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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39화 (88/1,000)

00139  21. 웅치전투  =========================================================================

세 시간쯤 지나 새벽이 다 돼서 김제군수 정담이 기마병을 이끌고 돌아왔다. 기마병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정담과 기마병들은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정확한 것은 모르겠지만 야습이 크게 성공한 것 같았다.

그리고 말에서 내린 기마병들은 물을 항아리 째로 들이마신 다음 그대로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뻗어버렸다. 정담도 이민호에게 한 번 씩 웃어준 다음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즉시 코를 고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대단하다.”

“멋져요.”

이민호와 민희, 민영은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기마병이 야습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저들은 마치 어느 역사서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정예 기마병들처럼 야습을 성공시켰다.

다음 날 아침, 언덕 아랫길이 왜군의 기치와 병장기로 가득 찼다. 웅치로 몰려오는 왜군이 일만 명이라고 들었는데 이민호가 보기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 같았다. 이민호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 겁이 많이 났다.

“많다. 정말 많아.”

“오랜만에 총열이 녹을 정도로 쏴보겠군요.”

고산국을 세우고 나서 얼마 후 계복이 진짜로 총열이 녹을 정도로 연속 사격을 했던 적이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찮은 원주민 마을 대표들을 모아놓고 계복이 허수아비 표적을 향해 500발을 연속 퍼부었다.

총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허수아비가 산산 조각난 다음 대표들은 조용히 돌아갔다. 그리고 원주민 마을에 다시는 불온한 분위기가 감돌지 않게 되었다.

- 타다다다다당!

왜군 조총병들이 일제히 조총을 발사하는 순간 하얀 연기가 왜군 진영을 뒤덮었다. 조총병들이 장전하려고 대나무방패 뒤로 물러선 사이 궁병들이 나와서 화살을 날렸다. 조선군의 하단 방어선에 배치된 의병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목책 뒤에서 묵묵히 버텼다.

총격이 다섯 번쯤 이어진 다음 대열을 이룬 왜군 창병들이 목책을 향해 전진했다. 바로 이때 의병들이 활을 쏘아 창병들 몇을 쓰러뜨렸다. 이에 대응해 왜군 조총병과 궁병들이 전진해서 의병들에게 활과 총을 쏘자 조선군에서 사상자 몇이 발생했다. 그러나 의병들의 반격에 왜군 조총병과 궁병들은 더 많은 숫자가 쓰러졌다.

그 사이 왜군들이 1차 방어선에 거의 접근했다. 왜군 창병들이 창대를 높이 치켜들더니 목책 너머 의병들을 향해 창대를 내리쳤다. 의병들은 주로 활을 쏘아, 그리고 단창과 곤봉을 휘둘러 왜군이 목책을 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나 병력 차가 워낙 커서 의병들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추세였다.

“듣기로 대감이 이끌던 간수군 300명이 왜군 500명을 상대로 단지 다섯 번 쏘아서 몰살시켰다고 들었습니다.”

백마를 탄 김제군수 정담이 이민호에게 다가왔다. 야습을 나간 장수들과 기마병들은 늦잠을 자서 왜군들이 몰려올 때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당항포에서 말이오? 그곳은 평지이고 장애물이 없어서 가능했지요.”

“이곳은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보고 쏠 수 있습니다. 훨씬 유리하지 않습니까?”

“물론 밑에서 위를 보고 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위에서 쏜다 해서 평지보다 명중 확률이 더 높아지지는 않을 거요. 활 공격과 달리 총은 거의 직선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표적이 크게 보일수록 좋고, 적의 몸이 겹쳐질수록 맞을 확률이 높아진다오.”

“과연! 대감께서는 모든 것을 실제로 알고 계시는군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감께서 그저 돈으로 모든 것을 사고 간수군도 돈으로 키웠다고 쉽게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대감께서 많은 것을 알고 직접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내는 과정 중에 부수적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해야겠지요.”

“자랑은 아니오만 비슷하오. 그런데 지휘는 하고 계시는 거요?”

“황 의병장이 적당한 순간에 퇴각하기로 미리 약속했습니다.”

이민호는 작전회의 때 빠지는 바람에 작전의 대체적인 내용만 알지 실제 어떻게 진행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가장 하단의 제1 방어선에서는 의병들이 왜군들과 창칼을 맞대고 싸우고 있었다. 방어선 한쪽이 무너지려는 순간이었다.

- 지잉~

징소리가 울리자 의병들이 일제히 뒤로 돌아 제2 방어선으로 물러섰다. 왜군과 의병이 뒤섞여 싸우다 갑자기 퇴각해서 후퇴 중 손실은 적은 편이었다. 왜군들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그 다음 제2 방어선으로 몰아쳤다.

그러나 왜군은 제2 방어선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었다. 나주판관 이복남과 해남현감 변응정이 지휘하는 관군이 활을 쏘고 그 사이 빈틈을 제1 방어선에서 후퇴한 의병들이 틀어막았다.

전투는 한 시간 넘게 계속됐다. 싸움 구경이 재미있다지만 손 놓고 구경하는 것도 지겨워질 참에 왜군이 퇴각했다. 길게 봐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조선군이 승리한 셈이었다.

병사들이 왜군의 수급을 베려고 방어선에서 나가려는데 왜군 쪽에서 빨간 풍선 같은 것을 멘 기병이 조선 진영에 접근해서 외쳤다. 어눌하지만 분명한 조선말이었다.

“고바야카와군의 맹공을 훌륭하게 막아낸 조선의 장수는 들으시오! 부상자를 구호하고 어지러워진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한 시진 동안 휴전을 하는 게 어떻겠소?”

방어선에서 쏘아진 화살 한 발이 허공을 날아가 주변 땅에 꽂혔다. 그러나 말만 조금 놀랐을 뿐, 왜군 전령은 꼿꼿이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서 정담의 군관들이 말렸다.

“불리하니까 하는 수작입니다, 사또! 당연히 왜적의 수급을 베어야 합니다. 그래야 수하들이 전공을 인정받고 혹시나 왜적에게 밀려 이곳에서 물러서더라도 패전 책임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별로 의미가 없는 말씀이오. 왜군 전령은 들어라!”

백마를 탄 정담이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군관이 정담을 사또라고 불러서 이민호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고을 원님이 아닌 특정 전쟁터에서 사또라는 호칭은 최고 지휘관에게만 붙기 때문이었다. 이민호는 품계만 높았지 최고 지휘관은 아니었다.

이민호는 마음대로 지휘할 수 있는 직할군이 좋았다. 그러나 이민호가 조선에 있는 동안 최고 지휘관을 맡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맡은 중추부 관직이야 원래 한직이고, 조방장(助幇將)은 이름부터가 전형적인 부장급 직책이었다. 그리고 최고 지휘관이 될 기회가 있더라도 이민호는 스스로 자제해야 했다.

“말씀하시오.”

“방금 전령이 말한 대로 하라! 허나 이곳은 우리의 성채, 사상자를 수습하려는 왜병은 비무장으로 오도록 해라!”

“고맙습니다. 무장을 하지 않은 하인들을 들여보내겠습니다. 사또는 진정한 무사이십니다.”

잠시 사상자를 옮기느라 휴전이 선포되었다. 조선군은 무너진 목책과 방패를 고치고 화살을 날랐다. 그 사이 바로 앞 제1 방어선에 왜인들이 들어와 사상자를 실어 날랐다. 일부 조선군 사상자는 이미 제2 방어선으로 옮긴 다음이었다.

이 날 오후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왜군은 오랜 행군에 지쳐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날 밤에 김제군수 정담이 또 다시 야습에 나섰고, 왜군이 진영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에 매복을 했지만 뚫고 들어가 진영 곳곳에 불을 질렀다.

세 시간 후에 돌아온 기마병들은 100명으로 확 줄어들었다. 또 다시 정담과 기마병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코를 골았다.

7월 8일이 되었다. 왜군은 오전부터 본격적으로 공격해왔다. 전 날은 휴식과 공성장비 제작을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왜군에게 소규모 전초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주었다.

첫 총성이 울리고 나서 제1 방어선이 단 5분도 버티지 못하고, 후퇴도 제대로 못하고 그야말로 와해되어 버렸다. 의병들이 제2 방어선으로 황급히 후퇴했을 때는 절반도 살아남지 못했다.

- 타타탕! 타탕!

대나무를 둥그렇게 엮은 방패를 앞세우고 왜군들이 끊임없이 몰려왔다. 조총은 허연 연기를 대기 중에 흩뿌려 거의 연막탄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관군과 의병들이 활을 제대로 쏘지 못할 정도였다.

“끼요옷!”

짙은 연막의 도움을 받아 왜병들이 칼을 휘두르며 제2 방어선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나주군과 해남군이 막아냈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잠시 후 제2 방어선도 아주 간단히 돌파되고 말았다.

김제군수 정담이 징을 치자 패주한 관군과 의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제3 방어선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군사들은 제3 방어선에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니라, 겁에 질려 언덕을 넘어가 도망쳐 버렸다. 나주판관 이복남과 해남현감 변응정이 막으려 했으나 막지 못했고, 결국 이 두 사람도 병력을 추스르겠다면서 언덕길을 넘어가 버렸다. 정담이 김제 병력만 이끌고 최후의 방어에 나섰다.

이민호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간수군 400명이 마지막 제3 방어선의 목책에 자리 잡았다. 1개 대 25명씩을 왜군의 우회공격에 대비해 언덕길 좌우 산에 배치시켜 놓아 이들은 방어에 참가하지 않았다.

“쏴!”

- 타타타타탕!

“자유 사격!”

- 타타탕! 탕! 타탕!

지금까지 조선군이 퍼붓던 총통과 화살 공격보다 훨씬 밀도가 높은 화력이 왜군을 덮쳤다. 총격 이후의 재장전 시간을 노리고 쇄도하던 왜병들이 차례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짧은 시간에 왜병들이 숱하게 죽어가자 왜군 쪽에서 나발을 불어 퇴각을 명령했다. 왜병들이 순식간에 조선군의 방어선에서 빠져 나갔다. 상대는 모리 가문에서 지장으로 유명한 고바야카와의 군에서 승려 외교가로 활약한 안코쿠지 에케이가 지휘하고 있었다.

“아, 대감.”

“말씀하시오.”

“무섭습니다. 대감께서 아군이라는 사실이 정말 다행입니다. 하늘에 감사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이라면 몰라도 이틀 연속 왜군 진영에 야습을 감행한 김제군수 정담이 하는 말이었다. 이민호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그때 왜군 진영에서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정 군수, 저길 보시오. 저기 말 타고 승려 복장을 한 왜인이 저 만 명의 군세를 지휘하는 왜장이오.”

“불교 승려가 승군도 아닌 정규군의 장수를 맡습니까?”

“왜놈들이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소?”

“하긴 그렇습니다.”

북소리에 맞춰 왜군이 다시 몰려들었다. 이런 지형에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왜군은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병력의 우위를 믿고 끊임없이 돌격해왔다. 조선군은 김제군 병력과 간수군을 합해 1500명을 살짝 넘는 수준이었고, 왜군은 만 명을 넘어섰다. 언덕길 아래가 왜병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곳은 언덕길이었다. 조선군은 목책 등 방어시설을 완벽하게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고, 왜군은 빠른 시간 내에 웅치를 넘어 전주를 공략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시와 지리의 이득이 조선군에 있었고, 간수군의 화력은 왜군에 비해 훨씬 강력했다.

“유탄 사수, 자유 사격!”

- 퐁!

계복이 유탄발사기를 쏘았다. 하얀 실연기를 이끌고 날아간 조약돌만 한 탄환이 왜병들 한가운데에서 터졌다. 유탄의 살상력은 수류탄에 맞먹어서, 밀집한 왜병들은 한꺼번에 10여 명씩 쓰러졌다. 계속이 유탄을 연속 발사하자 언덕길 아래는 왜군의 시체로 담이 생길 정도였다.

그래도 왜병들은 무수히 죽어가면서도 끊임없이 돌격해왔다. 언덕길에 붉은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거리가 더 가까워지자 간수군들이 수류탄을 던졌다. 공중에서 수류탄끼리 부딪친 경우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펑펑 터지자 왜군의 진격이 갑자기 멈췄다. 왜병들은 호로쿠, 즉 포락이라 부르며 수류탄을 두려워했다.

- 타타탕! 펑!

“드디어 왔군.”

이민호가 고갯길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웅치 좌우의 산에서 총격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회 공격하는 왜군을 언덕길 좌우에 배치된 간수군들이 포착하고 공격하는 소리였다.

“왜적이 물러섭니다!”

“이겼다. 와아~”

군사들이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짧지만 치열했던 격전이 드디어 끝나고, 이들은 살아남은 것이다.

전황이 너무 갑작스럽게 변했다. 왜군이 물러서더니 갑자기 동쪽으로 달려갔다. 왜군에 아직 병력이 충분히 많았으니 겁에 질린 것은 절대 아니었고, 뭔가 큰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나 봅니다.”

“고경명 의병군이 금산성을 치고 있나 봅니다.”

“아!”

정담이 감탄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정담은 기병을 모아 퇴각하는 왜군의 추격에 나섰다.

이민호는 간수군들을 모아 말에 태웠다. 어서 이치로 가서 권율군을 지원해줘야 했다. 그러나 이치에서도 왜군이 물러섰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민호가 활동한 덕에 아주 약간 역사가 변했다. 고경명군은 원래 역사와 다르게 이틀 빨리 금산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해동상단으로부터 보급 지원을 받은 의병과 관군들은 예상보다 일찍 금산성에 도착해, 어제 저녁부터 공격 중이었다.

고바야카와군의 전체 보급품이 쌓인 금산성을 잃는다면 고바야카와군은 부산까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 치열하게 진행되는 전투를 그치고 서둘러 도망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 작품 후기 ============================

주인공이 조선 관직을 받고 하는 마지막 전투입니다.

금산성까지 이틀 더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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