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6 22. 출정 =========================================================================
그 사이 기함을 비롯한 전선들이 이즈하라 항에 바짝 접근했다. 유탄 사수들이 사거리에 들어온 이즈하라 항을 향해 연막탄을 연속 발사했다. 사수들은 최대 사거리로 쏘기 위해 대충 눈대중으로 총구를 높여 발사했다.
하지만 항구 주변에 군량을 워낙 많이 쌓아놓아서 유탄은 쏘는 대로 명중했다. 쌀을 담은 짚단과 거적에 불이 붙었고, 짙은 흰 연기가 주변에 자욱하게 깔렸다.
사수들이 발사한 유탄의 탄종은 연막탄이었고, 주요 재료는 현대에서 비인도적이라 지탄받는 백린이었다. 이민호는 사수들에게 훈련시킬 때 아군을 가리기 위한 연막탄이 아니라 적의 시야를 차단하거나 연기로 무력화시킬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제한했다. 백린은 강력한 인화성뿐만 아니라 연기에 독성이 있어서 더 위험했다.
“끄아아아악~”
백린연막탄이 터지면서 군량 주변에서 경비를 서던 왜병들의 옷에 백린 파편들이 달라붙었다. 왜병이 작은 백린 덩어리를 떼어내려 해도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높은 열로 피부를 태우며 몸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백린 피해자는 끔찍한 고통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화상부위를 통해 백린 입자가 신체에 흡수되면 다발성 장기 부전을 일으켜 결국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
- 타탕! 탕! 탕!
항구와 부두에서 왜군 조총병들이 본격적으로 사격을 해왔다. 직할군 해병들이 응사하려는 것을 이민호가 말리면서 지시를 내렸다.
“됐어! 이탈한다. 남쪽으로 항진하라. 다음 목표는 나고야다.”
조타수가 손잡이 여러 개가 달린 둥그런 타기를 빙글 돌렸다. 항해사가 해도를 보면서 정확한 타각을 조타수에게 지시했고, 나머지 배들이 기함에 따라붙었다.
나가사키의 겐타로가 편지로 보고한 바에 따르면 풍신수길은 아직 히젠(肥前)의 나고야성에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이 겐타로의 편지를 고산국에 전해주면 고산국에서 다시 통제영으로 보내는 식이라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없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겐타로가 수집한 첩보에 의하면 나고야 성 주변에 병력이 엄청나게 많이 깔려 있었다. 이민호는 이번 공격으로 풍신수길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풍신수길에게 겁을 줄 생각으로 이민호는 함대를 큐슈 방향으로 몰았다. 시커먼 전선 여섯 척을 배경으로 이즈하라 항이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도련님! 명호옥에 가서 평수길을 잡으시려고요?”
“설마 죽겠어? 그냥 겁만 주려고.”
“죽일 수만 있다면 이 전쟁이 끝날 텐데요.”
“그럼 좋겠지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계복이 한 말에 이민호는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만약 지금 풍신수길이 죽는다면 정말로 이 전쟁은 끝나고 만다. 그럼 이민호가 목표로 삼았던 많은 것들이 날아가 버릴 수가 있었다.
요즘 조금씩 늘어나는 조선인 이민자가 대폭 줄어들 것이고, 고산국이 조선에서 완전한 독립을 얻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리고 아직 군사적인 준비가 덜 되어 있기 때문에 근시일 내에 일본에서 내란이 일어난다면 이민호는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세키가하라 합전 때처럼 동, 서로 나뉘어야 일본 공략이 쉬워질 것 같았다.
그러나 선두무상을 비롯해 조선 출신 사공과 해병들은 이민호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고 기뻐했다. 왜추 평수길을 죽이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기대하는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보통은 지배자 하나가 죽는다고 해서 크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은 후계자 구도부터 취약점을 드러냈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은 정권의 종말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풍신수길의 가문은 무너지고 덕천가강,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아 막부를 세웠다.
기함은 이키 섬과 거리를 두고 그대로 통과하면서 함수를 남동쪽으로 향했다. 이때 새벽이 다가오면서 하늘과 바다가 희뿌옇게 밝아왔다.
이키 섬은 나고야 성과 가까워 보급품이 쌓인 곳이 없었다. 그 대신 나고야 성이 조선 수군의 공격 목표가 될까 두려운 풍신수길이 방어병력을 잔뜩 주둔시켜 놓았다. 전선 여섯 척은 이키 섬을 지나 남쪽 마다라시마(馬度島)와 가카라시마(加唐島) 사이의 수로를 향해 전진했다.
전선 여섯 척이 이키 섬 남쪽, 큐슈 북쪽 히젠 나고야 성의 서쪽 바다에 도착한 것은 해가 뜰 시간이었다. 멀리 수평선에서 이른 아침부터 왜선 수십 척이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민호는 지켜보기만 할 뿐 그대로 보내주었다. 훨씬 중요한 목표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겐타로가 보내준 지도를 보면 가베 섬 건너편 육지, 바로 남쪽 해안에서 살짝 내륙으로 들어간 낮은 언덕에 나고야 성이 있었다. 그러나 나고야 성에 가까운 북쪽 바다에서 포격 위치를 잡으려면 좁은 수로 안쪽 깊숙이 들어가야 했다.
자칫 앞뒤로 왜선들에게 포위당하고 사방의 섬과 육지로부터 공격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금산성 전투 막판에 위기에 빠졌던 경험 탓에 소심해진 이민호는 나고야 성이 세워진 언덕에서 서쪽으로 멀찍이 떨어진 바다에 자리를 잡았다.
“반도 하나가 왜군의 진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해안에도 왜선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 비어있는 진채도 있겠지만 성부터 진채와 왜선까지 포격 목표가 너무 많다.”
나지막한 언덕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나고야 성이 웅장하게 치솟아 서 있었다. 역광 탓에 검게 보여 제대로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크고 화려하다는 사실만은 절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성 밑으로 사방 해안을 따라 여러 다이묘들의 진채가 건설되어 있었다. 나고야 성이 있는 반도의 서해안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시마즈 요시히로, 구키 요시타카,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의 진이 차례로 이어져 있었다.
풍신수길이 현재 나고야 성에 있다고 하니 오사카 성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 왜군의 본진이었다. 적이 너무 많아 계복부터 선두무상까지 다들 허둥거렸다. 당황하긴 이민호도 마찬가지였다.
“도련님! 어딜 공격합니까?”
“사나이라면 당연히 참수 공격이지. 평수길을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나고야 성에, 특히 천수각과 혼마루에 화력을 집중하라!”
이민호의 지시에 따라 선두무상이 함포 공격을 지휘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다른 배들에도 함대의 포격 목표가 나고야 성이라고 미리 말해 두었다. 기함의 함포가 쏜 포탄의 탄착점을 확인하고 다른 전선에서도 포격에 가세했다.
전선에서 천수각까지 거리는 2km 정도였다. 배에서 쏘기에는 유효 사거리 아슬아슬한 거리였지만 저렇게 큰 표적을 놓치기도 힘들었다. 첫 발은 빗나갔으나 그 다음부터 혼마루 북서쪽에 서 있는 5중7계의 거대한 천수각에 포탄이 연거푸 명중했다.
함포를 쏘는 사공이나 화포장들 대부분이 조선 출신이었다. 목표가 왜추(倭酋) 평수길이 있는 성이라고 하니 포수들이 눈에 불을 키고 때려잡으려고 발악했다. 함포의 정확도는 조금 떨어졌지만 장전 속도는 확실히 높아졌다.
- 콰쾅! 펑!
천수각은 석축으로 천수대를 쌓고 그 위에 높이 쌓은 일종의 망루에서 발전된 건물이었다. 사방의 벽에 흰색으로 회칠을 했으나 기본적으로 석조가 아닌 목조 건물이라서 화재에 취약한 편이었다. 연속 명중한 포탄이 벽을 관통해 안에서 터지기도 해서 천수각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곧 무너질 것 같다. 계속 퍼부어!”
“무너진다!”
함교에 위치한 모든 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천수각은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거하는 만큼 화려하고 육중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화가 됐다. 3인치 함포 24문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은 천수각이 남쪽부터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5층짜리 건물이 폭삭 내려앉았다.
“와아~ 왜추 평수길을 죽였다!”
함교에서 일하는 이들이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그리고 왜추 평수길이 무너진 천수각 아래 깔려죽었기를 기원했다.
“안 되는데.”
“뭐가요, 도련님?”
이민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는 계복이 물었다. 그러나 두 손을 치켜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앞에서 지금 풍신수길이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왜선들이 몰려나온다. 퇴각! 서쪽으로 전속 항진!”
기함을 필두로 전선 여섯 척이 함수를 돌린 다음 일렬로 서쪽을 향해 항해했다. 마치 벌집을 건드린 듯 나고야 성 주변의 진채에서 왜병들이 몰려나와 배에 타고 바다로 나왔다. 그리고 사정거리가 미치지 못함에도 일단 조총부터 쏘고 봤다.
“국왕전하! 응사해도 되겠습니까?”
“응사해! 실력 차이를 보여줘라.”
직할군 해병 1려 여수가 해병들을 지휘해 전선을 따라오는 왜선들을 향해 총격을 퍼부었다. 다른 전선에서도 가까이 온 왜선을 목표로 잡고 총격과 포격을 퍼부었다. 함포에 명중한 왜선 두 척이 가라앉고 왜군의 인명피해는 총격으로 인해 그 이상으로 발생한 것 같았다.
그러나 전선과 왜선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총격도 뜸해지고 포격도 명중률이 뚝 떨어졌다. 왜선 수백 척이 돛을 올리고 노를 저어 계속해서 쫓아왔다. 그러나 돛도 안 달린 고산국의 전선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민호는 며칠 지난 후 겐타로에게서 이 작전의 결과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조선 수군 소속의 거대한 함선 100여 척이 조선 역법으로 7월 25일 새벽에 몰려와 대포 구경이 사람 키만큼이나 거대한 대화포로 포격을 가해 나고야 성의 천수각을 무너뜨렸다는 소식이었다. 전형적인 과장이었지만 일부는 확실한 사실이었다.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소문이 시중에 나돌았으나 바로 전 날 풍신수길이 오사카 성으로 떠났다는 정확한 정보 보고가 뒤늦게 들어왔다고 한다. 포격으로 본성 천수각이 무너졌다는 사실로 인해 체면이 약간 손상됐어도 풍신수길이 실질적으로 입은 피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풍신수길은 운수가 좋은 사람이라는 여론이 일본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물론 조작된 여론이었다. 어쨌든 앞으로는 풍신수길이 함부로 나고야 성에 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고산국 궁궐에 돌아온 이민호는 여러 가지 시급한 업무를 처리했다. 혜영이 대부분의 일을 맡아 처리했으나 이민호가 결정해야 할 중요한 사안도 많았다. 특히 영하 원정을 앞두고 흑인 병사를 3천 명 이상으로 늘리는 문제는 조금 민감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흑인은 앞으로 얼마든지 받아들여.”
“포도아 상인들이 도무지 절제할 줄을 몰라요. 우리가 계속해서 흑인 노예를 수입하다간 잘못하면 고산국 백성들이 온통 흑인으로 채워질 수 있어요. 흑인들이 노예에서 해방되면서 주인님에게 충성하는 것은 알지만 너무 많으면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아요.”
혜영은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여러 인종이 뒤섞이는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었다. 국제결혼을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가급적이면 흑인은 흑인끼리 결혼시키려 하는 등 타 인종과의 혼혈을 꺼렸다. 요즘 마카오에서 흑인 여자 노예가 남자보다 더 많이 팔려오는 것은 혜영의 입김이 작용한 탓이었다.
“나중에 집에 돌려보낼 거야. 우리가 사지 않으면 멀리 다른 대륙으로 팔려나갈 테니까 노예 매매가 불쾌하더라도 당분간 참아.”
“예?”
“흑인들을 고향 아프리카로 돌려보낼 예정이라고. 적당히 나라를 세워서 말이야.”
“아프리카는 아주 머나먼 곳에 있지 않나요?”
혜영이 포르투갈 상인에게서 산 지도를 펼쳤다. 포르투갈 상인이나 탐험가들 덕택에 지도가 매년 갱신되며 점점 정확해지고 있었다.
“말래카 해협을 지나서 북쪽에 인도를 두고 서쪽으로 쭉 가면 아프리카 동해안이야. 육로로 빙 돌아서 가면 끔찍하게 멀겠지만 배로 가면 의외로 가까운 곳이지. 명나라 초기에 정화가 함대를 이끌고 원정을 간 곳이잖아.”
“마다가스카르에 흑인이 아닌 남만국 사람들이 산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이겠군요.”
물론 여기서 남만국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