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7 23. 해남도 발전 계획 =========================================================================
이민호는 고산국에 도착하기 전에 필리핀에서 일하고 있는 정옥남을 소환했다. 옥남은 필리핀에 가본 적이 없는 이민호를 위해 현대의 브리핑과 비슷하게 여러 가지를 준비해서 현재 진행되는 상황을 보고했다.
“고원에 위치한 성의 둘레는 조선 도호부의 평지 읍성과 비슷한 4225척이며 여장이 216곳, 옹성이 3곳, 곡성이 8곳입니다. 동문과 남문이 있으며 북문은 아직 긴요하지 않기에 돌로 막아놓았습니다. 샘은 일곱 곳, 유사시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수질을 관리하는 못이 두 곳입니다. 이것은 설계도입니다만 현재 진행되는 상황을 화공이 그린 그림으로 보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채색된 그림에는 건조를 마친 석성 안에 서양식과 조선식 건물이 각자 건축되고 있었다. 이민호는 건물의 건축양식까지 알아볼 수 있도록 세밀하게 묘사한 화공의 솜씨에 감탄했다.
“좋아. 그런데 포구의 방어가 더 시급한데 어째서 배후 도시의 성곽부터 쌓은 거야?”
“저는 전하께서 포구가 아니라 금광과 은광을 확보하기 위해 그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곳을 가장 먼저 지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 눈치를 살피니 이 시대에는 그런 것이 상식인 것 같아서 넘어가기로 했다. 이민호가 생각하기에 훔쳐갈 수 없는 금광과 은광을 내버려두고 교두보를 먼저 확고히 지키는 것이 나았다.
“좋아. 아주 잘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영하 원정에서 세운 전공으로 주애공을 봉작 받았다. 고오크남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일을 다른 관원에게 맡기고 앞으로 해남도로 가서 일해야겠다. 지금까지 필리핀에서 한 것과 비슷한 일이니 잘할 수 있을 거야.”
“전하! 전하께서 시키시면 어디든 당연히 가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 가기는 곤란합니다.”
“지금은 곤란하다고? 왜?”
옛날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아 이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반아의 하급 귀족들과 결투를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닷새 후, 보름 후, 그리고 한 달 후에 결투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서반아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라고 했는데 결투를 왜 해?”
“제가 마닐라에 자주 들르면서 귀족들과 친해졌습니다. 그 와중에 서반아 하급 귀족들의 부인이나 약혼녀들을 제가 유혹한 줄로 오해한 모양입니다. 저는 분명히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이 자꾸 다가오는데 냉정하게 뿌리칠 수도 없고 어떡합니까?”
“아이쿠! 두야!”
동양인의 용모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 여자에게도 통하는 옥남의 외모였다. 전에 백인 궁녀들이 옥남에게 홀딱 반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런데 이 시대 마닐라에서 에스파냐 사람들의 남녀 비율은 10대 1을 넘었다. 몇 안 되는 처녀 또는 유부녀들을 마닐라에 거주하는 모든 에스파냐 남자들이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귀한 여자를 희멀건하게 생긴 동양인 남자 옥남이 빼앗아갔다면 에스파냐 하급귀족들의 분노가 얼마나 클지 이민호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전하! 저는 그 여자들에게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그래도 옥남이 네가 무조건 잘못했다. 가서 사과하도록 해. 비굴하게 느껴지더라도 할 수 없어. 그리고 여자들하고 가까이 지내면 당연히 오해를 사기 마련이야.”
“제가 좀 잘 나긴 했습니다.”
“그래. 그게 문제야. 이번에 확실히 필리핀을 떠나는 게 낫겠다. 결투 대신 사과하고 보상금으로 때워. 결투하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지.”
“쳇! 제가 결투에 대비해서 그 동안 서반아 검술을 얼마나 많이 연습했는데요. 앗!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만약 유럽 시장에 일찍 진출할 수 있다면 옥남을 써먹고 싶었다. 그러나 옥남이 늙어서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과연 유럽 시장에 주도적으로 참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어서 신료들을 모아놓고 해남도 발전계획 회의를 열었다. 미카와 왕명명이 몇 달 동안 조사한 해남도에 대해 설명했다.
“주애라고 흔히 부르는 해남도의 정식 명칭은 충쩌우, 경주부(瓊州府)입니다. 부 아래에 애주, 담주, 만녕의 3개 주와 22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구가 많은 순으로 려족(黎族)과 한족, 그리고 려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 파견한 묘족(苗族)이 섬에 집단으로 들어가 둔전을 치고 있습니다. 원나라 때 광저우에 입항하던 아라비아 상인들의 후손인 회족 역시 소수나마 이 섬에 살고 있습니다.”
“무역이 우선이겠지만 해남도에 돈이 될 만한 생산품이 있을까?”
이민호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물었다. 땅이 넓긴 하지만 자원 때문에 해남도에 욕심을 낸 것은 아니었으니 없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해남도는 진주와 수정의 산출이 많고 그것을 원재료로 한 수공예품을 제작합니다. 나비공예화와 야자공예품은 황실에 진상하는 특산품입니다. 해삼과 산호 생산량이 많으며 고산지대에서 몇 가지 열대 특산 차가 생산됩니다.”
“진주가 난다고?”
“예. 해남도 인근 바다가 진주조개의 성장에 유리한 수온이라 합니다. 이곳에서 난 진주는 품질이 좋아 특별히 남주(南珠)라고 불립니다. 해남도의 특산품인 백접패(白蝶貝) 종류의 조개에서 간혹 진주왕이 나오는데 큰 것은 지름이 한 뼘에 달합니다.”
“우와! 그렇게 큰 게 있다면 한 번 구경하고 싶군. 혹시 진주 양식도 하나?”
야명주만한 커다란 진주라면 그 희소성만으로도 엄청난 가치가 있겠다 싶었다. 이민호는 아시아의 열대 바다에서 산출되는 진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정확한 산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런데 마침 해남도에서 진주가 난다니 꽤나 즐거웠다.
“주로 진주조개와 굴, 키조개를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진주를 캐는 방법을 씁니다. 전하께서 진주 양식이 진주를 인공적으로 생성하는 것을 말씀하신다면 해남도에서는 아직 그런 곳은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나라 때 민물홍합에 이물질을 넣어 진주를 만들어내는 방법이 개발됐습니다만 모양이 일정하지 않거나 반구형이라 사용처가 제한되어 가격이 싼 편입니다.”
“이물질을 살 안에 심어야 하는데 조갯살과 껍질 사이에 심어서 그래. 해결할 방법이 있다.”
진주층의 작은 조각을 조개의 살 조직 안에 넣어 이것이 진주의 핵이 되고 점차 진주층이 붙어 구슬 모양의 진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민호는 고산국의 전복 양식장에서 길쭉한 진주를 만들고, 해남도에서 진주조개와 굴 양식을 하면서 인공 양식진주를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직접 가보니 어떻소?”
이민호가 이번에는 예국 최 참판에게 물었다. 최 참판은 몇몇 하급 관리들과 호위병들의 도움을 받아 한 달 동안 해남도를 조사하고 돌아왔다.
“해남도의 동부와 북부는 비가 자주 오고 서남부는 건조지대입니다. 쌀은 보통 이모작을 하는데 동부와 북부는 삼모작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토양이 워낙 기름져서 식물이라면 뭐든지 빠르게 잘 자랍니다. 그리고 건조한 서남부 해안선을 따라 염전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소. 이곳에서는 많이 생산하지 못했는데 해남도는 명나라 입장에서 국내 생산 소금이고 전매권도 일부 나눠 받았으니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소금을 생산합시다. 그런데 려족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가 뭔가요?”
“아무래도 관아에서 시행하는 한족 우대 정책 탓인 것 같습니다. 한족 관리들이 한족 이주민들을 더 많이 유인하기 위해 바닷가 인근 평지의 토지를 한족에게만 독점적으로 불하해줬습니다. 그래서 려족 주민들이 불만이 많이 쌓였다고 합니다.”
최 참판이 들은 바에 따르면 10년에 한 번꼴로 큰 반란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러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묘족은 려족에 비해 체구가 크고 화살을 잘 쏘며 화살촉에 독을 발라서 쏘기 때문에 려족이 도저히 상대를 못한다고 최 참판이 설명했다.
“큰 섬을 다스려야 하니 할 일이 많을 것이오. 그런데 반란까지 걱정해야 한다니 조금 걱정이오.”
“묘족과 협조 관계를 잘 유지하면 큰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묘족들도 물산이 풍부한 해남도가 마음에 들어 조정에서 계속 고용해주지 않더라도 섬을 떠날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 참 다행이오. 그런데 안남에 간 사신단은 아직도 안 돌아왔소?”
안남이 황제국을 참칭하면서 국서를 보내와서 고산국이 일종의 조공사절단을 안남에 보냈다. 세법을 바꿔가면서 단립종의 쌀을 수출해준 것에 대한 감사 표시와 함께 무역상의 역할도 맡았다.
“상왕전하께서 그곳이 마음에 드는지 시간을 끌고 있다고 합니다.”
“목을 쳐야겠군요. 이번에 하는 일을 봐서 단순 해고일 수도 있고, 진짜 참수일 수도 있소. 큰 사고를 치기 전에 미연에 예방해야겠소.”
머리는 좋은데 그 좋은 머리를 나쁜 곳에 쓰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모두에게 방해가 되는 인간들을 더 이상 안고 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할 일도 많은 이민호가 그런 데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가 싫었다.
이민호의 결연한 태도에 회의에 참가한 옥남이 흠칫했다. 외국에 나가서 국왕의 대리인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도시를 마음대로 만들어가던 옥남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참수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날을 기점으로 옥남은 이민호 앞에서 설설 기었다.
“다들 알다시피 명나라에서 공이나 백 같은 작위는 보통 명예직에 불과하오. 주애공부를 열더라도 해남도 전체를 직접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오. 주와 현 단위에서는 기존 명나라 관료들이 그대로 남아서 일할 것이오. 그러나 황제폐하께서 광동포정사사의 경주부 관할을 철폐하고 경주부와 그 예하 3주의 행정 관할을 주애공부로 이관했소. 또한 군사권과 군사지원권을 내게 위임했으니 실질적으로 해남도의 모든 곳을 자유롭게 개발할 수 있소. 공작이 단순한 명예직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명나라 관원들과 대화할 때 참고하도록 하시오.”
“전하의 어지를 소신들이 명심하여 상세한 세부계획을 만들겠습니다. 그런데 해남도 전체에 좋은 항구가 많고 많지만 현재 상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은 섬 남쪽 삼아와 북쪽 해구입니다. 전하께서는 어느 쪽에 공부(公府)를 설치하시겠습니까?”
“남만과의 무역을 위해 얻은 섬이오. 그러니 공부 위치는 남쪽으로 하시오. 말래카에 들르는 상선들은 무조건 해남도에 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오. 나중에 말래카해협을 장악한 다음 인도와 아라비아로 진출하는 것이 장기 계획이오.”
“명심하겠습니다. 공부는 자연적인 방파제가 있는 삼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신혼여행 갔다 온 동료 직원에게 들었는데 해남도 북부의 하이커우(海口)에서는 습기가 너무 높아 세탁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해서 이민호가 신기하게 여긴 기억이 떠올랐다. 헤어드라이어로 억지로 말린 양말에 다시 습기가 차서 어이가 없었다고 했다. 해협 건너편을 통해 명나라 땅과 통하기에는 해구가 더 좋겠지만, 그런 습한 곳에서 인간이 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필리핀 마닐라의 서반아와 마카오의 포도아 상인들에게 연락을 해서 해남도 삼아의 존재를 알려야겠소. 그리고 조만간 포도아와 접촉해서 말래카해협을 공동으로 지키는 문제를 협의해야겠소. 당분간 포도아와 전략적 협력 관계를 계속 유지할 테니 신료들은 참고하도록 하시오.”
“저희들이 보기에도 고압적인 서반아보다는 최선을 다해 협력하는 포도아가 확실히 여러 모로 낫습니다. 국서를 준비 하겠사옵니다, 전하.”
이민호가 알기로 조만간 네덜란드와 영국이 말래카 해협을 지나 동남아시아의 바다로 진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말래카해협이 아니라 아프리카 중부에서 무역풍을 타고 동쪽으로 직선 항해를 해서 바타비아, 즉 현대 자카르타에 거점을 만든다.
“광동포정사사가 해남도에서 손을 뗀다지만 형식상 보고는 계속 하는 편이 좋겠소. 기본적인 도시 구조를 갖추려면 인력이 많이 필요할 거요. 인력 송출은 광저우에 주차한 광동순무가 담당할 테니 그에게 협조를 구하시오.”
“예. 황제폐하께서 광동순무에게 고산국에 협조하라는 칙서를 내리셨다고 합니다. 인력 확보에 나설 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황제가 여러 모로 이민호를 도와주고 있었다. 이민호는 명나라를 위해 평생 충성할 생각이 없어서 이럴 때는 황제에게 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