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21화 (70/1,000)

00121  18. 고산국에서의 보름  =========================================================================

“주인님! 우리는 언제 출전할 수 있습니까?”

“요즘 칙사가 계속 왔다 갔다 하는데 아직 결정 안 됐다. 아무래도 보바이의 난 때문에 자꾸 연기되는 것 같다.”

“빨리 조선에 가고 싶습니다. 우리가 보바이의 난을 진압하면 어떻겠습니까?”

자꾸 출전이 연기되자 감불이 조바심을 내는 것 같았다. 조선과 달리 전공을 세운다고 딱히 벼슬이 오를 것도 아니었지만 청년 무관 특유의 호승심은 이 세상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얼씨구? 겨우 이 병력으로? 상대가 원주민이나 보병도 아니고, 너 열 배 스무 배나 되는 몽골군 상대로 잘 싸울 수 있겠어? 세계 최강 기병이라는 몽골군이라고!”

“원나라 이후 여진족에 몽골족 피가 많이 섞였습니다. 여진족이라 칭하더라도 순수 몽골인 마을도 많습니다. 그러니 몽골족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직접 만나 보면 알려진 명성보다 별로입니다.”

금나라 때는 여진족이 몽골족을 간접 지배했고, 원나라 때는 몽골족이 여진족을 수하로 부렸다. 두 종족은 서로를 강하게 경계하면서 은근히 라이벌 의식이 강했다.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나는 몽골족과 만나 싸울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몽골족은 무기가 아니라 기동력으로 싸우는 사람들 아니냐?”

“기동력은 저희 여진족도 절대 몽골족 못지않습니다.”

“그래, 그래. 여진족도 몽골족 못지않아. 하지만 너희 여진족이 아니라 조선 출신 승마보병으로 싸워야 하니 문제다.”

사르후 전투는 물론 근대 유럽 전쟁사를 볼 때 화승총만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것이 기마군단이었다. 단발 소총은 화승총보다 훨씬 강력하고 속사가 가능하긴 하나 무조건 승리한다고 장담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이민호는 혹시나 해서 직할군 승마보병들에게 하마 상태에서 기병을 상대로 한 보병방진 훈련도 시켰다. 기다란 총검을 꽂은 소총을 내밀어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고 그 사이에 총을 쏘아 기병집단을 무너뜨리는 진형이었다.

그러나 근대 보병방진은 기병 돌격 앞에서도 대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강력한 규율이 세워질 수 있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린다. 이민호는 조선인과 여진인에게는 그런 규율이 지켜질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괜히 보병방진을 형성했다가 기병 돌격에 겁먹고 한꺼번에 도망가다가 짓밟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보병방진 훈련은 단 하루만 시키고 말았다.

흑인 병사들은 무척 훌륭한 군인들이었다. 승마에 익숙하지 못한 흑인들은 주로 해병에 배치됐는데 소총 사격은 물론 총검술과 칼질도 아주 잘했다. 체격과 체력이 워낙 뛰어나 짐을 잔뜩 지고도 빨리, 그리고 오래 달렸다. 특히 이민호 개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강해 이민호가 무척이나 흡족해했다.

“대단해! 역시 흑형이야.”

“왕! 점심시간이다. 왕은 먹을 걸 많이 줘서 좋다.”

“그래, 그래. 밥 먹으러 가자!”

이민호가 유전자의 축복을 받은 흑인 병사들을 찬양하고 있는데 전령이 식사시간이 됐음을 알렸다. 흑인 병사들 중에는 가끔 이렇게 피그미족도 섞여 있었다. 키는 작지만 피그미족 역시 강인한 전사들이라 정찰병이나 전령으로 쓰면 큰 보탬이 됐다.

“우리는 왕한테 충성한다. 그러나 후계자가 없다. 그래서 걱정이다. 후계자 만들기 전까지 왕은 절대 죽지 마라.”

“그래. 고맙다. 후계자도 얼른 만들겠다.”

이민호는 흑인 병사들이 조선말을 빨리 익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존댓말은 반드시 제대로 가르쳐야 했다.

“왕! 기마병들이 장전할 때 고생한다. 기병총에 총알 여섯 발을 한꺼번에 장전하면 더 좋다. 진흙으로 만들 수 있다.”

“아! 그래. 스피드 로더나 문 클립이 있지! 고무로 만들어야겠다. 너 일 계급 특진! 계급이 없구나. 군 경력 일 년을 추가해주겠다.”

“월봉이 2전 늘어나는 건가? 고맙다, 왕! 나는 너를 내 친구로 인정하겠다.”

“그래. 친구 먹자. 고맙다.”

“왕! 친구를 먹으면 안 된다. 사람 고기도 먹으면 안 된다. 병 걸린다.”

“그래, 그래. 안 먹는다.”

피그미족 전령과 함께 점심을 먹은 이민호는 궁궐 실험실로 급히 돌아갔다. 고무를 굳혀 스피드 로더를, 총알 구경으로 구리판을 잘라 간단히 문 클립 시제품을 만들었다. 스피드 로더는 회전 탄창 안에 총알을 끼우고 나서 벗겨야 하지만 문 클립은 회전 탄창에 한꺼번에 여섯 발을 장전하고 총알이 끼워진 상태 그대로 쏜 다음 탄피를 한꺼번에 뺄 수 있었다.

이민호는 대장간에 연락해서 문 클립을 만들어 기병총을 쓰는 승마보병들에게 지급하도록 했다. 그리고 무거운 회전 탄창을 회수해 권총을 더 만들어서 여수와 대정들에게 칼 대신 보조 무기로 지급했다.

해중국 항구 바깥 언덕에 건설되는 요새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고산국의 아리수 하구에 건설되는 요새보다 더 빨리 건축을 시작했으나 언덕까지 연결되는 도로를 먼저 닦아야 해서 완성에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해안포 요새는 배보다 더 높은 곳에서 쏘므로 사거리가 길었다. 함재화포보다 더 큰 대포를 쏘아 파괴력도 컸다. 안정된 지상에서 발사하기 때문에 명중률도 훨씬 높았다. 단단한 돌담 뒤에서 포문 사이로 쏘므로 안전하기도 했다.

다만 이동하면서 쏘려면 시간이 더 걸린다는 단점이 있을 뿐이니 함포보다 여러 모로 유리했다. 요새에 대형 화포 10문을 배치해 놓았으니 갈레온이 한꺼번에 몇 척이 쳐들어온다 해도 충분히 물리칠 화력이 되었다.

방어 병력은 평소에는 급료병 100명이 50명씩 5일 단위로 돌아가면서 지키고 전시에는 300명 정도가 추가 증원하기로 되어 있었다. 대규모 적이 상륙하더라도 충분히 시간을 끌어줄 만큼 요새가 튼튼히 잘 지어졌다.

해중국 요새 건설 현장을 살핀 다음 이민호는 네이에게 미리 통보하지도 않고 해삼과 전복 양식장을 방문했다. 자그마한 해중국 궁궐에서 가까운 거리라서 수행하는 사람은 민희와 민영밖에 없었다.

마침 수십 명의 해녀들이 물에 들락날락하면서 전복을 수확하는 작업 중이었다. 하도 엄청난 장관을 봐서 이민호는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전에 띠처럼 작은 속옷을 아랫도리에 둘렀던 해녀들은 국왕을 위해 예의를 차린 셈이었다.

“전하! 죄송합니다. 미리 연통을 주시지 그랬습니까?”

물에서 올라온 네이가 허둥지둥 천으로 몸을 둘렀다. 풍만한 네이의 알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이민호는 좋은 구경 잘했다. 이민호는 괜히 망태기 안을 들여다보며 전복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전복 생김새가 여자의 구조를 닮아서 괜히 얼굴만 더 빨개졌다.

“벌써 생산을 시작했는데 그 동안 내가 한 번도 오지 못했어. 생산에 문제는 없어?”

“예. 불가사리는 일일이 잡아내고 있어서 전복은 문제가 없는데 게가 어린 해삼을 잡아먹어서 안타깝습니다. 해녀가 잡으려 하면 바위틈에 숨어버리니 다 잡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통발을 써서 게를 잡아야겠군. 미끼는 꼴뚜기 정도가 좋겠는데 어부들에게 물어봐. 전복과 해삼이 명나라에 좋은 값에 팔리고 있다니까 예산을 팍팍 써도 좋아. 해녀들 월봉도 좀 올려줘도 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 사이 양식장에 고용된 해녀들이 200명 정도로 늘어났다. 월봉도 부족하지 않게 받으니 처녀와 과부를 가리지 않고 독신 여성들이 하기에 적당한 직업이었다. 네이가 안전 문제에 많은 신경을 써서 교육시킨 탓에 아직 큰 사고는 없다고 했다.

주변에 배 두 척을 띄워 만약의 사고에 대비하고 있었고, 상어가 나타날 경우 경보를 울리거나 퇴치하는 임무를 맡았다. 생리 중인 여자는 물질을 못하게 했으나 가끔 상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배에 탄 이들도 다 여자였으니, 이곳은 금남의 성역이었다.

“아니, 그런데 다 나와서 인사할 필요 없어. 얼른 물에 들어가라고 해.”

알몸의 젊은 여자들 200명이 일제히 바다에서 나와 절을 하니 이민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민호는 얼른 바닷가의 오두막으로 피했다. 민희와 민영, 네이가 웃으며 이민호를 따라갔다.

개울 옆 오두막 안에는 여자들 옷이 잔뜩 걸려 있는 게 탈의실로 쓰는 건물 같았다. 대부분 일본 평민의 여자 옷이었고, 가끔 한복이 걸려 있다 해도 일본 여자가 입는 옷일 가능성이 더 컸다.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터는 미리 통보하고 올게.”

“아닙니다. 해녀들의 일상이니 상관없습니다.”

네이뿐만 아니라 민희와 민영까지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그러나 이민호가 여자들의 알몸 공세에 일방적으로 밀릴 사람은 아니었다. 이민호가 위아래 옷을 벗고 속바지 하나만 입었다.

“나도 수영은 잘 하니까 바다에 같이 들어가 보자. 민희와 민영이도 같이 수영할래?”

“저희들은 수영을 못해요.”

“응? 어제도 후원 수영장에서 잘 놀았잖아?”

“수영장 바닥에 발을 딛고 서 있었던 거여요. 그런데 주인님! 그렇게 하고 나갈 거여요?”

민희가 이민호의 몸 중간 바짝 서 있는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장난 좀 칠까 하던 이민호는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신경 쓰여 얼른 몸에 천을 두르고 바닷가로 향했다.

부친 이응화는 무예나 학문 같은 것은 신경 써서 가르치지 않았지만 수영 한 가지만은 철저히 이민호에게 가르쳤다. 원래의 몸이 물에 빠져 죽었고, 이민호도 현대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한 탓에 수영 하나는 확실하게 배웠다. 물론 현대의 강민호는 익사가 아닌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지만 바다에서 죽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민호는 물안경을 쓰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 물에 뛰어들었다. 물안경은 고무나무에서 채취한 고무와 유리를 재료로 만들어 해녀들에게 나누어준 장비였다. 해녀들에게 수영복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을 반성했다.

바다 속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기다란 바닷말과 새파란 미역, 색색의 산호 사이에 울긋불긋한 아열대의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다녔다. 모래나 뻘에는 해삼이, 미역에는 전복이 달려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수온이 높아서 좀 걱정했는데 해삼의 여름잠 빼고 큰 문제는 없었다. 열대의 바다에도 해삼이 자라지만 가격차가 커서 이곳에서 양식하기 힘들더라도 온대 해삼을 키우고 있었다.

옆에서 네이가 마치 인어처럼 몸을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민호가 네이를 따라갔다. 알몸의 해녀들 수십 명이 망태기를 안고 잠수해 전복과 해삼을 잡고 있었다. 매일 일정 구역마다 적당한 크기 이상의 해삼과 전복을 채취한다고 나중에 들었다.

이곳은 미역과 다시마 양식을 하면서 전복을 대량 밀식시키는 완도와 양식 방법이 달랐다. 가두리 양식장이나 대형 실내 양식장이 생산성이 좋겠지만 이곳은 자연 상태에서 종패만 투입해 관리하는 식이었다. 물론 미역 등 해조류가 꾸준히 자라도록 돌보는 것이 핵심 기술이었다. 인력이 많이 들어도 전복 가격이 워낙 높으니 이런 식의 양식도 가능했다.

그리고 이민호는 전복 진주를 양식할 구상을 하고 있었다. 완전한 구형인 일반 진주와 달리 전복 진주는 길쭉한 모양인 것도 나와서 희소가치가 높았다. 미세한 주사기 바늘로 바이오핵을 심는 방법을 예전에 알아두었으니 주사기를 만든 다음 시도하기로 했다.

“푸하!”

수면 위에 올라온 이민호가 물속에서 다리를 움직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민호로서도 수영은 오랜만이었다. 옆에서 네이의 물귀신 같은 머리가 솟아 올라왔다.

“잘 자라고 있더구나. 그 동안 고생 많았다, 네이.”

“헤헤! 고마워요.”

이민호는 네이와 함께 갯바위에 올라왔다. 민희와 민영이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동안 이민호가 네이를 여러 가지로 칭찬했다. 해녀들에게 아직 사고가 없다는 보고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바다로 흐르는 개울에서 민물로 몸을 씻고 탈의실로 이동했다.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네이가 몸을 비비꼬았다.

“상을 주세요, 주인님.”

“그럴까?”

전에 네이와 육체적 접촉이 있었으나 끝까지 가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 정도 진행했으면 남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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