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0 18. 고산국에서의 보름 =========================================================================
그리고 이민호는 옥남(玉男)이라는 이름도 마음에 안 들었다. 일본과 갈라티아 출신 궁녀들이 인종을 가리지 않고 옥남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훔쳐보는 것은 더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이런 잘 생긴 남자를 생각도 없이 금남의 구역인 왕궁에 들인 계복마저 미워졌다. 그래서 옥남에게 소심한 복수를 해주기로 결심했다.
“너를 크게 쓰기 위해 성은 고산국의 국성인 고 씨를 내리겠다. 옥남이란 이름을 바꿔 깨달을 오를 써서 한자 표기는 오남(悟男)이라 하고 오크남이라고 부르겠다. 너는 지금부터 조선이 아닌 아미족 원주민 출신이다. 남들이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하고, 아미족처럼 항상 깃털 달린 모자를 쓰도록 해라.”
“오크남. 아미족 이름으로 적당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이 이름을 쓰겠습니다.”
“이만 됐어. 자리에 앉아. 그런데 건축 일이 그렇게 재미있나?”
민희가 옥남이 묶인 밧줄을 풀어주고 궁녀들이 차를 내왔다. 이민호가 탁자 반대쪽에 앉으라고 손짓하니 옥남이 잠시 주저하다가 앉았다.
“돌을 지고 나르는 일이 재미야 있겠습니까? 하지만 국왕전하께서 만드시는 요새나 성이 워낙 특이해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만, 저도 벽돌 한 개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강 하구 요새를 비스듬히 쌓도록 명하신 것에는 남만의 화포를 대비하기 위함이겠지요.”
“잘 아는군. 백인들을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포르투갈어와 에스파냐어를 배웠다며? 마카오 유학생 출신들이 너를 칭찬하더라. 대단하다.”
마카오에서 배우고 돌아와서 고산국의 하급 관리로 진출한 자들이 많았다. 지금은 학생들이 각 마을의 학교에서 배우는 도중에 선생들의 추천을 받아 유학을 가고 있었다. 건국 초기라서 학생들의 나이가 들쭉날쭉했으나 조선에서 신분차별을 받았던 학생들이 배움에 대한 열의가 높았다.
“국왕전하께서 주변국들에 관심이 많으신 듯하여 타갈로그어와 안남어도 조금씩 익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나라 사람을 만나 대화가 통할지는 저도 모릅니다.”
“통역이야 전문 역관에게 시키는 것이 제일 낫지만,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 나라 문물을 이해하는 첩경이기도 하지.”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언어보다는 지리와 건축에 관심이 많습니다. 항해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고산국에 묶여 있어야 해서 접었습니다.”
그러나 옥남은 항해에 대한 열망을 접지 않았다. 옥남을 계속 고산국 농촌 마을에 잡아두면 밀항이라도 할 기세였다. 이민호는 이런 사람을 건설적으로 활용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좋다. 너에게 일을 맡기겠다. 관직은 공조정랑 정도로 시작해라.”
“제 출사를 허락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성은이 망극하오이다.”
옥남이 자리에서 내려와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그러나 진정성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현대 공화국 대통령이나 총리가 입헌군주제 국가의 왕에게 형식상 인사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공치사 집어치우고, 며칠 전에 에스파냐 사신들이 온 것 알지?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필리핀, 그러니까 여송 땅을 조금 떼어주기로 했다. 옥남이 너는, 아니 공조정랑 고 오크남은 필리핀에 가서 선착장을 만들어라. 그리고 방어시설과 창고시설을 갖춘 항구도시, 그리고 배후 도시도 만들어라. 궁전은 에스파냐 식으로 만들 테니 마닐라의 에스파냐 건축가들한테 도움을 받아야 할 거다.”
건설 자재를 운반하고 인력을 송출할 용도로 전용 대형 외륜선 세 척과 사공들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복건성 지역에서 노무자 일만 명을 모집해서 필리핀에 데려가기로 했다. 항구와 도시 건설 자금으로 일단 백만 냥을 옥남에게 맡겼다. 병력은 직할군 1개 려를 내어주었지만 지휘권은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민호가 지금까지 도시 건설을 하면서 참고해야 할 사항을 적은 책자를 내주었다. 건설 인부들이 지낼 숙소와 깨끗한 우물, 뒷간과 채소밭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세세한 지침을 쭉 훑어본 정옥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뉴얼이 있으니 경험 있는 장인들에게 일을 시킨다면 도시 건설이 어려울 것은 없었다.
“마닐라의 에스파냐 사람은 몇 천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길게 봐서 원주민들과의 관계는 당연히 좋은 쪽으로 유지해야 하겠지요?”
“당연하다. 우리도 인구가 적으니까 필리핀 원주민들을 최대한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해. 그 일을 위한 자금은 절대로 아끼지 말고 필요하면 요청해라. 주변의 술탄이든 라자든 다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나중에는 그들을 병력으로 써야 하니까 말이다. 에스파냐인들을 공격할지 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원주민 병력을 다른 지역의 전쟁에 투입할 수도 있다.”
“에스파냐가 마닐라에 있음으로 해서 장점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들을 몰아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민호는 필리핀 원주민을 투입할 곳으로 가장 먼저 일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니면 인도네시아나 호주로 진출할 때 요새 수비병력으로 쓸 생각도 했다.
나중에 필리핀 전체를 장악하더라도 에스파냐 사람들을 마닐라에 가둬두고 계속 무역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있었다.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난 이후 포르투갈 정부가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하겠다고 제안했어도 국제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공산정권이 거절한 것과 같았다. 이민호는 에스파냐에게 군사적으로 밀리지만 않는다면 그들의 존재가 이익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도시가 완성되더라도 그건 네가 가질 것이 아니니까 욕심 내지 마라. 너한테는 따로 시킬 일이 아주 많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따로 시키실 일이란 무엇이옵니까?”
“세상 곳곳,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항구와 요새를 만들고, 도로를 닦고, 원주민들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을 지휘하고, 그런 일이다. 앞으로 실컷 부려먹어 주겠다.”
옥남이 씩 웃었다. 그가 절실하게 원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저는 역적의 아들입니다. 저를 믿어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난 아무도 안 믿어. 병력도 조금씩만 줄 거야. 그러니 나한테 반란 일으킬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대신 네가 40살 넘을 때까지 열심히 일하면 작은 땅 하나 정도는 떼어주마. 거기서 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왕 노릇을 하던지 해봐. 그 전까지는 괜히 사고치지 마라.”
“안 주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주신다면 잘 키워보겠습니다.”
옥남은 뭘 준다고 하면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그의 꿈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어서 이민호는 더 이상 잡아두지 않기로 했다.
“좋다. 고! 오크남!”
“예!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아니, 그냥 가라고. 내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필요한 것은 예국 참의나 통령 혜영에게 말해. 내 마누라 건들면 죽인다?”
“제 마누라가 힘이 세서 외도는 생각도 못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정옥남은 이민호가 새로 그린 지도를 갖고 고산국을 떠났다. 조선에서부터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함께 떠났다. 이번 일을 잘해낸다면 능력이 된다는 뜻이니 한 번 키워보기로 했다. 그러나 배반당하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다.
고산국 직할군 육군과 해병의 편제를 약간 고쳤다. 아직 보병과 동행하는 포병을 운영하지 못했으나 화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25명 인원의 대(隊)마다 척탄병이 2명씩 있었는데 이들을 유탄발사기 사수로 전환했다.
새로 만든 유탄발사기는 M203처럼 소총 총열 아래에 부착해 유탄 외에도 조명탄과 연막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유효 사거리는 국궁 과녁 거리와 비슷한 150미터였고 최대 사거리는 한 마장, 400미터였지만 거리가 멀면 정확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 쾅!
처음으로 훈련장에서 직할군이 유탄을 발사했다. 굉음과 함께 표적 주변에 세운 허수아비들이 파편 폭풍에 휩쓸려 나갔다. 참호 속에서 유탄을 발사한 승마보병이 얼이 빠져서 멍하니 서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직할군 승마보병과 해병들도 마찬가지 표정이었다.
“뭘 그리 놀라나? 수류탄을 화약의 힘으로 멀리 날린 것에 불과해! 비격진천뢰보다 훨씬 약하잖아? 너희들은 정예 척탄병이니 폭탄의 위력이 강하다 해서 겁먹을 필요 없다! 적을 겁먹게 하는 것이 너희들이 할 일이다!”
역시 계복이 병사들을 신무기에 잘 적응시켰다. 소총은 승자총통의 개량형, 수류탄은 기존 질려포통의 개량형에 불과하다고 병사들에게 사기를 친 인간이었다. 수류탄을 멀고 정확히 던지는 일을 맡았던 척탄병들은 새로 유탄발사기를 쓰게 됐지만 예전과 하는 일이 같다고 인식해 쉽게 훈련에 적응했다.
비격진천뢰는 대완구를 통해 발사하는 일종의 시한폭탄인데 조선 육군에서 공성용으로 가끔, 수군에서는 지상 요새를 공격할 때 사용했다. 고산국의 배에도 지상 공격용으로 몇 문씩 보유하고 있었다.
승마 훈련도 계속됐다. 직할군 승마보병들은 조선 출신이 대부분이니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본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저 말 타고 이동하는 정도의 실력에 그쳤다. 몽골이나 여진족처럼 전투에 써먹을 만한 승마 실력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승마보병이라는 부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말 타기 훈련이 가장 큰 문제였다.
승마보병들은 절반은 보병총, 절반은 기병총으로 무장했다. 기병총은 6연발이지만 사거리가 짧고 위력이 약하고 재장전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총알을 장전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기병총 소지자들에게는 예비 실린더를 하나씩 더 만들어주었다. 총알 여섯 발을 일일이 장전할 필요 없이 미리 장전된 실린더를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급히 총알 하나를 넣어서 돌린 다음 쏘는 게 실린더를 교환하는 시간보다 짧아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단기간에 화력을 퍼부을 때 필요해서 승마보병들에게 휴대시켰다.
가장 어려운 일은 말을 달리면서 총을 쏘는 것이었고,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말을 탄 상태에서 일단 두 손으로 총을 표적을 향해 겨누기는커녕 장전조차 어려웠다. 여수 감불과 감동이 시범을 보이는데 말을 달리면서 등자를 딛고 우뚝 서서 쏘고, 총을 뒤로 돌려 쏘고, 심지어 말 등에 누워서도 총을 쐈다. 시범을 마치자 승마보병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주었다.
“주인님! 조선 출신 사람들은 어째서 말 타면서 총을 잘 못 쏩니까? 그냥 말에 타고 두 손으로 총을 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종족 특성이야. 여진족하고 달라.”
감불이 묻기에 이민호가 간단히 대답해주었다. 여진족 출신인 감불이 기고만장해졌다. 마치 남들보다 더 오래 공중에 떠 있으면 된다고 대답하는 농구 선수나 발레리노 같았다.
그러나 훈련이 계속되면서 조선 출신 승마보병들도 승마 상태에서 총을 다루는 것이 점점 익숙해졌다. 나중에는 조선인들이 승마 사격을 더 잘했다. 감불과 감동처럼 말 등에 누워서 쏘는 묘기를 부릴 수는 없었지만 안정적인 상태에서 총을 쏘면 과녁 중앙에 정확히 꽂혔다. 시전부락을 토벌할 때 동원된 간수군들은 전투 승마가 아닌 승용 승마 실력에 불과했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진짜 기병이 싸우는 줄 알았다.
이에 반해 감불과 감동은 아무리 노력해도 명중률을 향상시킬 수 없었다. 이것은 여진족의 한계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어느 나라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감불과 감동은 어렸을 때부터 말 타기에 익숙했지만 아직 젊어서 승마사격 훈련이 부족했다. 시간이 가면 해결될 테지만 이민호는 속으로 고소했다.
“주인님! 조선 출신 사람들이......”
“종족 특성이야. 여진족하고 달라.”
“어휴! 그렇게 말씀하시며 의욕이 뚝 떨어지지 않습니까?”
“말 타기는 여진족이 낫고 사격은 조선 사람이 낫다. 남의 장점을 시기할 시간에 부족한 부분을 훈련으로 채워!”
“넵!”
기마 실력은 떨어질지라도 사격 실력 하나 만큼은 알아주는 조선 사람들이었다. 실록을 보면 ‘조선의 궁술은 천하제일’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대신들이 있었다. 신유의 <북정일기>를 보면 내기 사격에서 청나라 조총수들을 압도하는 조선 조총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격실력이 좋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고, 이것은 역사가 증명했다. 전투 현장에서 군인이 제대로 싸우게 만드는 것이 훈련이었다. 이민호는 승마보병들과 해병들의 훈련을 더 연장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