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37화 (8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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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웅치전투

6월 23일, 이민호는 계복을 연도로 보내 전선의 함포로 대마도 이즈하라를 공격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대마도 주변에 왜선 수십 척이 밤에도 물 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펼치고 있어서 계복은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억지로 왜선들을 물리치고 대마도를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인명피해가 예상돼 포기했다고 한다.

이민호는 계복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나중에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 나서 일본 침략군의 보급선인 대마도와 이키 섬, 그리고 나고야를 한꺼번에 치기로 했다. 나가사키에서 겐타로가 보낸 편지에는 풍신수길이 현재 나고야에 있다고 했으니 한 번 혼쭐을 내줄 생각이었다.

“분점주는 어째서 그리 우거지상을 쓰고 계시오?”

이민호가 좌수영 소포의 해동상단 분점 사무실에 들렀다가, 요즘 돌아가는 일을 빤히 알면서도 분점주에게 농을 건넸다. 감영이나 수영처럼 인원이 충분한 행정관서가 아닌 일개 상단 분점에 경상우도의 보급 문제를 맡겨놨더니 아주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외륜선을 모는 사공들도 바쁘지만 사무직원들도 계속된 밤샘으로 눈 밑이 시꺼멓게 변했다.

마포에 있던 해동상단 본점은 한성이 함락되기 전에 전라도 김제로 옮겼고 그곳에서 충청도와 경기도 이북의 관군에게 군량을 공급하고 있었다. 아직은 조선 팔도 통틀어 쌀이 풍족하기 때문에 관아와 사창의 곡식을 이동시키는 일이 중요했고, 그에 반해 수레와 인력이 태부족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왜군의 진격로를 가로질러 쌀을 운반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현재 시점에서는 왜군과 직접 전투를 하는 것보다는 각 고을의 관아 창고에 있는 쌀을 왜군에게 빼앗기지 않는 일이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민간 사창에 보관된 쌀은 전쟁 직전에 해안으로 옮겼으나 관아의 쌀은 이민호가 뭐라 할 수가 없어 전쟁이 터진 후에야 옮기는 작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왜군이 몰려오면서 백성들이 피난을 가는 바람에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할 수 없는 충청감영에서 해동상단에 손을 벌렸고, 상단에 고용된 인부들은 점령지 관아에서 쌀을 빼오는 일까지 해야 했다.

행재소를 따라다니며 왕실과 조정 대신들에게 지공을 계속하던 외륜선과 따로, 본점에서 직원 수십 명을 파견에 의주에 분점을 냈다. 바로 이 의주 분점이 평양성을 공격할 명나라 군대에 대한 군량 보급 임무를 맡았다.

“도련님, 아니 대감마님. 어서 오십시오. 의병들에게 군량이 거의 무한대로 들어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2천 명이면 석 달에 2천 석이면 충분한데도 2만 석을 요구합니다. 일꾼들 동원할 필요 없게 주둔지에 운송을 해줘도 그렇습니다.”

“의병들이 지키고 있는 피난민들도 먹어야 하니까요. 그 쌀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지원해주시오. 다만 왜군에게 빼앗기지만 말라고 강조하시오.”

삼남 의병, 그 중에서도 왜군이 점령하지 못한 전라도는 상관없는데 경상도와 충청도 의병들에게 들어가는 군량이 만만치 않았다. 충청도 해안지방과 경상도 서부의 관아 창고에 군량이 충분하니 관아에서 의병들에게 나눠주면 좋겠지만, 몰려드는 피난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느라 관아에서도 여유가 없었다.

세창과 관아의 환곡창 및 사창, 민간의 사창까지 계산하면 충청도와 경상우도에 분명히 곡식이 남아돌아야 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굶어죽겠다고 사람들이 난리였다. 지역에 따른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

그래도 하지감자가 이미 출하됐고 고구마도 곧 수확될 시기이므로 피난민들이 굶어죽을 염려는 없었다. 철부지 아이들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그것도 백성들을 보살펴야 할 양반이 자기 가족만은 흰쌀밥을 먹어야겠다고 고을 관아에 와서 생떼를 부리다가 쫓겨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다만 경상도에 감자와 고구마를 온 산마다 심어놓은 것이 지금은 큰 문제로 부각됐다. 부산포가 두 번이나 불탄 이후 심각한 군량 부족 사태에 빠진 왜군들이 그 감자를 캐먹으며 버틴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감자를 생으로 먹다가 탈도 많이 났는데 지금은 감자를 구워먹는다는 정보 보고가 꾸준히 들어왔다. 왜병들이 매일같이 감자를 구워먹느라 입 주위가 새까매서 의병들이 한창 싸우는 중에 갑자기 배를 잡고 웃다가 칼이나 조총에 맞아죽는 경우가 꽤 생겼다고 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경상도와 충청도 감영에서 자기들도 의병처럼 백미를 무상 제공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쌀이 남아돌면서 공짜로 달라는 심보는 뭔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마도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해 지역에 따라서는 관군에게 군량 지급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전시에 항상 발생하는 문제라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후방이나 보급창에는 탄약과 보급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정작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전방에는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급하면 좀 도와주세요. 다만 전쟁이 끝나면 이자를 붙여서 돌려달라고 하시오. 의병과 진주성, 경상우병영에는 계속해서 무상으로 공급하시오. 소포 분점이 가장 중점을 두고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만 사실 상단의 운송 능력만으로는 버겁습니다. 중형 외륜선이 20척쯤 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런! 나는 사흘 후에 외륜선을 다섯 척쯤 준비해놓으라 말하려고 온 것인데 말이오.”

“그건 불가능합니다! 며칠 안으로 세 척 이상 모을 수 없습니다.”

이민호가 고산국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중형 또는 대형 외륜선 남는 것들을 몇 척 정도 소포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고산국의 배는 모두 안남에서 해중국으로 쌀을 수송하는 일에 동원되고 있었기 때문에 남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좌수영으로 몇 척 보내 급한 불부터 끄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전선들도 7월 중순까지 연도로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대마도와 이키 섬, 그리고 나고야를 한 번 제대로 칠 계획이었다.

“비좁겠지만 세 척이라도 준비하시오. 25일에 간수군 500명을 충청도 금산으로 수송하는 문제요.”

“간수군이 타는 대형 외륜선 여덟 척이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수영, 아니 통제영에 남겨 둬서 왜적을 잡아야지요. 간수군 절반을 전주 방어전에 지원하라는 통제대감의 명령이오. 본점에도 이 상황을 알리시오.”

이민호는 부친 이응화가 7월 8일로 기억하는 한산대첩에 참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해전은 이민호가 없더라도, 심지어 외륜선 8척이 없더라도 이순신이 연합함대를 지휘해 이기게 되어 있으니 이민호가 반드시 참가할 필요는 없었다.

해전에 참가하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알고 있는 이응화에게 해전에서 빠지라고 할 수도 없어서 결국 이민호가 웅치에 지원하러 가기로 했다. 비슷한 시기에 중요한 전투가 동시에 벌어져서 어쩔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전라도가 위태롭군요. 마침 여기 대방 어른이 대감마님께 올리는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

“이리 주시오. 대방도 한창 바쁘겠군요.”

해동상단 대방이 보낸 편지 내용은 임금의 몽진에 대한 보고가 주를 이뤘다. 6월 15일에 평양성이 함락되고 임금의 대가는 영변과 박천, 가산 등을 떠돌다가 의주로 향했다. 세자에게 왕위를 이양한다는 내선(內禪), 임금이 요동으로 들어간다는 내부(內附) 등 평소라면 매우 중대한 일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지나가는 것처럼 가볍게 나오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다.

6월 22일에 임금을 모신 대가가 의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평양이 포위됐다는 소문을 들은 의주 백성들의 인심이 흉흉하던 민감한 시기에 때마침 명나라 군사들이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 명나라 군사들이 의주성을 마치 습관처럼 노략질해 버렸다. 명나라 장수들이 황급히 막았지만 의주 백성들은 산골로 피난을 떠나 버리고 의주성은 텅 비게 되었다. 결국 얼이 빠진 의주목사가 아전 겨우 몇을 데리고 대가를 맞이하는 불상사를 연출했다.

이때부터 선조 임금이 주도해 명나라에 내부하는 이야기가 조선 조정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예조판서 윤근수와 풍원부원군 류성룡이 임금을 극력 말리며, 함경도나 하삼도로 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임금은 압록강에 배를 준비시키는 등 23일에는 거의 명나라로 내부할 것을 결정짓고 있었다.

남해안 수군과 백성들은 수군의 계속된 승리에 들떠 있었지만 바로 이때 의주 조정은 나라가 곧 망하는 줄 알고 있었다. 조선을 침공한 왜군들이 군량 부족 문제에 시달리며 곧 전쟁에 패배할 것으로 믿은 것과 똑같이, 조선의 임금과 조정 대신들도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24일에 조정 대신들이 필사적으로 말려서 일단 임금이 요동에 내부하는 것만은 연기되었다.

바로 이때 경상도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나 전라도로 향하던 제6군 고바야카와군을 곳곳에서 요격했다. 안코쿠지 에케이가 지휘하는 고바야카와군은 김면, 정인홍, 곽재우, 정기룡 등이 지휘하는 의병들에게 막힐 때마다 이리저리 진격로를 바꾸며 충청도 남동쪽의 금산 방향으로 이동했다. 경상도에서 서쪽으로 이동 중인 안코쿠지 외에 한성에 주둔하던 고바야카와가 본군을 이끌고 금산 방향으로 남하했다. 목표는 전주였다.

이 정보는 곧 전국에 퍼졌다. 왜군의 침공 목표가 된 전라도에서 병력을 급히 모아 북동쪽 이치와 웅치로 이동시키는 것은 물론 고경명의 의병군과 전라도방어사 곽영이 이끄는 관군도 왜군을 막기 위해 북진했다.

충청도 의병과 관군들이 금산을 향해 남하했으나 도중에 충청도 관군에 문제가 생겨 조헌의 의병만 전진을 계속했다. 심지어 진주에서도 김시민이 병력을 이끌고 북상할 정도로 금산은 전국적으로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다지만 삼도근왕군이 용인에서 패전함으로 인해 전라도와 충청도에 큰 후유증을 남겼고, 두 지역은 아직 그 후유증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5만 또는 6만 대군이 어이없이 흩어진 이후 다시 병력을 소집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와키자카는 <협판기>에서 조선군 천 명을 참수하고 2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자랑했는데 전라도와 충청도가 느끼는 인명피해는 어마어마했다. 삼도근왕군으로 소집됐던 5만의 전라도 군인들 집에서는 가장이 용인에서 전사했다면서 소집을 거부했다. 용인에서 돌아온 군인들도 부상을 당했다고 핑계를 대면서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기껏 모여서 용인까지 갔는데 한 번에 무너졌으니 창피하고 다시 싸울 의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왜군은 전라도로 몰려오는데 막을 병력이 없었다. 그래서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일부 병력을 뽑아서 금산 방향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결국 이민호가 나섰다.

6월 말, 이민호는 간수군 500명을 이끌고 해동상단의 중형 외륜선 3척에 나눠 타고 강경으로 향했다. 왜군이 노리고 있다는 금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간수군 천 명 중에서 나머지 절반과 이응화는 해전에 참가하기 위해 전라좌수영 겸 삼도수군통제영에 남았다.

그러나 6월 23일에 금산군 관아가 이미 왜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이민호가 강경에 도착하고 나서야 들었다. 강경에서 내린 이민호를 기다린 사람은 말 500여 마리를 몰고 온 해동상단 본점의 대방이었다. 간수군들이 탈 말에는 휴대용 식량까지 완벽하게 준비돼 있었고 각 대별로 5인용 천막까지 나눠주었다.

이민호는 대방이 마련해준 말에 타고 500명의 간수군을 이끌고 전주 동쪽의 웅치로 향했다. 그 북쪽 이치는 광주목사 권율 장군이 지키고 있고 역사책을 본 이민호는 권율이 이치전투에서 승리할 줄 알기에 1개 대, 25명만 지원병력 명목으로 보냈다.

간수군을 기마병으로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민호도 기마전투는 애초에 포기했고 승마보병으로 쓸 작정이었다. 그러나 보급 문제에서 각종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김제에서부터 웅치까지 보급선을 유지하는데 상단이 모은 일꾼이 3천 명이나 투입되고도 모자라 전주 백성들까지 도와주러 나서야 했다. 조선군이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이동하면서 전투하는 것이 조선군 최대의 약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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