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0 24. 진주성 전투 =========================================================================
24. 진주성 전투
벌써 임진년 9월 하순이었다. 직할군 승마보병과 흑인 보병을 태운 대형 외륜선, 말이나 군량을 실은 수송선들을 방답 남쪽 연도의 선착장에 접안시켰다. 그리고 이민호는 기함을 비롯한 전선들만 뽑아 대마도로 향했다. 기관으로 움직이는 전선이 어느새 여덟 척으로 증강돼서 이제는 어딜 가든 든든했다.
등화관제를 실시한 다음 한밤중에 대마도 남동쪽 바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단정을 보내 이즈하라 항에 대한 정찰을 하도록 지시했다. 벌써 몇 번이나 하던 짓이라 이민호가 손짓만 해도 다들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정찰대는 곧 돌아와서 보고했다.
“국왕전하! 이즈하라 포구 주변에 야적된 군량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포구에 왜선 50여 척이 정박하고 있습니다. 방패판이 제대로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부산과 대마도 사이를 왕복하는 수송선들을 호위하는 왜군 수군 전투선단일 것 같습니다.”
“어느 다이묘 소속이던가?”
“밤이라서 그런지 가문을 나타내는 깃발을 내걸지 않았습니다.”
이민호는 정찰대장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했다. 수송선이나 육군 수송함대가 아닌 정식 수군 함대라면 기동력 하나만큼은 확실하니 이 기회에 때려잡는 편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았다.
이민호는 전선 8척을 이즈하라에 접근시켰다. 그믐달이 검은 구름에 가려 천지사방이 하나도 안 보이는 이때, 왜선에서 불을 밝혀 놓아 그것을 목표로 움직일 수 있었다.
좀 더 가까이서 보니 정말로 왜선 50여 척이 횃불을 밝힌 채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다. 계복이 왜선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왜 수군이 확실합니다. 같은 세키부네라도 배가 작고 날렵하게 생겼지 않습니까? 그래도 노꾼과 조총병이 다른 수송선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이 타고 있을 겁니다.”
“일단 때려잡아 보면 알겠지. 쏴!”
- 펑! 펑! 펑! 펑!
기함에서 함포 4문이 연이어 발사됐다. 다른 배들에서도 함포 사격에 동참했다. 전선 8척에서 각각 4문의 3인치 함포를 발사하니 꽤나 위력적이었다. 모든 함포가 5번쯤 발사하자 포구에 제대로 떠 있는 배가 없었다.
공격이 끝날 때쯤 이즈하라 성의 사방에 횃불이 환히 밝혀지고 왜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민호가 저들을 공격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총성이 연속 울렸다. 육지가 아니라 어두운 바다 사방에서 불빛이 번쩍거렸다.
- 타타탕! 타탕!
“뭐냐?”
“도련님! 우리가 왜선들에게 포위된 것 같습니다. 한 200척쯤 됩니다. 거리가 멀고 어두워서 잘 안 보이지만 저 뒤에 왜선들이 더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선장! 전 함대 서쪽으로 항진하라고 전해! 기함이 끝을 맡는다.”
선장이 기수에게 명령을 전달하고, 기수가 다른 전선들에게 불빛 신호를 보냈다.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보내자 다른 전선들에서 역시 불빛 신호로 응답이 왔다.
전선 여덟 척이 한 줄로 이즈하라 항 앞바다를 빠져 나왔다. 왜선 수백 척이 앞을 가로막거나 뒤에서 따라붙었고, 조총탄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전선들이 앞을 가로막는 왜선들에 함포를 쏘고, 해병들이 왜선 상갑판에 몰려선 조총병들에게 보병총을 쏘았다.
- 쾅! 터엉~
작은 진동이 기함을 살짝 흔들었다. 기함 함미 쪽에 포탄을 한 방 맞았다는 증거였다. 비싼 티크목 판재 하나 또는 두 개를 교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이민호는 속이 무척 쓰렸다.
왜선들 중에 가끔 이렇게 화포를 장착해서 쏘는 배가 있었다. 세키부네에는 화포를 탑재한 경우가 거의 드물고 어쩌다 있다 해도 달랑 하나, 대형 지휘선인 아다케에는 노 젓는 메인 데크의 함수 방향에 총안이 하나에서 세 개 사이로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포문을 위로 열고 화포를 발사할 수도 있었다.
20세기 중반에 칠천량해전을 그린 조선역해전도에서 상갑판 대들보에 밧줄로 매단 화포를 하갑판에서 쏘는 묘사가 있지만 문서적 근거가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만 왜선의 구조가 취약해서 그런 식으로 발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시대에 제작된 아다케 모형이나 현대 일본에서 고증을 거친 복원도에는 아다케에서 화포를 쏠 때 바닥에 놓고 쏘았다.
“접근하는 족족 쏴버려!”
티크목 판재 값을 생각하고 열 받은 이민호가 고함을 질렀다. 선장이 전령을 통해 각 함포별 목표를 지정해 왜선들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날려버렸다.
왜선들 중에 죽을힘을 다해 전선으로 돌격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함포 두세 방을 맞고 격침되거나, 간신히 접근하더라도 접현해서 왜병들이 칼을 휘두르며 넘어오기도 전에 해병들이 쏜 총에 맞아 갑판에 쓰러지거나 바다에 빠졌다.
“쯧! 대규모로 기다리고 있었군.”
전선 여덟 척으로 왜선 200척을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군도 많은 희생이 날지도 몰랐다. 그리고 여기서 해전을 벌여봤자 전략적인 의미가 별로 없었다.
대마도 이즈하라를 공격하는 일이 앞으로도 어려워질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마도에서 이 정도 난리를 피웠으면 나고야 성에서도 대비를 할 것 같아 나고야 성에 대한 공격은 아예 포기하고 말았다. 전에도 봤지만 나고야 성 주변에는 왜군 수만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충 하고 그냥 가자. 속도를 높여라!”
이민호가 선장에게 명령한 다음 산통 깨졌다며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왜선들은 계속해서 쫓아왔으나 속도 차가 나서 점점 거리가 벌려졌다.
다음 날 오전에 이민호와 호위대만 방답진에서 빌린 작은 배를 타고 여수 통제영에 도착했다. 통제영에서는 요즘 삼도수군 통제영을 한산도로 옮기는 문제로 어수선했다. 아전들이 문서 상자를 노끈으로 묶어 봉인하고 통제영에 속한 노비들이 짐을 포구로 날랐다.
통제영 동헌에 있던 부친 이응화가 소식을 듣고 나와 이민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부친이 어쩐지 활력이 넘쳐서 이민호가 보기에도 좋았다.
“민호 왔구나! 너 없는 사이 9월 초에 부산포를 또 털었다. 세 번째야. 카카카!”
이응화의 웃음소리가 무척이나 사악하게 들렸다. 이민호가 처음 공격한 것을 포함하면 부산포에 대한 네 번째 공격이었다. 이민호는 왜군이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침략자는 그런 꼴을 당해도 쌌다.
삼도수군 연합함대가 두 번째로 부산포를 공격했을 때는 절영도에 해안포대가 갖춰져 간수군들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왜군이 방어를 아예 포기하고 조선 수군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그냥 맞고 버텼다고 한다. 조선 수군은 아무런 피해도 없이 부산포에 정박한 왜선 2백 척을 불태웠고, 포를 쏘아 해안 곳곳에 세워진 움집을 헐어 버렸다.
그리고 수군이 돌아오는 길에 왜군이 지키던 가덕도를 점령하고, 낙동강 하구를 거슬러 올라가 죽도에 포격을 가했다. 죽도에서는 왜군이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군량미 쌓인 곳에 불을 질러 또 다시 왜군의 군량을 홀랑 태워먹었다.
그 전에 왜군이 부산포를 포기하고 상륙 교두보를 울산과 김해 죽도로 옮겼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그것이 사실로 확정되었다. 김해와 울산에 대한 조선 관군과 의병들의 공격이 치열해졌다.
“그런데 통제영에 사람들이 왜 이리 적죠? 군사들이 나이도 많이 들어 보이네요.”
“민호 너도 처음 봤지? 저들이 나도 말로만 들었던 전설의 사색제방군이다.”
9월 초의 출동을 마치고 돌아온 수군은 전부 고향에 돌아가서 추수를 하고 있었고, 조만간 통제영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현재 통제영에 주둔한 병력은 사색제방군(四色除防軍)이라는 노병들로 채워지고 숫자도 절반 이하만 남아 있었다. 사색제방군은 평시에 소집될 일이 없다가 오로지 전시에, 그것도 수군이 집에 돌아가는 한겨울에만 소집되는 예비 병력 중의 예비 병력이었다.
추수와 타작이 끝나면 수군 병력이 집결해 올해의 마지막 작전을 한다고 들었다. 겨울에는 바람과 파도가 강해서 수군 작전을 진행하기 어려웠다.
“오! 통지 어서 오게. 마침 잘 됐네.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하려고 병력을 움직이고 있어. 우리 수군도 가서 진주성의 방어를 도와주기로 했네.”
“아! 통제사 대감. 그런데 잠시 형식적인 절차 좀 진행하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이순신은 물론이고, 회의를 중단하고 나오던 장수들이 어리둥절했다. 이민호가 계복에게 눈짓을 하자 계복이 칙서를 펼치고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황제가 칙서를 보낸다 해서 반드시 명나라 칙사가 들고 올 필요가 없었다. 조선에서는 흔히 정조사로 파견한 조선 신하가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받아서 돌아오곤 했다.
“배신 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대명 황제폐하의 칙령을 봉행하라!”
이민호가 먼저 계복을 향해 무릎을 꿇자 다른 장수들도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잠시 고민하더니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평시라면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이 이미 조선 땅에 들어와 평양성을 공격한 이상 현대적 의미의 작전통제권이라 할 군사 지휘 권한은 조선이 아닌 명나라에 있었다.
“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칙고(勅告)하노라. 통제사는 임진년 4월 왜노의 변란 이래 수하 장수들과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바다로 나가 왜선 수백 척을 불태우고 왜노 일만 여의 목을 베어 조선 국왕에게 충심을 보였다. 대명의 요동군 10만이 조선을 도와주려 압록강을 건너려는 이때, 조선 수군과 의병의 협공으로 인해 왜노들이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려 한다. 그러므로 천병은 대군을 움직이더라도 적을 만나지 못해 전공을 세우지 못할 것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하니 통제사는 왜군이 물러나는 해구를 틀어막고 천병과 조선 관군, 의병과 합심하여 기어코 흉포 잔악한 왜노의 무리를 무찔러 없애어 하나도 살아남는 자가 없게 하도록 힘쓸지어다.
다시 통제사와 삼도 수군 장수들에게 전유(傳諭)하노니, 각기 군주의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을 굳게 가지고 복수의 의리를 크게 분발하도록 하라. 짐이 하늘의 명명(明命)을 주재하여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군주로 있는 바, 지금 만국이 모두 편안하고 사해가 안정되어 있는 이때에 저 미련한 소추(小醜)들이 감히 횡행하고 있도다. 다시 동남 해변(海邊)의 제진(諸鎭)에 칙서를 내리고 아울러 고산, 유구, 섬라 등 여러 나라에 선유하여 군사 수십만을 모집하고 있노라. 그리고 이들과 함께 일본을 정벌할 때 곧바로 왜노의 본거지로 쳐들어가서 적괴의 머리를 벰으로써 풍파가 가라앉도록 힘쓰겠노라. 이런 중요한 시기에 작상(爵賞)의 성전(盛典)을 짐이 어찌 아끼겠는가?
짐이 일단 흠차제독남북수륙관병어왜총병관이주도독부좌도독(欽差提督南北水陸官兵禦倭摠兵官夷州都督府左都督) 이국공 겸 주애공의 군사들을 조선에 먼저 보내 왜노를 징치하게 하겠노라. 조선국왕 이 휘에게도 이미 알렸노라. 통제사는 주애공과 협력하여 더욱 많은 왜노를 잡는 데 힘쓰도록 하라.
그리고 짐이 주애공에게 명해서 칙서와 특별히 통제사에게 하사할 은냥(銀兩)과 옥대, 저사, 사라 등의 물건을 아울러 가지고 가게 하였다. 이로써 통제사가 조선 조정과 우리 중국 조정를 공경히 섬긴 정성을 포장하노니 받아들이도록 하라. 통제사가 천조의 장수가 아니어서 더욱 중한 상을 내려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노라. 그래서 이상과 같이 칙고하는 바이다.”
칙서를 다 읽은 계복이 헉헉거렸다. 노비로 태어나 천자문을 뗀 다음 이민호에게 구박을 받으면서 소학 등 몇 권을 더 배웠다. 그러나 명나라 말 원어로 구성된 한문 칙서를 해석해가면서 읽자니 온 몸에 땀이 흐를 정도였다.
이민호가 붉은 비단으로 잘 포장된 상자에서 화려한 옥대를 꺼냈다. 그리고 갑옷을 입은 이순신의 요대 위에 옥대를 겹쳐서 둘러주었다. 상으로 내려온 은과 저사, 사라 등 천 종류는 이순신에게 확인시킨 다음 바로 내헌으로 보냈다.
“경하 드립니다, 통제사 대감!”
“경하 드리옵니다, 통상 대감!”
이민호의 선창에 맞춰 장수들이 일제히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이순신은 그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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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낮 12시 전에 잘 수 있겠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