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4 21. 웅치전투 =========================================================================
“이긴 전투에서도 도망병이 생기다니, 신기하다. 확실히 수급으로 전공을 평가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죠. 열심히 적과 싸운 사람만 손해 보게 만드는 잘못된 제도입니다. 남이 구한 수급을 돈을 주고 사거나, 심지어 조선인을 죽여 왜인처럼 머리를 민 다음 왜병이라고 우기기도 한답니다.”
그 사이 이민호가 맡았던 남쪽도 전황이 완전히 기울어졌다. 간수군의 참호선 앞에 왜병의 시체가 거의 2천 구나 쌓여 있었고, 그 뒤로도 무수히 많은 왜병들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살아남은 왜병들은 늙은 왜장을 중심으로 남쪽 진악산을 향해 도주했다. 왜장의 뒤를 지켜주기 위해 비장한 각오를 다진 사무라이들이 몇 명씩 남아서 싸웠다. 그러나 의병부대 소속 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는 화살 공격에 금방 쓰러지고 말았다.
왜장 일행은 결국 산으로 들어갔고, 기마병들은 더 이상 추격하지 못했다. 빨간색 바탕에 흰색으로 한 일(一)자 밑에 동그라미 세 개가 들어있는 군기 여러 개가 숲으로 들어갔다. 대장기인 우마지루시(馬印)가 나무에 가려 보였다 말다 하다가 그것도 결국 숲속으로 사라졌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확실히 놓친 것이다.
“지사 대감! 승리요. 대첩이요. 으하하하하!”
의병장 고경명이 이민호에게 다가오더니 덥석 안았다. 이민호가 슬며시 고경명을 밀쳐내며 공치사를 했다.
“모두들 잘 싸우셨습니다. 이제 전라도와 충청도 남부가 왜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모두 지사 대감의 공이요. 헛험! 일부 의병들의 추태는 못 본 척해주시오.”
“저야 장계를 쓰는 사람이 아니니까 상관없습니다.”
보통은 최고 지휘관이거나 독립부대의 대장만이 장계를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원칙이 쉽게 무너지기도 했다. 그래도 이민호는 장계를 써서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가능하다면 조정이나 임금 모르게 전공을 감추고 싶었다.
“미안하오. 하지만 지금의 포상제도에 문제가 있소. 장수가 군사의 전공을 상신해야 하는데 무조건 수급만 갖다 주면 상을 준다니까 이 모양이오.”
“맞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앞으로도 의병군을 단단히 결속시켜서 왜군의 공세에 대비하십시오.”
이민호는 간수군들을 거느리고 먼저 금산읍성 서쪽 10리 밖에 세워둔 숙영지로 돌아갔다. 지키는 사람을 몇 남겨두지 않았는데도 진영은 무사했다. 왜군은 텅 빈 조선군 진영을 공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시간과 병력이 부족해 못한 것이었다.
왜군과 달리 조선 본토에서 보급을 받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본진이 털려도 상관없었으니 괜히 병력을 분산할 필요 없이 마음 놓고 숙영지를 버리고 출전했던 셈이다. 왜군이 숙영지를 점령하더라도 조선군과 무기체계가 전혀 달라서 왜군이 노획해서 다시 사용할 만한 것은 군량밖에 없었다.
관군들이 금산성 사방에서 왜군 패잔병들을 추격하거나 경계를 하는 사이에 본군인 고경명 의병군이 금산읍성 내부와 들판에 흩어진 왜병들에게서 전리품을 챙겼다. 일부 의병들이 훔쳐간 수급을 제하고도 8천에 달했다. 무기나 갑옷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초저녁에 밥을 짓는 시간에 지휘관들이 모였다. 의병이지만 관군과 의병 연합군의 대장 역할을 자임한 고경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수급 8천 2백 과를 얻었소. 지난 4월 왜적들이 쳐들어온 이래 이보다 더한 대첩은 없을 것이오. 이 모두 통지 지사 대감과 여러 장수, 그리고 군사들의 공이오.”
“대첩을 경하드립니다, 제봉 선생.”
이민호를 비롯해 권율과 이복남, 황진 등 관군 장수들이 의병대장 고경명에게 일제히 축하인사를 올렸다. 명색이나마 고경명이 분명히 대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고경명이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많았다. 동원한 병력이 가장 많았고, 금산성 앞에서 사흘 동안 왜군과 맞서서 버티며 금산성의 왜군이 이치와 웅치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의병들이 금산성을 점령할 듯이 공격함으로써, 같은 시간에 웅치와 이치를 공격하던 왜군들을 황급히 금산성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두 곳의 승첩을 유도한 것이 가장 결정적인 공적이었다.
권율 등 관군 장수들은 의병부대에 불만이 있으면서도 고경명 의병군의 전공을 알기에 함부로 폄하하지 못했다. 그러나 방어사 곽영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사실 본진이라 했지만 의병들이 한 일은 별로 없었소. 오늘 느낀 바가 많소. 내가 비록 의병을 일으켰지만 단순한 충성심과 의기만으로는 부족하고 제대로 훈련을 해야 전투에 투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 동안 여러 장수들에게 화를 내서 미안하오. 그 동안 관군이 패전했다는 소식만 들려와서 내가 여러 장수들에게 너무 심하게 대했던 것 같소. 이렇게 사과하겠소.”
“아닙니다. 선생의 겸손이 과하십니다.”
고경명이 허리를 굽히자 여러 장수들이 분분히 일어나 그를 말렸다. 그 동안 관군과 의병 사이에 쌓인 불신과 알력이 사과 한 번으로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승첩에서 가장 공이 큰 장수는 누가 뭐라 해도 통지 대감일 것이오. 하나 통지 대감은 특이한 위치에 있어서 전리품을 나눠받지 않기로 했소. 제장들 중에서 장계를 쓸 분들은 통지 대감이 참전은 하되 적당히 싸운 것으로 평가를 낮춰야 할 것이오.”
“통지 대감께 죄송하지만 상황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지요.”
장수들이 그 동안 말은 하지 않더라도 다들 이민호의 애매한 위치와 곤란함을 알고 있었다. 장수들도 괜히 선조 임금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간수군의 활약에 대해서는 적당히 각색하기로 입을 맞췄다.
“나는 의병들이 최소한 오늘 전투에서만큼은 전공을 차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수급은 모두 관군들이 나눠 가지시오. 내가 올릴 장계에도 그런 식으로 쓰겠소.”
“의병들의 사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씩은 챙겨 주셔야지요.”
“내가 관찰사들이 하는 짓이 미워서 창의의 기치를 올렸지만, 관군이 오늘처럼 제대로만 싸워준다면 의병은 불합리한 군사조직이라 생각하오. 오늘 전투로 급박한 위험이 사라졌으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의병 규모를 줄일까 하오. 관군을 동원해야 하는 관찰사나 수령들의 심정도 조금 이해가 가오. 하지만 이광과 윤선각은 반드시 관찰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
“동의하지는 못하겠지만 선생의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고경명이 발언을 마치자 장남 고종후의 주도로 전장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다. 장수들은 수급을 전주로 실어 나를까 하다가 너무 많아서 아예 관찰사를 금산으로 불러오기로 했다. 간단한 문서를 소지한 전령들이 말을 타고 전주 방향으로 달렸다.
이곳이 충청도이므로 충청도관찰사에게도 전령을 띄워 초청했다. 충청도관찰사 윤선각과 병마절도사 이옥 때문에 이틀 늦게 금산에 도착한 조헌이 고경명에게 백배 사죄했다. 그러나 같은 고민을 안고 있던 고경명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오히려 조헌을 위로했다. 윤선각과 이옥도 그 며칠 후에 도착해서 전장을 둘러본 다음 할 말을 잃었다.
다음 날 관찰사 이광이 도착해 전과를 확인하고 따로 장계를 올렸다. 다른 장수들이 각 지역별로 세부적인 전투 결과를 올린 것과 달리 관찰사는 이치와 웅치, 금산성 전투 전체를 연계해서 보고하면서 전주와 전라도 다른 지역의 방어태세도 함께 보고했다. 고바야카와군의 침공 경로를 따라다니면서 꾸준히 습격해 진격을 늦춰준 경상도 의병들에 대한 치하도 임금에게 부탁했다.
이치와 웅치, 금산성 전투에 참가한 장수들 중에서 장계를 올린 사람은 의병장 고경명, 방어사 곽영, 광주목사 권율, 김제군수 정담이었다. 나주판관 이복남이나 동복현감 황진은 매 전투마다 부장급으로 참전해서 따로 올릴 필요가 없었다.
이민호가 여러 장수들에게 간수군의 전공을 줄여달라고 부탁했고, 그의 정치적 위치를 이해한 제장들이 부탁을 들어주었다. 고경명은 의병들이 별 역할을 하지 못하고 관군이 잘 싸웠다는 내용으로 장계를 올렸다. 광주목사 권율도 전공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는 축에 들었다. 원래 역사에서 권율은 행주대첩보다 이치전투를 더 높이 쳤다는 이항복의 기록이 있었다. 방어사 곽영은 주로 다른 장수들의 전공을 칭찬하는 식으로 장계 내용을 채웠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이 올린 장계를 다 읽어본 조정 대신들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왜군이 스스로 자멸한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관군과 의병이 합동작전으로 대첩을 거둔 만큼, 참전한 장수들은 고경명부터 시작해 큰 상을 받을 수 있었다. 김제군수 정담과 나주판관 이복남은 이 전투로 인해 승진했고, 권율도 몇 달 후에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했다.
전주 쪽에서 수레 수십 량이 몰려와서 조선군 전사자들을 집이나 고향으로 운구했다. 모두 승첩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응모한 백성들이 노고를 보탰다.
전염병이 우려돼서 왜군도 한 곳에 매장하기로 했다. 수급을 베어 바치지 않더라도 전리품으로 무기와 갑옷이 엄청나게 쌓였으므로 전공에 대한 증거로 충분했다.
“고 현령! 의병군 소속 전령을 쓸 수 있겠습니까? 역참이 끊긴 것 같아서 현령께 부탁하오.”
원래부터 예의바른 사람인 고종후가 이민호를 대하는 자세가 더욱 달라졌다.
“이 대감께서는 필요한 전령이 몇 명이든 얼마든지 활용하십시오. 만약 전령이 부족하다면 저도 말을 타고 달리겠습니다. 하하!”
“농담 마십시오. 현령은 의병을 이끄셔야죠. 도망간 왜장의 목에 조정에서 내릴 포상 외에 내가 따로 사재를 털어 상금을 걸까 합니다. 왜장이 남동쪽으로 도망갔을 테니 경상도 의병들에게 널리 알려주시오. 늙은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을 사로잡거나 죽이면 백은 일만 냥을 주겠다고 말이오. 죽거나, 살거나.”
이민호가 고바야카와 가문의 대장기인 마인을 그린 문서를 넘겨주었다. 곧 전령들이 경상도에서 활약하는 여러 의병부대에 당도하자 경상우도 전체가 뒤집혔다. 경상도 의병들은 물론 관군과 백성들까지 눈에 불을 키고 고바야카와를 수색했다.
금산이 왜군의 진격로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불행이었다. 부산포로 향하는 모든 길이 막히자 고바야카와는 환갑을 일 년 남기고 거창의 깊은 산골에서 자살했다. 모리 가문의 실질적인 분가의 가주로서 충신이면서 독립적인 다이묘이며 전라도 침공을 담당한 6군의 대장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그의 시신은 우연히 산척들이 찾아내 수급을 베고 갑옷을 벗긴 다음 통제영에 가져와서 은자 일만 냥을 받아갔다. 거창의 산척들은 왜장을 잡거나 죽이면 가선대부의 품계를 준다는 조정의 발표를 알고 있었음에도 벼슬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장을 찾았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사실대로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상금으로 받은 일만 냥도 의병부대에 쾌척했다.
관군과 의병은 수레에 전리품을 가득 싣고 전주로 개선했다. 왜군에게 전주가 함락될 줄 알고 마음 졸이던 백성들은 뜻밖의 대첩 소식을 듣고 아군이 개선하기 이미 며칠 전부터 기뻐 날뛰고 있었다. 관군과 의병이 전주에 입성하자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그 동안 전사자들이 수레에 실려 귀환할 때마다 모여서 눈물을 흘리던 전주의 사녀(士女)들이 이때 처음으로 활짝 웃으면서 개선하는 군사들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이민호와 계복도 꽃다발을 목에 걸고 실실 웃으면서 김제로 향했다.
이민호는 7월 중순에 전라좌수영에 돌아왔다. 조선 수군의 3차 출동을 떠났던 부친이 이미 돌아와 입에서 침을 튀기며 수군의 활약에 대해 이민호에게 잔뜩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민호도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삼도수군통제영 함대는 견내량에서 대첩을 거두고 한산도에 표류한 왜군 400여 명을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응화가 외륜선들을 이끌고 배후를 틀어막아 왜선들은 단 한 척도 빠져 나가지 못했다고 자랑했다.
“소원 푸셨네요. 좋으시겠습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이걸 읽어봐라.”
통제사 이순신이 쓴 장계초를 이응화가 보여주었다. 통제영 도병방을 구워삶아 몰래 필사한 장계 사본이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왜장의 목을 베었는데 별로 높은 장수 같지 않아 통제사 이순신은 장계에서 협판안치라는 이름만 잠깐 언급하고 말았다. 평수가라는 왜군 대장의 부하 장수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이것은 왜군 포로들을 심문해 얻은 정보였다.
삼도수군 연합함대는 견내량 대첩 이틀 후 안골포에서 또 한 번 대첩을 거두었다. 이민호가 그랬던 것처럼 이응화도 간수군들과 함께 안골포의 배후에 상륙했다. 그리고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며 총질을 해대서 왜군을 거의 몰살시켰다고 했다.
연합함대는 그것으로 출동을 끝내지 않았다. 다음 날 낙동강 하구에서 일본 수송선 30척을 불태운 다음 다시 부산포를 공격했다. 부산포는 전쟁이 난 이래 세 번째로 불타올랐다. 버티다 못한 왜군이 상륙 거점을 부산에서 울산으로 옮길 예정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왜군이 절영도에 대한 방비를 튼튼히 해서 아예 왜성을 쌓고 있었다. 완공이 되지 않아 간신히 점령했지만 이곳을 공격하는 동안 간수군 31명이 전사했다. 간수군이 결성된 이래 한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이치에서도 10명, 금산성 전투에서는 12명이 죽었다. 간수군에 생긴 결원은 바로 채워졌지만 간수군도 왜군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만큼 항상 안전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안골포해전이 있던 7월 10일에는 우척현에서 거창 산척들이 산길에서 왜군을 포위해 큰 전공을 세웠다. 7월 17일에는 명나라 요동 부총병 조승훈이 평양성을 탈환하려고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압록강을 넘어 돌아갔다. 7월 24일에는 영천에서 권응수와 경상좌도 의병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민호가 조선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쓰다 보니 한 편 더 늘어났습니다. 세 전투에 대한 정리를 끝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