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2 18. 고산국에서의 보름 =========================================================================
이민호는 괜히 네이의 마음을 떠보거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남자를 만나도 된다는 식으로 개소리를 지껄이지는 않았다. 미카와 시녀들의 결심을 이미 알고 있는 이민호에게는 그들을 허튼 소리로 모욕할 권리가 없었다.
이민호는 네이가 몸에 두른 천을 떨쳐냈다. 풍만하면서도 갈색으로 건강하게 잘 그을린 네이의 몸을 끌어안으니 푹신푹신해서 좋았다. 네이의 체형은 작달막하고 약간 통통한 편이지만 건강미가 모든 단점을 눌렀다. 네이가 몹시 부끄러워하기에 이민호가 민희와 민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자리 좀 피해주지 않겠어?”
“저희는 호위입니다. 궁궐에서는 신경 쓰지 않았으면서 오늘따라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 어서 네이를 안아주십시오.”
“네이가 부끄러워해서 말이야. 알았어. 구경이나 해.”
이민호가 몸에 걸친 천을 벗자 네이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사무라이 가문 비전의 기술을 이민호에게 시도했다. 이민호가 지그시 눈을 감고 네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민희와 민영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이민호가 민영에게 이것을 시켜본 적이 있었지만 기술 수준이 아예 달랐다. 정성이 듬뿍 담김은 물론 심지어 경건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몸 일부에 느껴지는 감각이 아주 좋았으나 오늘은 네이를 위한 날이었다. 이민호가 아쉬움을 접고 네이를 눕히자 가슴이 퍼지면서 출렁거렸다. 건강하면서도 뭔가 굉장히 육감적인 몸이었다.
이민호는 네이가 평생 좋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온몸을 애무했다. 네이는 바들바들 떨면서 이민호의 애무를 받아들였다. 드디어 결합하려는데 네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이민호에게 물었다.
“잠깐만요, 주인님. 몸에 구멍이 나면 혹시 물질하는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
“후후! 그게 무슨 소리야? 물이 샐까봐 걱정돼? 해녀들 중에 애 딸린 과부도 있잖아.”
“아!”
네이가 내지른 비명이었다. 네이의 여린 살이 찢기며 두 사람의 몸이 치밀하게 결합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비명은 없었다. 이를 앙다문 네이가 이민호에게 찰싹 달라붙어 이민호는 허리를 움직이기 어려웠다.
이민호가 네이와 눈을 마주치면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네이의 몸속이 계속 꿈틀거렸다. 운동하는 여자 특유의 감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 것 같았다.
“양식장이 정상 궤도에 올라섰으니 이제 그만 고산국 궁궐로 들어오는 게 어때?”
“궁궐에는 미카 님이나 다른 분들도 많이 계시잖아요. 지금처럼 여기서 일하면서 주인님을 그리워할래요. 가끔 와주세요.”
“저런. 너희들의 복수는 확실히 해주마. 약속한다.”
이민호는 네이의 몸 위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네이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했지만 이 소중한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실눈을 뜨고 이민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5월 하순이 되면서 부친 이응화가 여러 번 독촉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고산국이든 해중국이든 아직 조선에 병력을 출정시킬 여건이 되지 않았다. 조선의 속국인 해중국 자격으로 수군이나 육군을 보내겠다고 해도 조선 조정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명나라에서는 아직 보바이의 난을 진압하지 못해 조선으로의 원군 출정을 자꾸 늦추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민호는 전선 한 척만 끌고 연도로 향했다. 그리고 그 전에 야음을 틈타 대마도 남동쪽 해상에 도착했다. 저번처럼 군량에 불을 지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즈하라 포구 주변에 왜군들이 횃불 수백 개를 대낮 같이 밝혀두고 있었다. 횃불을 배경으로 어른거리는 작은 그림자들은 왜군 경비병들이 틀림없었다.
“경계가 대폭 강화됐습니다, 도련님.”
“저놈들도 닭이 아니구나. 어쩔 수 없지. 부산포로 가자.”
“도련님! 쟤들이 할 수 있다는데요? 반대쪽 산에서 내려와 불을 지를 수 있답니다. 제 생각에는 어쩔 수 없이 전투가 발생하겠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계복이 재고를 요청해서 이민호가 해병들의 상태를 살폈다. 단정에 내릴 준비를 하던 해병들이 의욕에 찬 듯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눈에 드러난 경비병이 저 정도라면 전투가 시작된 다음 얼마나 쏟아져 나올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무리할 필요 전혀 없다. 적이 있는 한 공격해서 전공을 세울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어.”
전공을 세우더라도 조선군처럼 벼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상금을 받게 되겠지만, 왜군이 몰려오면 싸움도 없이 물이 마르듯 흩어지는 조선군보다는 직할군에 있는 쪽을 선호했다. 고산국 직할군들이 국적은 이미 바꿨지만 여전히 조선의 친지, 친척들과 소식을 나누고 있으니 조선 사정을 잘 알았다.
전선이 대마도 북단을 돌아 해협을 건넜다. 밤에 바다를 지나다니는 배는 한 척도 없었다. 그러나 부산포 가까이 가자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조업하는 어선들이 몇 척 있었다. 다른 배들은 전선을 두려워하며 멀찍이 물러났으나 작은 어선 한 척이 다가왔다.
“나리! 조선군이 맞습니까요?”
“그렇소.”
이민호가 배를 세웠다. 어선에 탄 어부 세 명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리! 설마 한 척으로 공격하러 가시는 겁니까? 부산포에 왜선 수백 척이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봐서 공격할 만한 게 있으면 공격하려 하오. 부산포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소?”
“왜선들 타고 온 왜적들이 화약을 부산포성 앞에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그것을 육지의 왜적들이 수레에 실어 며칠째 북쪽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총통을 쏘아 명중시킨다면 화약을 못 쓰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오! 좋은 정보요. 고맙소. 그런데 어째서 왜적의 점령지에서 도망가지 않는 거요? 배에 가족을 싣고 서쪽이나 북쪽으로 가면 되지 않겠소?”
“제 아들놈들이 왜적에게 잡혀 짐을 지고 한성 방향으로 끌려갔습니다. 제가 도망가면 제 아들놈들을 다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날마다 왜장들이 먹을 문어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흑흑!”
“저런! 꼭 살아남으시오. 아드님들도 살아계실 테니 힘을 내시오.”
이민호는 한사코 사양하는 어부에게 쌀 한 섬과 은 열 냥을 내주었다. 이때는 왜군에게 잡힌 조선인 포로들 중에 어쩔 수 없이 부역을 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민호가 탄 전선이 절영도를 돌아 부산포 앞바다로 들어갈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절영도 언덕에서 왜군들이 전선을 보고 어디론가 뛰어갔지만 상관이 없었다. 조총 사거리에서 충분히 벗어나서 항해 중이기 때문이다.
전선은 왜선 수백 척이 정박한 부산포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성 앞에서 화약이 쌓인 곳을 찾으려 했다. 이민호는 화약을 불태우기 어렵다면 왜군들에게 함포 몇 발을 갈겨주고 부산포에서 나올 생각이었다.
“어? 저거 도련님이 판 화약입니다!”
이민호는 계복이 가리킨 곳을 확인했다. 나가사키에서 일본 처녀들을 살 때 조선 옹기와 구별되도록 빨간색 옹기에 화약을 담아서 넘겼는데 그것이 부산포성 앞에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이민호가 만든 흑색화약 외에도 포르투갈인들이 나무통에 넣어 판 화약이 집채만큼 쌓여 있었다.
대충 눈으로 살펴보니 화약이 천 통이 넘었다. 일본인 처녀로 치면 5만 명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화약 천 통은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처녀본위제로 계산하니 대단한 양이었다.
화약과 교환돼 벌거벗겨진 채로 울며불며 배에 실렸던 일본 처녀들은 지금 고산국에서 잘 살고 있었다. 노예에서 해방되자마자 조선인 노총각 군인이나 흑인들하고 급하게 결혼한 여자들도 있었다. 아직 짝을 구하지 못한 대부분의 여자들은 일을 하면서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일부 헤엄을 잘 치는 여자들은 해녀를 하면서 더 많이 벌었다.
“선미 화포장! 함포 발사 준비해. 해병 전원 사격 준비! 목표는 빨간색 옹기와 나무통이 쌓인 곳이다. 총을 쏴서 옹기를 깨거나 나무통에 대충 구멍을 뚫으면 된다.”
해병들이 조준하는 사이 부산포성에서 왜군들이 쏟아져 나왔다. 왜군들이 소리를 지르자 부산포에 정박한 수백 척의 배에서도 왜인들이 잠에서 깨어 기어 나왔다.
왜군 수천 명이 지켜보는 한가운데에 전선이 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산포성 앞에 나온 왜군들은 거리가 멀어서, 왜선에서 잠이 깬 왜군들은 아직 잠이 덜 깨서 전선을 향해 조총을 쏠 생각을 못했다.
“소총, 쏴!”
- 타타타탕!
이민호의 지시에 직할군 해병 1개 려가 일제히 총을 발사했다. 총에 맞은 옹기가 깨지고 엎어지며 화약이 땅으로 쏟아졌다. 나무통에 총알이 맞아 뚫린 구멍에서도 화약이 줄줄 샜다.
이민호는 소이탄을 만들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러나 불을 지를 방법은 많았다.
“급선회! 배를 최대한 뒤로 물려!”
타수가 조타기를 꺾자 전선이 180도 회전했다. 선미 화포장은 이미 발사 준비를 마치고 포를 조준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배가 화약이 쌓인 곳과 너무 가까워서 폭발에 휘말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한참 기다린 다음 함포 발사 명령을 내렸다.
“화포장, 쏴! 모두 뱃전에 엎드려!”
- 펑!
- 콰콰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강렬한 섬광이 아직 어스름한 새벽의 부산포 전 지역을 환히 밝혔다. 파편이 멀리 떨어진 전선에도 날아왔다. 민희와 민영이 황급히 이민호의 얼굴 앞을 방패로 막았다. 충격파와 뜨거운 열기가 3마장 떨어진 전선을 뒤덮었다. 바닥에 엎드린 해병들이 날려가지 않기 위해 배의 시설물을 붙들고 안간힘을 썼다.
부산포에서 나오던 왜군들이 폭발 화염에 휩쓸린 것 같았지만 연기가 자욱해서 자세히 알아보기 어려웠다. 불똥이 왜선들에 튀어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새벽의 부산포에서 왜군들이 아우성을 내질렀다.
“됐어! 왔던 길로 빠져 나간다.”
전선이 빠른 속도로 오륙도 쪽을 향했다. 이민호는 그 동안 일본에 화약을 판 것 때문에 찝찝했던 마음이 이번 일로 완전히 사라졌다. 결국 일본인 처녀들만 공짜로 수만 명이나 얻게 된 셈이었다.
- 퍼엉!
“뭐야?”
빠르게 달리는 전선 옆에서 물기둥이 높이 치솟았다. 어디선가 왜군들이 화포를 발사하고 있었다. 왜군이 조총이 아닌 화포를 쏜다는 사실에 이민호가 깜짝 놀라는 사이 계복이 절영도 언덕 쪽을 가리켰다.
“방금 날아온 것은 대장군전입니다. 왜군이 언덕에서 천자총통을 쏘고 있습니다!”
계복이 소리 지르자 이민호는 많이 당혹스러웠다. 부산포에 지상 포대가 배치돼 지킨다면 앞으로 조선 수군이 작전할 때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각오해야 할지도 몰랐다.
“도련님! 저 새끼 조선인인데요? 포로로 잡혔는지 아니면 왜적에게 붙어먹은 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빨리 움직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부역자 같습니다.”
“급하다. 사거리 되면 쏴버려! 선수루 포수! 준비되면 쏴!”
- 콰직!
이번에는 지자총통에서 발사된 차대전이 전선 옆구리에 꽂혔다. 전선에서 해병들이 소총을 발사했으나 왜군의 포대는 사거리에서 약간 벗어난 곳이라 제대로 명중시키지 못했다.
- 쾅!
선수루 함포가 불을 뿜었다. 그러나 바다에 떠서 이동하는 배에서 가늠자와 가늠쇠만으로 조준해 지상 목표를 명중시키기란 힘든 일이었다. 장전을 마친 선미루 함포도 포탄을 날렸지만 역시 왜군 포대에서 형편없이 빗나갔다.
“소총 사격 중지! 뒤에 왜선들이 추격해 온다. 유효 사거리 내에 들어오면 자유 사격!”
이민호가 해병들에게 표적을 다시 지정했다. 부산포 앞바다에서 해안 포대로부터 1회 포격을 받았으면 더 이상 걱정할 게 없었다.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의 재장전에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그 사이에 빠져 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에서 세키부네 세 척이 쫓아오고 있었다.
- 타탕! 탕!
아직 소총 사거리도 되지 않았는데 유효사거리가 훨씬 짧은 조총을 왜선에서 발사하고 있었다. 당연히 전선에서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고, 깃대에 명중한 총알도 관통하지 못하고 납작해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전선의 속도가 더 빠른 탓에 왜선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고, 해병들은 조준만 하다가 끝내 한 발도 쏘지 못했다.
- 펑!
선미루 함포가 발사됐다. 함포는 지상 포대를 명중시키지는 못했지만 해상 표적치고는 가까운 왜선의 앞부분을 직격했다. 폭발이 일어나면서 상갑판과 하갑판에서 조총을 쏘던 왜군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포격 직후 왜선 세 척은 즉각 방향을 틀어 부산포로 들어갔다.
“아, 씨! 전선에 또 구멍이 났어.”
이민호가 고개를 내밀어 피탄 부위를 살폈다. 차대전이 판재를 뚫고 들어간 곳에 시커먼 구멍이 남아 있었다. 안에 들어간 화살 모양의 포탄은 바닥에 꽂혔지만 큰 피해는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공들 중에서 편성한 수리반이 출동해 판자에 못질을 해서 대충 때웠다. 차대전은 두꺼운 티크목 판재 하나를 통째로 바꿔야 될 정도로 확실하게 관통했다. 서양 범선들과 함포전이 붙어 작은 구경의 함포에 명중하더라도 관통하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판재를 썼는데도 대장군전이나 차대전처럼 뾰족한 화살 모양 포탄에는 뚫리고 말았다.
사공이 차대전을 갖고 선미루에 올라와서 이민호에게 보여주었다. 나무 기둥이나 다름없는 차대전 앞부분에는 역시나 금속으로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마치 미사일 같아 이민호는 옛날 생각이 났다.
“도련님! 나중에 부산포를 치긴 쳐야 하는데 이런 식이면 아군에도 인명 피해가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부산포를 공격하기 전에 절영도에 배치된 조선 화포는 반드시 없애야겠다.”
왜군이 쌓아둔 화약 천 통을 못 쓰게 만드는 큰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연도로 돌아가는 길에 이민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왜군이 노획한 조선군 화포를 사용한다면 작전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것 같았다. 앞으로 왜군이 점령한 해안선에는 웬만하면 접근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부터 챕터 바뀝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