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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25화 (74/1,000)

00125  19.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  =========================================================================

불리할 때조차 과감하게 돌격함으로써 전세를 뒤집기로 유명한 왜군들도 좌우에서 펼쳐진 협공에는 버티지 못했다. 왜군들은 백여 구 넘는 시체를 남긴 채 결국 언덕에서 내려와 북쪽으로 몰려갔다.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허겁지겁 도주하는 왜군들을 향해 간수군들이 계속 사격을 가했다.

왜군들이 도망가는 길인 언덕 북쪽 해안은 이민호가 미리 보낸 3개 대, 75명의 간수군들이 매복한 곳이었다.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다급하게 도망가는 왜군들을 향해 수풀 사이에 숨은 간수군들이 총탄을 퍼부었다.

- 타탕! 탕탕탕!

엄폐물도 없는 갯벌에서 왜군들이 허무하게 쓰러져갔다. 그리고 왜군들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따라온 판옥선 몇 척에서 함포를 쏘고 활과 총 공격을 퍼부었다.

수군과 간수군의 협공을 피해 바닷가를 따라 도주한 것은 최악의 실수였지만, 간수군들이 잔뜩 몰려있는 동쪽을 뚫고 도망갈 수도 없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선택의 결과, 사무라이와 아시가루로 구성된 왜군 100여 명은 그곳에서 마지막 인원까지 최후를 맞이했다.

총에 맞고 쓰러져 피를 흘리던 서너 명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지만 간수군들이 다 쏴 죽여 버렸다. 점령지 마을과 읍성마다 노략질하던 침략군대가 자비를 바라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민간인에게 절대 폐를 끼친 적이 없고 군율이 엄한 부대라 해도 이럴 때는 다른 부대가 저지른 전쟁범죄까지 덤터기 쓰기 마련이었다.

“교대로 전진!”

이민호가 일어나서 부대를 이동시켰다. 외륜선에서 내려 상륙한 7개 려의 여수들은 각자 3개 대씩 지휘해 언덕으로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게 접근했다. 언덕에는 아직 살아있는 왜군들이 많았다.

겁이 나거나 부상을 당해 도망치지 못하고 언덕에 남은 왜군들이 헛된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군대가 조직력을 잃는 순간 이미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군 생존자들은 하나씩 총에 맞거나 총검에 찔려 죽어갔다. 부상자들은 간수군들의 총칼을 피해 북쪽의 가파른 언덕으로 몰려가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이민호는 깃발을 든 사공과 함께 언덕에 올랐다. 사공이 가장 먼저 언덕 정상에 올라 바다 쪽에서 공격 중인 판옥선에서 보이도록 전라좌수영 유군의 깃발을 휘둘렀다. 언덕에 대한 판옥선의 공격이 뚝 그친 대신 포격과 화살 공격이 왜선들에 집중됐다.

이민호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갯벌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왜선 12척에서 조총을 쏘거나 배 뒤쪽에 몰려 바들바들 떠는 왜인 수부들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그 사이 간수군들이 능선에 길게 자리를 잡고 사격준비를 마쳤다. 세키부네 상갑판의 판잣집 뒤에 숨어서 조총이나 기다란 일본 활을 쏘는 왜군들은 언덕의 주인이 바뀐 줄 모르고 있었다.

“조총수나 궁수를 먼저 쏜다. 쏴!”

- 타타타타탕!

이민호의 사격 명령에 맞춰 간수군들이 일제히 발포했다. 판옥선과 거북선에만 신경을 쓰던 왜군들이 등짝에 총알을 맞고 줄줄이 쓰러졌다. 간수군들이 두 번째 총탄을 장전했을 때는 남아있는 목표가 거의 없었다.

갑작스레 뒤에서 공격이 퍼부어지자 비무장인 수부들이 깜짝 놀라서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판옥선에서 배를 향해 화포를 쏘았고, 배에서 비명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대장군전 같은 통나무 화살 종류는 물론이고 커다란 공처럼 생긴 철환과 석환이 얇은 왜선의 판자나 대나무방패를 뚫고 지나다녔다. 중간에 사람이 걸리면 팔이고 다리고 다 날아가 버렸다.

이민호에게 눈짓을 받은 사공이 유군기를 흔들어 판옥선들에게 사격 중지 신호를 보냈고, 곧 사격은 멈췄다. 이민호가 왜군이 아닌 왜인들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너희들 아시가루가 아닌 수부로 징집됐지? 비전투원은 안 죽일 테니 걱정 말고 나와! 안 나오면 다 죽인다!”

왜선 12척 중에 10척에서 왜인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더 이상 총소리가 나지 않자 더 많이 쏟아져 나와 해변에 모인 왜인은 어느새 200명을 넘어섰다.

이민호가 간수군들을 데리고 언덕에서 내려오자 왜인 수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했다. 국가의 경계가 모호한 당시 일본인 수부들 입장에서는 기존 지배자들을 패배로 몰아넣은 이민호가 새로운 지배자인 것이다.

이민호는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행재소에 끌려간 다음 기술이 있는 왜인들은 화약과 조총을 만들 것이고, 검술을 알면 항왜부대에 배치될 것이다 그러나 국왕의 기분에 따라 이유 없이 참수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조선은 이 시대 국가치고는 포로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특히 단병접전이 약한 조선에서는 쓸모가 많았다.

“저기, 저기. 왜인들이 나오지 않은 왜선 두 척에 수류탄을 안으로 투척한 다음 수색을 벌인다. 숨어 있는 놈들은 다 사살해. 나머지 배들에도 1개 대씩 투입해 수색하도록.”

왜인 수부들이 비록 비무장이라 하나 언제든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이었다. 간수군들은 왜군이 아닌 왜인들을 상대할 때도 결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배 안에서 수류탄 폭음이 연달아 울리고, 왜선에 오른 간수군들이 배 구석에 숨은 왜인 생존자들을 찾아 모조리 사살했다.

이민호도 눈에 익은 대정을 뒤따라 왜선에 들어가 봤다. 간수군 몇 명은 계단을 타고 상갑판으로 올라가고, 몇 명은 총구를 앞세운 채 선수 방향을 수색했다.

포탄에 맞아 여기저기 뻥뻥 뚫린 구멍을 통해 햇빛이 왜선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노꾼 갑판에는 왜인 수부들의 시체가 잔뜩 쌓여 있고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상갑판에서 전사한 왜군들이 흘린 피가 판자 틈을 타고 마치 낡은 양철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처럼 줄줄 흘러 내렸다.

매캐한 연기와 더불어 퀴퀴한 냄새가 이민호를 괴롭혔다. 이민호가 도끼를 가진 간수군들에게 시켜 옆면 대나무 방패를 치우게 했다. 선체 양쪽 벽을 헐고 나자 시원하면서도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뒤섞인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수류탄!”

- 쾅!

수류탄이 터진 직후 간수군들이 총구를 아래 갑판으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겨눴다. 어두운 아래 갑판에서 신음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이카시테 구다사이!”

“오네가이! 다스케테구레!”

“뭔 소리야? 왜적들이 아직 살아있다. 다 쏴 죽여!”

대정의 명령에 따라 간수군들이 아래 갑판으로 우르르 몰려 내려갔다. 이민호는 밑에서 내지르는 일본 말을 알아들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잠시 후 총소리가 연속 울리고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그 사이 상갑판으로 올라갔던 간수군들이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오면서 보고했다.

“대정님! 상갑판에 살아있는 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체마다 총검으로 한 번씩 찔렀습니다.”

“잘했다.”

조선 수군과 싸우는 동안 왜선 상갑판에 있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이민호는 살육이 행해진 왜선에서 밖으로 나왔다.

이후 전장 정리가 실시됐다. 간수군들이 왜선 밑바닥에 감금된 조선인 소녀 하나를 구했고, 쌀과 화약, 조총과 왜검 등 전리품을 배에서 꺼내 종류별로 한 곳에 쌓았다. 그리고 왜군이나 왜인 전사자들의 갑옷과 옷을 벗긴 다음 수급을 베었다.

이민호는 꼬마가 끔찍한 장면을 볼 수 없도록 품에 안고 움직였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경상도 남해안에 사는 백성들을 다 피난시켰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민간인들이 남아 왜군의 노략질 대상이 되곤 했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났을 때도 고향에서 죽겠다고 끝까지 버티는 인간들이 있으니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으나, 어린 꼬마를 놔두고 부모가 덜컥 죽어버리면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했다.

북쪽으로 탈출하다가 매복에 걸려 몰살한 왜군들은 벌써 갑옷부터 속옷까지 홀랑 털리고 목까지 베어졌다. 언덕 너머에서 치솟아 오르는 시커먼 연기는 왜군들 시체를 태우는 현장에서 나왔다.

단정을 타고 좌선에 오른 이민호는 전라좌수사와 경상우수사 앞에서 전과를 보고했다. 품계야 이민호가 경상우수사 오응정보다 높지만 조선의 군대에서는 품계보다 직책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품에 매달려 있는 아이를 안고 보고하기가 좀 어색했지만 매몰차게 아이를 내버릴 수도 없어 그대로 진행했다.

“조총과 왜검 등 전리품은 아직도 수집 중이니 나중에 추가로 보고하겠습니다. 현재 수급 537개를 베었고 언덕 북쪽 절벽에서 떨어진 왜군들이 몇 있으니 몇 개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포로는 213명입니다. 마침 썰물 때라서 왜군은 단 한 명도 빠져 나가지 못했고 물에 빠져 죽은 시체도 없습니다.”

“그 아이는 뭔가? 옷 입은 게 조선 아이 같은데.”

“이 꼬마는 왜선에서 구했는데 놀라서 그런지 말을 하지 않습니다. 혹시 심문하실 것이 있으면 하십시오.”

이민호가 꼬마 아가씨를 이순신에게 보내려 했으나 꼬마는 작은 손으로 이민호의 옷을 꼭 붙들고 늘어졌다. 이순신이 측은한 눈으로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수군에도 포로 취급 원칙이 있으니 이민호는 결국 좌선에 꼬마를 맡겨야 했다.

“세상에! 옥포 승첩 장계를 보고도 설마 했는데 이런 싸움이 진짜 가능하군요. 이 수백 영감도, 이 동지도 참 대단하십니다.”

경상우수사 오응정이 입을 떡 벌렸다. 이순신이 아군이 입은 인명피해를 알려주었다.

“군관 나대용이 총알에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고 전 봉사 이설이 화살을 맞았으나 역시 경상에 그쳤네. 경상우수영에도 전사자나 중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네.”

“오! 다행입니다. 승첩을 경하드립니다, 수백 영감!”

“고맙네. 통지 자네가 있어서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네.”

이제는 전공을 분배할 시간이었다. 원균이 있을 때는 싸우지도 않은 주제에 수급만 걷어갔었다. 그러나 이번에 경상우수영도 아주 열심히 싸웠다. 다만 전라좌수영에서 수군총을 다수 보유했고 화포가 더 많다는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전투 중에 공격력으로 확연히 드러났었다.

“북쪽으로 도망가다가 매복에 걸려 죽은 놈들 약 100명은 간수군의 전공으로 삼고, 나머지 수급 400여 과와 왜선에서 항복한 포로들은 두 수영에서 공평히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럼 경상우수영 몫이 200급이 넘고 포로는 100명 이상이라는 겁니까? 과분합니다, 이 동지! 부끄러워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100급만 주셔도 열심히 싸운 수하 장수들이 자급을 올릴 정도가 됩니다. 이 정도 규모로 승첩하는 곳은 아직 수군밖에 없습니다.”

“우수백! 그럼 일단 150급을 받고 전공이 또 생기면 다시 나누도록 합시다. 경상우수영도 열심히 왜선을 공격했으니 포로는 똑같이 나눕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좌수백 영감!”

오응정이 얼떨떨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 사이 이순신이 장대 쪽을 힐끗거려 이민호가 직접 가서 방탄유리를 살폈다. 이순신이 투덜거렸다.

“어쩐지 내가 비겁한 장수가 된 느낌일세. 군사들은 시석이 빗발치는 곳에서 몸을 드러낸 채로 싸우는데 나만 안전한 곳에서 지휘하니 말일세.”

“아닙니다. 여길 보십시오. 다 조총 탄환이 맞은 자리입니다.”

방탄유리라 해서 총탄을 거뜬히 튕겨내는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조총에 맞은 곳마다 총알이 반쯤 뚫은 구멍을 중심으로 허연 금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장대 주변에 설치한 방탄유리판 8장 중에서 총알 자국이 모두 21개나 나왔다.

“이렇게 총알이 많이 날아올 줄 몰랐네. 특히 이 총알이 제대로 날아왔다면 나도 결코 무사하지 못했겠어.”

“여장 뒤에 몸을 숨기고 싸우는 군사들이 장대에 오른 선장들보다 훨씬 안전한 것 같습니다. 장대에 나무 방패판 여러 개를 세우더라도 선장이 지휘하다 보면 몸을 드러내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수백께서는 앞으로도 계속 방탄유리를 사용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조총 구경에 따라 관통력이 강한 종류도 있으니 방패판과 갑옷도 지금처럼 신경 쓰셔야 합니다.”

“음. 그렇게 하겠네. 나야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는다면 더 없는 영광이지만 이상한 사람에게 수사를 맡길 수 없으니 다시 생각하기로 했네. 다른 전선 장대에도 유리판을 설치해주겠나?”

============================ 작품 후기 ============================

오전 중에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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