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4 19.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 =========================================================================
“임무는 그럭저럭 완수한 것 같다. 준비를 제대로 못했더니 실전에서 이렇게 답답하다.”
이민호는 포를 쏠 때 도와준 민희, 민영과 함께 북쪽 해안에 펼쳐지는 장관을 구경했다. 포성이 메아리치는 부산포 하늘은 온통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부산포에 정박한 왜선은 약 500척에 달했는데 300여 척은 시뻘건 화염에 휩싸이거나 이미 시커먼 숯으로 변해 바다에 무너지고 있었다. 나머지 왜선들도 곧 화마에 휩쓸릴 것 같았다.
“그래도 잘하셨어요. 진에 숨어서 판옥선에 조총을 쏘던 왜군이 다 도망갔잖아요. 조선 수군에 피해가 적은 것은 주인님의 공이에요.”
“주인님! 왜선 수백 척이 한꺼번에 불타고 있어요. 오늘 밤에 자다가 단체로 오줌 싸겠어요. 헤헤!”
이 상황에서도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끊임없이 왜선에 불화살을 쏘고 포격을 가했다. 화포에 비해 화약이 많이 들어가는 신기전도 아낌없이 날렸다. 이동할 때 보급품의 무게 제한을 받는 육군과 달리 배에 화약을 싣고 다니는 수군에서는 화포를 실컷 쏠 수 있었다.
당시 흑색화약은 염초와 유황, 목탄을 일정 비율로 섞어 만들었고, 유황은 수입품이니 염초 제조에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이민호에 의해 조선 통틀어 전라좌수영에서만 유일하게 부뚜막이나 처마 밑의 흙이 아닌 길 가의 흙을 모아 초석을 대량으로 끓이는 개량된 염초 생산 방법을 쓰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고산국에서 만든 염초를 해동상단을 통해 전라좌수영에 대량으로 수송했다. 전쟁 준비에 광분하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필요 이상으로 염초를 사 모았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전라감사와 전라병사까지 좌수영에 염초를 달라고 애걸하는 일까지 생겼다. 전라좌수영에서 경상우수영으로 넘긴 염초도 절반 이상이 경상감영으로 들어가 이것을 경상도 전 지역의 군과 의병부대에 나눠주고 있었다.
염초로 화약을 만들려니 당연히 유황에 대한 수요가 대폭 늘어났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유황이 나지 않고 수입해야 했고, 해동상단이 고산국에서 유황을 수입해 수영과 여러 고을에 판매했다. 이민호가 수영이나 감영, 고을 관아에 유황을 무료로 나눠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민호가 투자한 보람이 있어 남해안의 수영과 고을, 수군 진포들은 예전에 비해 무척 부유해졌다. 사창과 염전, 간척지로 인해 수영과 관아 창고에는 쌀과 면포가 가득 쌓였고, 유황과 화포 제조용 구리를 살 자금이 넘쳐났다. 해동상단은 여러 수영이나 관아의 사창에서 남는 면포를 받고 유황과 구리를 판매했다. 조선 면포는 일본에 가면 가격이 몇 배로 뛰어오르니 이민호가 수영과 고을 관아를 상대로 폭리를 취하는 셈이었다.
이민호는 함포를 분해한 다음 말에 싣도록 했다. 무거운 함포 부품을 나눠 싣게 하자 말 네 마리가 머리를 뒤흔들면서 싫어하는 티를 냈다. 하지만 간수군들이 채찍질하면서 억지로 실었다.
간수군들이 퇴각 준비를 끝내고 외륜선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데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민호가 초량목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지 영감! 왜군에 기마대가 있습니다! 말에 탄 왜적들이 왜병은 하나도 없고 전부 왜장들입니다.”
간수군 대정이 신기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로 말에 탄 왜군 3백여 명이 절영도 건너편 부산포 땅을 달려 지나가고 있었다. 왜군이 기마대를 집중 운용하는 것은 이민호도 처음 보게 되었다.
일본에서 사무라이가 전쟁터에서 말을 타려면 어느 정도 높은 신분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조선에 투입한 병력 1400명과 지원 인력 1600명 합 3천 명 중에서 기마무사는 150명에 달했다. 참고로 뎃포 아시가루는 200명이었다.
지휘관이 말 탄 사무라이들을 모아서 운용할 수는 있으나, 이것은 고정적으로 편제된 부대가 아니라 필요할 때 임시로 편성되는 조직이었다. 고정적인 기마대의 존재를 긍정하는 일본인 학자도 있다.
“뭐해? 사거리 내에 들어왔을 때 어서 쏴!”
- 타타탕! 탕! 타탕!
이민호가 명령을 내리자 멍청하게 서서 구경하던 간수군들이 정신을 차리고 사격을 시작했다. 기마무자(騎馬武者)들은 등에 깃발을 꽂거나 풍선 같은 모양의 호로(母衣)를 등에 지고 말을 달리고 있었다. 이런 눈에 띄는 장식 같은 것들 때문에 조준하는데 방해가 됐으나 간수군들은 이미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고 있었다.
유효 사거리 아슬아슬한 곳을 지나던 왜군 기마병들이 총탄에 맞아 서너 명씩 한꺼번에 거꾸러졌다. 왜군 기마대는 부산진성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가다가 갑작스런 측면 기습을 받고 놀라 대열이 마구 엉켰다. 그 사이에도 간수군들은 끊임없이 총격을 퍼부었다.
잠시 후 기마대가 전열을 갖췄으나, 간수군에게 반격하려 해도 해협을 건널 방법이 없었다. 간수군들이 계속해서 사격을 퍼부으니 사상자 몇 십 명을 더 남기고 왜군 기마대는 북쪽 부산진성 방향으로 도주했다.
“왜장 100여 명을 쏘아 죽였고 50명쯤은 중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저것들이 전부 왜장이라고? 순도가 높군 그래.”
“수급은 욕심나지 않지만 울긋불긋 칠한 갑옷은 갖고 싶군요. 주인 잃은 말도 많은데, 말은 원래 비싸지 않습니까?”
“우리 배들이 돌아오면 그때 챙기자.”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해질녘까지 왜선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나서야 싸움을 멈추고 절영도 방향으로 이동했다. 모처럼 멀리 부산포까지 왔으니 본전을 톡톡히 뽑으려고 욕심을 부린 셈이었다.
다른 배들은 먼저 가덕도로 향하고, 외륜선 8척만 초량목에 남아 왜군 기마대의 갑옷을 챙겼다. 주인 잃은 말도 잡아와서 외륜선마다 몇 마리씩 실었다.
노획한 말 몇 마리는 조선에서 흔히 쓰는 전마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일본에서 나는 작은 말이었다. 몸집이 작은 왜인이 타는 말이라 작다고 느끼기 어려웠으나, 조선 전마 옆에 서니 체구 차이가 확실히 드러났다.
그 사이 본진을 탈탈 털린 왜군들은 망연자실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육지에 올라와 간신히 살아난 수부들이 엉엉 울고 장사 밑천을 화마에 잃어버린 상인이 통곡을 했다.
왜군들은 조선 수군 연합함대를 추격하려고 해도 배가 없었고, 부산포 지역에 병력을 내린 외륜선을 공격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었다. 부산진성에 있던 왜군은 간수군들이 기마무자들의 갑옷을 벗기고 말을 잡는 동안에도 감히 성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간수군들이 갑옷과 말을 다 챙긴 다음에도 외륜선들은 부산포를 떠나지 않았다.
“포를 다시 조립하자. 모처럼 부산포에 왔으니 몇 발 쏘고 가야지.”
이민호의 주도 아래 간수군들이 동원돼 땀을 뻘뻘 흘리며 함포를 조립했다. 선미루 포가 위에 함포를 다시 세우니 무척 든든했다. 사공들이 포탄 상자를 나르는데 선체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이응화가 참견했다.
“공격할 곳이 남았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없네요.”
왜선 약 500척은 불타 가라앉았고, 방어진지라고 만들어놓은 목책과 토굴은 다 무너졌다. 멀쩡한 곳이라고는 부산진성밖에 없었으나, 그 성 내부에서는 화재가 발생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부산포는 며칠 만에 또 다시 화마에 휩싸인 셈이었다.
“이름이 부산(釜山)이라서 가마솥이 됐을까요?”
“조선에 부산이라는 지명이 백 군데도 넘을 거다. 민호 너도 수고했다. 나는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부친 이응화는 물론이고 이민호가 주변을 돌아보니 부산포해전에 참가한 간수군들이 전부 다 축 늘어져 있었다. 이민호는 절영도에 상륙했던 1개 대만 선수루와 선미루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선실로 들어가서 쉬라고 지시했다.
가덕도에서부터 하루 종일 전투에 시달렸던 간수군들이 마치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선실로 들어갔다. 이들은 미처 침대에 오르지도 못하고 바닥에 엎어져서 잠에 곯아 떨어졌다.
왜군 점령지인 부산포에서도 느긋하게 움직인 외륜선들은 한밤중에 가덕도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150척에 달하는 연합함대 소속 판옥선과 사후선들은 포구에 닻을 내리고 미동도 없었다. 마치 한 순간에 조선 수군 연합함대 전체가 유령선이 된 것 같았다.
이민호와 이응화는 이순신에게 호출을 받고 전라좌수영 좌선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가하러 단정에 올라탔다. 연합함대 통틀어서 몇 안 되는 생생한 사람 중에 하나인 이민호가 부친에게 물었다.
“그렇게 피곤하세요?”
“말 시키지 마. 대답은 물론 생각하기도 귀찮아.”
“아버지, 그렇게 피곤하시면 선실에 돌아가서 주무세요. 회의 결과는 제가 알려드릴게요.”
“나는 유군장이다. 회의에 빠질 수야 없지.”
좌선으로 가는 단정에서 이응화가 눈을 비비며 대꾸했다. 오늘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민호의 부친 이응화였다. 원래 역사에서 9월 1일에 벌어진 부산포해전과 비교하면서, 그때도 장쾌한 승첩이었지만 오늘은 얼마나 더 큰 승첩인지를 신이 나서 설명했다. 이민호는 이응화가 전공을 자랑하는 동안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러나 좌선에 도착하기 전에 이응화는 다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이민호가 부친을 등에 업고 상갑판까지 올라가야 했다. 다른 수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순신이 깜짝 놀라 물었다.
“춘부장께서 설마 부상을 당하신 건가?”
“주무십니다.”
“저런! 오늘 다들 무척 힘들었을 거야.”
이민호는 부친을 장대 앞에 내려놓고 여장에 기대어 자도록 앉혔다. 자든 말든 어쨌든 지휘관 회의에 참석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다.
오늘은 정말 바쁘게 움직였다. 아침 일찍 율포 앞바다 해전부터 시작해서 낙동강 하구에서 왜선 50척을 나포하고, 장림포부터 초량목까지 자잘한 해전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부산진성 앞에서 하루 종일 싸워서 왜선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부산진성과 그 동쪽 언덕에서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전투를 수행했으니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지치다 못해 탈진하는 게 당연했다.
“원래 이 정도 규모로 전투를 하면 얼마 안 가서 화약과 무기가 떨어지기 마련일세. 특히 우리는 화포를 많이 사용하는 수군이라서 더더욱 오랫동안 싸울 수 없지. 하지만 해동상단이 위험한 곳까지 보급을 해준 덕택에 우리는 충분히 더 싸울 수 있네. 그래도 이제는 한계에 닿은 것 같네. 군사들이 너무 지쳤어.”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민호와 수사 세 사람이 일제히 이응화에게 눈길을 돌렸다. 수군이 출동할 때 가장 기뻐하던 사람이 이응화였고 싸울 때도 가장 신이 나서 설치는 사람이 이응화였는데, 지금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이응화가 이 정도면 일반 수군들은 얼마나 지쳤을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연합함대에 가장 늦게 합류한 전라우수영 함대는 6월 3일에 당포에 도착했고, 오늘은 6월 6일 밤이었다. 하지만 전라우수영에서 출항한 함대가 당포까지 오는데 열흘 가까이 걸렸다. 다른 두 수영보다 바다에서 지낸 시간이 훨씬 더 길었던 것이다. 오랜 선상 생활에 지친 수군들의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다.
해동상단에서 부족함 없이 보급을 해줘서 수군들이 먹기는 참 잘 먹었다. 이 시대에 군사 1인당 1석으로 100일 동안 먹는 것이 병참의 표준이었다. 연합함대에서는 백미 정량을 소모하고도 추가로 건어물과 고기, 야채와 과일을 그 이상으로 군사들에게 먹였다. 그러나 아무리 잘 먹여도 선상에서 며칠만 생활하면 금방 지치는 게 사람이었다. 오늘 같은 치열한 전투가 없었더라도 이미 돌아갈 때가 지났었다.
“그래서 수사들과 이야기를 해봤는데, 내일 아침에 진을 파하고 각자 수영으로 돌아가기로 했네. 더욱 준비를 철저히 해서 다음에 또 출동해야겠지.”
“다음번에 출동할 때도 먼저 경상도 해역을 싹싹 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부산포를 치려고 하십니까?”
“하하! 적의 본진이며 교두보인 곳이니 부산포가 수군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는 것은 당연하네.”
“다음에는 대마도를 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음.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에 이중으로 신속을 하는데, 실제로는 일본 땅이나 다름없네. 조정의 허가를 받아야 될 걸세. 이번에 장계를 올리면서 문의해보겠네.”
전쟁이 일어나면 상대방 교전국 영토를 공격할 당연한 권리가 생기지만 그것은 정치적 판단의 영역이기도 했다. 평시에도 조정의 허락 없이 외국의 영토에 가는 것이 범죄이니 전시에는 더더욱 조정의 의향을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이민호는 수사 세 사람에게 절영도와 초량목에서 얻은 수급을 나눠주고 갑옷과 투구, 말도 나눠주었다. 하루 종일 승선 전투만 해서 전리품을 별로 얻지 못한 수사들이 기뻐했다. 특히 기마무자의 화려한 갑옷과 투구는 왜장이 입던 장비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7일 아침에 진을 파한 다음 각자 수영으로 돌아갔다. 전라좌수영 함대는 거제도 남쪽 항로를 타고 남동풍을 받아 그 날 저녁에 여수에 도착했다. 이민호는 오랜만에 편히 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