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24화 (73/1,000)

00124  19.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  =========================================================================

잠시 후 장수들이 모이자 회의가 시작됐다. 뜻밖에 경상우수사 오응정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처음부터 함대 지휘권을 넘겼다. 오응정이 대동강에서 배 몇 척을 가지고 여울을 방어하는 대동강 수탄장을 잠깐 역임했다고 하지만 해전 경험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가 가장 먼저 왜선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경상우수사이긴 합니다만 저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장수, 수군들이 해전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니 송구스럽지만 이번에도 좌수백께서 전체를 지휘하여 지난번처럼 호쾌하게 승첩을 거두어 주십시오.”

“원래는 관할 해역의 수사가 주장이 되어야 하거늘, 하는 수 없이 객장인 내가 당분간 지휘를 맡겠소. 어서 경상우수영이 과거의 성세를 되찾아 앞으로 수전이 편해졌으면 좋겠소.”

경상우수영이 수영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임진왜란 개전 당시 판옥선 몇 척을 보유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류성룡의 <징비록>에서 전선 백여 척이라 했으나 이것이 사후선이나 협선을 포함한 숫자인지 아니면 판옥선만을 뜻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찬한 충무공의 <행록>에는 원균이 임진왜란 초기에 전선 73척을 모조리 패했다고 적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경상 좌우도 수군은 16,622명,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 속찬지리지에 따르면 경상좌도 7,540명과 경상우도 10,538명, 합 18,078명이었다. 그러나 선조실록 26년 9월 3일자 기사에 ‘평소 영남에 소속된 군병이 수군 2만여 명’이라 해서 시대가 흐르며 증강됐음을 분명히 했다. 또한 경상좌수영의 수군 진포가 줄어들었음에 반해 경상우수영은 임진왜란 직전까지 꾸준히 확대됐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맹선의 비율로 따지고 임진왜란 당시 수군 진포와 연해 고을의 수, 그리고 조선 후기 방선과 병선으로 일부 대체돼 판옥선 숫자가 줄어든 시기에 작성된 <만기요람>의 규정을 비교하여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수영이 보유한 판옥선은 70척에서 80척 정도로 추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참고로 <부산포파왜병장>에서 전라좌우수영이 동원한 전선이 합계 74척이었다. 전라좌수영이 보통 23척에서 25척을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시켰으므로 전라우수영은 이 숫자를 뺀 50척 정도가 출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라우수영 관할 해역에 남겨둔 판옥선이 따로 있었을 테고, 전라우수영 수군 정병의 숫자나 관할 해역이 전라좌수영의 두 배였으므로 전라우수영의 판옥선은 60척 정도로 추산된다.

“바닷가 고을과 수군 진포를 하나씩 되찾다 보면 조만간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부산포를 치러 가야지요, 우수백.”

“물론입니다. 저는 삼남지방 5개 수영의 모든 전선이 모여 부산포를 치러 갈 꿈만 꾸고 있습니다. 그때도 좌수백께서 전체 함대를 지휘하신다면 소장은 안심하고 뒤따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게 너무 부담 주지 마시오. 지휘권 문제는 조정에서 결정하겠지요.”

오응정은 1548년생으로 이순신보다 세 살 적고 무과 급제는 별시무과에 합격하여 2년 빨랐다. 그러나 독자적 지휘권을 가진 곤수 급에 해당하는 당상관 승진 시기는 이순신이 1년 넘게 빠르고 현재 품계도 이순신이 높았다. 이대로라면 이순신이 계속 통합 지휘권을 쥐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정만록> 기록을 살펴보면 삼도근왕군이 북진할 때 주장은 주력 병력을 동원한 전라감사 이광이 맡았다. 그러나 경상감사 김수의 자헌대부 승진이 조금 빨라 예우에 있어서는 김수와 그를 따르는 아전들에게 항상 우선권이 있었다. 가선대부였던 충청감사 윤선각은 항상 세 번째였다. 같은 직급일 경우 품계가 우선하고, 품계도 같을 경우 승진 시기가 중요했다.

오응정의 아들 오욱과 오동량이 대솔군관으로서 참전하고 있었다. 무관의 아들이라 역시나 강인해 보였다. 둘 다 20대를 갓 넘겨 이민호보다는 나이가 많았다. 회의를 마치고 이민호는 이들과 좌선 군사들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외륜선으로 돌아갔다.

연합함대는 노량을 거쳐 하동을 지났다. 사후선을 사방으로 보내 수색했으나 아직 왜선을 발견하지 못했다.

정오를 막 넘겼을 때 곤양에서 나온 왜선이 동쪽으로 달아나기에 판옥선들이 일제히 추격에 나섰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판옥선 43척에 대형 외륜선 8척을 더하고 사후선 50여 척을 합해 100여 척이 일제히 작은 왜선 한 척을 쫓아가는 압도적인 전력 차의 달리기가 한동안 계속됐다.

이것만 보면 조선 수군이 비열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왜선은 곤양 땅 태포(太浦)에서 민가를 노략질하던 배였다. 장계초 <당포파왜병장>에는 언급되지 않으나 <난중일기> 계사년 3월 22일 자 이후 별도의 장에 그 왜선 한 척의 정체가 밝혀져 있다.

전부장을 맡은 방답첨사 이순신의 배가 가장 빨리 나아갔으나 왜인들은 배를 뭍에 대고 숲으로 도망친 다음이었다. 결국 그 왜선은 활활 불타올랐다. 서전을 장식한 제물로 제격이었다.

곧이어 연합함대는 사천 선창 앞 바다에 도착했다. 한강 정도의 넓은 폭을 가진 강 하구 비슷하게 생긴 바다의 동쪽에 민간인 어부들이 사용하는 사천 선창이 있었다. 조수간만이 일정하고 파도가 거의 없는 곳이기에 밀물 때 석축 끝부분까지 바닷물이 닿고, 바로 그 위에 민가 몇 채가 있었다.

그 선창 북쪽 해안에 대선 7척, 중선 5척을 합해 왜선 12척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지금은 썰물이라 왜선들이 갯벌에 올라 배 밑을 다 드러낸 채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왜군들 절반 350여 명은 해안 쪽 두 방향이 경사가 매우 심한 언덕에 올라 진을 치고 있었고, 나머지는 배를 지켰다.

장계 <당포파왜병장>에는 사천 선창의 언덕에 올라 진을 친 왜군이 400여 명으로, <난중일기> 계사년 3월 22일 자 이후 별도의 장에는 35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투 중에 왜군들이 배와 언덕 사이를 수시로 이동했으므로 큰 차이는 아니었다.

판옥선의 정원은 나대용에 따르면 125명 이상, 충무공 장계에 따르면 130여 명이었다. 왜선은 세키부네의 경우 작은 배는 60명, 커도 100명을 넘기 어려웠다. 세키부네가 전선이 아닌 수송선으로 사용될 경우 노를 젓지 않고 돛을 이용한 항해를 한다면 사공 몇 명만으로 운항이 가능했다. 그것은 판옥선도 마찬가지였다.

“송 군관 저 인간은 왜 저리 행동이 굼뜨지? 이 중요한 순간에 말이다!”

“이 수사 영감이 자꾸 눈치를 주니까 그렇겠지요. 제가 수사 영감께 따로 말씀드렸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십시오.”

“에잉! 쯧쯧!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누누이 설명했는데 말이야.”

이민호와 부친 이응화는 왜군보다는 전라좌수영 좌선 장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업을 주목했다. 좌선 장대에 오른 이순신 옆에서 군관 송희립이 투명한 것을 장대 주위에 설치하고 있었다. 바로 오늘을 대비해 이민호가 만든 방탄유리였다. 이응화가 송희립을 윽박지르고, 이민호가 어르고 달래서 간신히 송희립을 설득할 수 있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이곳에서 이순신이 조총에 맞아 어깨뼈를 상한다. 드라마적 요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부하에게 시켜 칼로 총알을 빼내면서도 눈 하나 깜빡 않는 이순신 장군에게 감탄하겠지만, 이민호와 이응화는 이순신을 7년 내내 매일 목욕하는 사람으로 만든 부상에서 구해주고 싶었다. 이순신이 류성룡에게 보낸 편지에 어깨 부상으로 인한 오랜 고통과 불편함이 잘 표현돼 있었다.

- 타탕!

언덕과 왜선 쪽에서 이따금 하얀 연기가 치솟으며 조총이 발사됐다. 아직 거리가 멀어 아군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 썰물이고 활 사거리가 아슬아슬하게 미치지 못하는 거리에 왜군들이 모여 있어 연합함대가 섣불리 공격하기 어려웠다.

조선 수군이 판옥선과 대형 외륜선을 합해 51척, 탐망선과 사후선들까지 합해 100여 척이나 되다 보니 후퇴하는 척해도 왜군들이 쉽게 바다로 유인되지 않았다. 언덕에 진을 친 왜군들은 엉덩이를 까서 손바닥으로 치거나 원숭이 흉내를 내면서 조선 수군을 놀렸다. 높은 언덕에서 조총을 쏘는 왜군들을 상대하기 곤란해 판옥선들이 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자니 마침 밀물이 시작됐다.

전라좌수영 좌선에 이어 중위장의 배에서 똑같은 깃발 신호를 올렸다. 선두무상이 이응화에게 보고했다.

“중위장 전선에서 유군영하기가 똑바로 서고 휘가 앞으로 세워졌습니다!”

“유군의 휘를 앞으로 세워라!”

이민호가 탄 배에서 사공이 불꽃 모양의 꼬리가 달린 깃발을 번쩍 들어 앞으로 약간 기울였다. 그러자 대형 외륜선 8척이 일제히 앞으로 전진했다. 판옥선들은 밀물이 시작되는 시간이라 갯벌에 좌초될 걱정을 하지 않고 최대한 해안에 접근했다. 그 선두에 거북선이 나아가며 화포를 연사했다.

외륜선들은 첨저선이라 판옥선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약간 늦게 전진했다. 갯벌에 배가 얹혀 기울어지면 사람은 버티더라도 소가 놀라서 발광할 우려가 있어 좌초는 피해야 했다.

- 타타탕! 탕! 탕!

연합함대가 접근하자 갯벌에 오른 왜선과 언덕에서 왜군 철포병들이 판옥선들을 향해 첫 일제 총격을 가했다. 공격을 받은 연합함대는 해안에 최대한 접근한 다음 거의 동시에 화포를 발사했다. 몇몇 판옥선은 관성을 이용해 아예 갯벌 위에 올라섰다.

- 퍼벙! 펑!

왜선들은 아직 움직일 수 없으니 언덕에 올라 진을 친 왜군들이 첫 목표가 되었다. 화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둥그런 석환과 철환이 날아갔고, 뒤이어 작은 자갈이나 쇠구슬이 확 퍼지며 목표지역 주변을 휩쓸어버렸다. 왜군 진영 곳곳에서 피 보라가 일며 비명이 난무했다.

포격과 화살 공격이 집중되자 언덕에 진을 쳤던 왜군들은 언덕 뒤로 넘어가 숨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연합함대의 공격은 갯벌에 얹혀 꼼짝 못하는 왜선들에 집중됐다. 왜선에 숨어서 조총과 활을 쏘는 왜군들을 목표로 삼아 간수군들과 수군이 꾸준히 총과 활을 쏘았다.

- 퍼엉!

“매워!”

이민호가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대형 외륜선에도 화포가 탑재돼 전라좌수영 화포장들이 포를 쏘고 있었다. 화포를 발사할 때마다 매캐한 연기가 갑판 위로 흘러 다녔다. 타는 냄새와 오래된 화장실 냄새가 섞인 연기를 바로 옆에서 맡으면 무척 고통스러웠다.

“주인님. 적진에서 너무 가깝습니다.”

“응. 앉아 있을게.”

민희의 권고에 따라 이민호도 다른 간수군들처럼 여장 밑에 뚫린 총안을 통해 소총을 쏘았다. 총안을 통해 바깥을 살펴보니 왜선들이 포탄에 연이어 맞아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따금 거북선을 향해 조총을 쏘는 자들이 있었으나 초반과 달리 왜군의 저항은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간수군 각 려 3, 4, 5대 상륙 준비! 단정 내려! 1, 2려는 엄호하라!”

이응화가 전라좌수영 좌선으로부터 상륙 신호를 받고 명령을 내렸다. 이민호는 얼른 선미루 밑으로 내려가서 단정으로 옮겨 탔다. 그 사이에 외륜선마다 50명씩 남은 간수군들이 왜선과 언덕을 향해 총격을 퍼부었다. 상륙하기 전에 왜군이 고개도 들지 못하게 만드는 엄호 사격이었다.

“오른쪽으로 상륙해!”

이민호가 단정들을 전투현장 남쪽으로 유도했다. 간수군들의 목표는 조선 수군이 신나게 때려 부수고 있는 왜선이 아니라, 언덕 너머로 숨은 왜군들이었다. 사천 선창의 언덕은 남쪽과 동쪽 경사가 완만한 편이었고, 왜군이 도망간다면 바다에 접하지 않은 동쪽밖에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약간 남쪽 어부들의 선창 가까운 곳에 간수군 24개 대 600명이 상륙했다. 이민호는 이들을 이끌고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얼마 뛰지도 않아 언덕 뒤에 숨은 왜군들이 시야에 잡혔다.

“제8 여수는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매복하고 각 대별로 산개, 사격 개시!”

- 타타탕!

언덕 뒤에 숨어 안전하다고 여기고 안심하던 왜군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뒤쪽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총탄에 놀란 왜군들이 다시 언덕을 넘어가니 판옥선에 탄 조선 수군이 활과 수군총을 쏴서 마구 쓰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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