를 내밀고 안쪽에서 총병들이 조총을 쏴댔다. 왜병들 입장에서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승마보병들이 보유한 총의 사거리가 훨씬 길었다. 승마보병들은 말에 탄 채 멀찌감치 포위한 다음 총격을 퍼부었다. 들판에서 포위된 왜병 500명이 승마보병 2천 명에게 몰살당하기까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왜병들 대부분은 동시에 서너 방 이상씩 맞고 쓰러졌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간수군이 점령한 해안 왜성에서 전리품 수집이 끝났다. 간수군들이 숙달된 동작으로 무기와 갑옷, 일반 천 옷과 식량 등을 구분해서 해안에 쌓아놓았다. 왜성에 전사자와 중상자가 많아 수급도 많이 베었다.

그 사이 승마보병들이 전리품을 들고 돌아와 간수군들이 분류해서 쌓아놓은 곳에 분리수거했다. 그리고 천막 칠 장소에 가서 천막을 치고 저녁을 준비했다. 이민호가 전투 내내 지켜봤기에 계복이 따로 보고할 필요도 없었다.

전리품 수집이 끝나자 연합함대에서 사후선을 보내 전리품을 판옥선으로 수송했다. 수급은 특별히 따로 제작한 수급보관대에 차곡차곡 쌓았다.

원래 수급은 각 도의 관찰사가 확인한 다음 불태웠었는데 최근 바뀌었다. 조정에서 명나라 요동도사에게 보고한다는 이유로 의주의 행재소로 수급을 보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수급을 직접 확인하는 절차는 명나라가 더 철저해서 조선도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민호는 저녁 식사 후에 통제영 상선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했다. 그 전에 진주성까지 정찰했던 기마병들이 돌아와서 진주목사 김시민의 서신을 통제사에게 전했다. 진주성 인근까지 진출한 왜군이 점점 군세를 불리고 있다고 했다.

“수군은 내일 새벽에 출항하겠네. 통제영에서 사천까지 수로는 수군이 맡겠네. 사천에서 진주까지 이어지는 육로 보급선은 원정군이 잘 지키게.”

“예. 전선도 잘 쓰십시오.”

“통지 자네 춘부장이 계신 유군에 소속시키겠네. 기대가 되네.”

이민호는 전선 8척 중에서 6척을 연합함대에 내주었다. 두 척은 사천의 상륙교두보 방어용으로 남겨놓았다. 서양 범선과 중형 외륜선은 수송선이라 통제영과 사천 사이를 오가도록 했다.

삼도 수군의 1차 목표는 대마도 이즈하라 항, 2차는 부산포, 3차는 가덕도와 죽도로 정해졌다. 8월 이후에는 해전이 거의 없어서 수군이 지상 공격 작전만 계속하고 있었다. 지상 공격용으로 비격진천뢰를 많이 준비했는데 이번에는 함포를 탑재한 고산국 전선들이 참전하니 지상 공격력도 막강해졌다.

이민호가 기술 유출을 극도로 꺼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삼도 수군 연합함대에 외륜선 12척이 소속됐는데도 가급적이면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전선의 경우도 마찬가지 행동양식을 보였다. 그러나 이민호 입장에서는 이순신을 일본 정벌에 써먹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전쟁 기간에 이순신이 외륜선이나 전선에 익숙해지길 원했다.

“고산국 전선의 함포가 뛰어나니까 통제영 상선 가까이 두고 직접 지시를 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왜선 200척이 엄원항 남쪽과 북쪽 포구에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잘 살피십시오.”

이민호가 지도를 펼쳐 이즈하라 포구 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포구를 통제사 이순신에게 알려주었다. 이즈하라를 공격하다가 왜선 200척에게 쫓긴 기억이 새로웠다. 판옥선 110척에 외륜선 12척, 전선 6척이면 왜선 200척 정도는 압도할 것 같았다.

겐타로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일본에서 왜선을 새로 만드느라 전국의 나무가 씨가 마른다고 했다. 요즘은 나고야와 이키, 대마도를 방어할 배도 부족하다고 했다. 일본은 조선 수군에게 격침되는 만큼의 숫자를 제대로 보충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부산포에서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고도 방어를 포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알겠네. 낮에 공격할 예정이니 습격당할 염려는 없겠지. 오히려 우리가 먼저 들이쳐야겠군. 대마도 그 이남도 공격하고 싶은데 아직 조정에서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아쉬워.”

“명나라 황제폐하께서 일본 공격에 의욕을 갖고 계시니까 조만간 조정에서도 허락할 겁니다.”

이미 전면전이 시작됐으니 상대방 영토에 대해 무제한으로 공격할 권리가 교전당사자에게 생겼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일본 영토를 공격했다가 자칫 일본이 더 많은 병력을 조선에 파병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일단 조선 영토 내에서 왜군을 몰아내자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사실은 일본 영토를 공격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의병들이 진주성에 들어가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아서 생각보다 병력이 적다고 하더군. 동래성이 함락된 이후 성이 함몰되면 다 죽는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고 있어. 그렇다고 왜적들을 향해 돌격하는 의병들을 겁쟁이라고 욕할 수도 없지.”

“의병장들을 만나서 설득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읍성은 원래 전쟁용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해가 됩니다.”

조선의 성은 평지 읍성이나 산성이나 마찬가지로 쓸데없이 넓었다. 병력은 적은데 성이 넓으니 적이 쉽게 넘어와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일본처럼 백성들을 성에 수용하지 않고 적과 싸울 수는 없었다. 조선과 일본의 전쟁문화 차이라고 볼 수 있었다.

“경상우병사 유 영감이 창원에서 왜적을 방어중이네. 서로 잘 협력하게.”

“알겠습니다. 유 병사라면 믿을 만합니다.”

경상우병사 유숭인은 사천현감 정득열, 가배량권관 주대청 등 원래 수군 장수이면서 임시로 육전에 소속된 수령, 장수들과 함께 창원 인근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민호는 유숭인에게 전령을 보내 적당히 진주 방향으로 물러서도록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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