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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18화 (67/1,000)

00118  18. 고산국에서의 보름  =========================================================================

궁녀들이 옥 도자기 견본을 더 가져오자 에스파냐 사신들이 희희낙락하며 구경했다. 가장 시급한 접시가 충분한 물량이 확보된 다음부터 사신들은 찻주전자와 찻잔, 관상용 꽃병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제품들도 유럽인들의 미의식을 참조한 디자인이라 사신들은 대만족이었다.

반면에 그깟 흙과 뼈로 만든 도자기, 절반 금액이든 두 배 물량이든 이민호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혜영이 툴툴거렸다.

“주인님! 그 금액이 은 2백만 냥이라는 사실은 알고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는 거여요? 갈레온 반 척 적재량에 해당하고 도공들이 최소 석 달 동안 만든 물량이에요. 에스파냐 사신단이 제출한 한 장짜리 구매요청서를 아직 안 읽었죠?”

“헉! 진짜야? 한 척만 왔다기에 잘해야 백만 냥쯤 살 줄 알았지. 2백만 냥 어치를 사겠다는 거였어?”

“그래요. 그런데 주인님의 한 마디 때문에 4백만 냥 어치를 2백만 냥에 팔게 됐어요.”

이민호는 매년 포르투갈이 구입하는 물량과 같은 양을 매입할 수 있도록 에스파냐에 허가했고, 그 금액은 매년 총 4백만 냥이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유럽의 가격 변동에 대비하고 한두 척쯤 인도양의 해적에게 노략질당하거나 폭풍우에 침몰할 것을 감안해 배들마다 옥 도자기 외에 향신료와 비단을 함께 실었다. 이를 위해 매년 마카오에서 출발한 상선 네 척이 고산국 항구에 와서 4분의 1씩 나눠서 실어갔다.

이민호는 포르투갈 상선에 맞춰 에스파냐도 비슷한 물량을 매입할 것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에스파냐 사신단은 일 년 매입한도의 절반인 200만 냥 어치를 구입 신청했다가, 이민호의 말을 듣고 같은 가격에 일 년 구입량 전체를 한 번에 사버렸다. 이민호는 처음에 50만 냥을 깎아줄 생각이었는데 말 한 번 잘못했다가 결과적으로 200만 냥을 폭탄 세일한 셈이었다.

물량으로 따지면 일 년 한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 마디 말실수로 올해 안에 에스파냐로부터 추가로 들어올 200만 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에스파냐 사신단이 제출한 매입 희망 품목과 총 금액을 적은 매입의향서 번역본은 이민호의 집무실 탁자 위에 고이 놓여 있었다.

“모르셨구나. 아! 제가 평강공주처럼 일일이 가르쳐드려야 하는구나.”

“내가 바보 온달이라는 소리야? 뭐, 맞네.”

“지금이라도 취소하세요. 금액이 너무 크니 저들도 이해해줄 거여요.”

“으윽! 아냐. 국왕 체면이 있지.”

“주인님의 한 순간 체면치레가 2백만 냥 값어치가 있었던가요?”

“그만해. 창피해.”

어쩐지 혜영이 자꾸 옆구리를 꼬집는다 했더니 무시했다가 큰돈을 날리게 생겼다. 이민호는 사흘 후에 항구를 떠나는 갈레온을 바라보면서 땅을 치며 후회했다.

1803년 미국은 당시 미국 영토의 두 배인 2백만 평방킬로미터 넓이에, 현대 미국 중서부의 14개 주에 걸친 광대한 루이지애나를 프랑스로부터 1500만 달러에 사들였다. 1866년에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입했다. 현대에는 불가능하겠지만 영토를 왕가의 재산이나 지참금 취급하는 이 시대 유럽에서 영토의 금전거래는 흔한 일이었다.

1792년 1달러가 금 1.584그램이었고 1934년에는 1달러 가치가 금 0.877그램으로 하락했다. 16세기 말 광동에서 금은 교환비율이 5.5배에서 5.7배 사이였으므로 5.6배로 잡으면 1달러는 은 8.87그램 가치와 같고 16세기 말 순은 한 냥은 18세기 말의 4.2달러 정도에 해당했다. 그러므로 은 200만 냥은 1792년 전후 시세로 8백만 달러 이상의 가치에 달했다. 물론 시대가 흐르며 은 시세가 떨어지겠지만 절반이라 해도 4백만 달러였다.

항구와 그 배후도시라는 작은 땅을 사면서 이민호가 확실히 바가지를 쓴 셈이었다. 사실 바가지도 아니고 순전히 먼저 매입 조건을 덜컥 제시한 이민호 잘못이었다.

“험! 험! 영구 조차지는 어디가 좋겠소? 내가 필리핀을 잘 모르니 대사가 추천해주시오.”

“여기 에스파냐 모험가들이 작성한 지도가 있습니다, 전하.”

잔뜩 들뜬 돈 후안이 가죽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꺼냈다. 전형적인 16세기의 고풍스런 지도 두 장이 이민호 앞에 펼쳐졌다. ‘여기에 드래곤이 있음’이라는 문구와 함께 바다 곳곳에 드래곤이 그려진 세계 지도가 하나, 필리핀과 주변 해역을 그린 지도가 하나였다.

이것은 실제로 드래곤이 발견된 곳이 아니라 미탐사 구역이며 그 부분 지도가 정확하지 않음을 뜻했다. 세계지도는 전에 마카오에서 본 지도보다 조금 더 정확하긴 했지만 이민호가 보기에 차라리 그 전 시대에 아랍에서 만든 지도가 훨씬 깔끔한 편이었다.

“이곳을 보십시오, 전하. 마닐라 바로 서쪽에 원주민들이 올롱가포라 부르는 곳이 수심이 깊어 좋은 항구가 될 것입니다. 탐험가들은 수빅 만이라고도 부릅니다. 아니면 북서쪽에 다구판 지역이 사구가 발달해 파도를 막을 수 있는 항구 적격지입니다. 사실 항구로서는 올롱가포가 더 좋은 입지 조건을 갖췄지만 마닐라에 너무 가까우니 가급적이면 다구판이 좋겠습니다.”

“마닐라에 너무 가까우면 총독께서 불편하게 느끼시겠지요. 다구판도 좋소만, 이 지도를 보면 그 북동쪽에 육지가 방파제처럼 길게 나와서 파도를 막을 수 있는 산토 토마스가 항구를 만들기에 더 나을 것 같소. 필리핀은 고산국보다 더운 곳이니 항구의 배후 도시는 산토 토마스에서 북동쪽으로 4레구아 떨어진 이곳 고산지대가 좋겠소.”

이민호가 항구의 배후 도시 후보로 지정한 곳은 나중에 바기오라는 이름이 붙으며 현대 필리핀 정부의 여름 수도가 있는 곳이었다. 더운 여름에는 필리핀 정부 자체가 통째로 옮겨오다시피 하는 시원한 곳이다. 1레구아는 영어권의 1리그, 3마일이며 5.5727km다.

“마닐라와 적당한 거리이니 저희도 좋습니다. 그 고산지대를 중심으로 항구까지 넣어, 반경 10레구아 정도를 영구 조차지로 정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보다 자세한 영역 구분은 현지에서 관리들이 하천이나 산등성이 같은 자연지물을 참고해서 정하도록 하시지요.”

이민호는 루손 섬 북부 전체를 달라고 요구할까 하다가 포기했다. 에스파냐에 인원이 적어 다른 지역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산국도 인력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넓은 영토에 욕심 부렸다가 관리도 못하고 원주민들이 대규모 반란이라도 일으키거나 나라를 세우면 고산국 입장만 곤란해졌다.

그리고 항구와 도시 운영을 위해 병력과 인력을 파견해야 하니 무한정 욕심만 부릴 수는 없었다. 또한 필리핀 전체를 욕심내는 것처럼 보여 마닐라 총독부에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도 없었다.

“10레구아라. 너무 넓으면 관리하기 곤란하니 그게 좋겠소. 혹시 그 지역에서 금이나 은 같은 자원이 산출되면 어떻게 해야 하오? 총독에게 세금을 내야 하오?”

“일단 땅을 매입하셨으니 그곳에서 뭐가 나든 당연히 국왕전하의 소유입니다. 산토 토마스 인근 지역을 사실상 고산국의 영토로 인정할 테니 얼마든지 개발하십시오. 다만 명목상 이곳도 에스파냐의 영토라는 사실만 인정해 주시면 됩니다.”

“주변 지역으로 확장할 의도는 절대 없소. 끔찍하게 더운 곳이라서 말이오.”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유럽에서는 더운 축에 드는 지중해 연안 출신이지만 이곳의 더위는 마치 지옥의 유황불 같습니다.”

에스파냐 사신과 아주 시원시원하게 대화가 진행됐다. 사신은 큰돈을 내고 쓸모없는 작은 땅을 차지한 이민호를 호구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금광과 은광, 동광이 산재한 곳이었다. 이민호는 그 지역을 요새화시킨 다음 천천히 뽑아먹기로 작정했다. 이곳을 얻기 위해 못 받은 은 200만 냥 정도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금이 가장 많이 산출되는 곳 중 하나였고 특히 이 지역에 금광과 은광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민호는 민다나오에도 금광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당분간 접근할 수 없었다.

이민호는 그 외에 필리핀 곳곳에서 산출되는 역청탄을 수입해 화학공업을 육성하거나 증기선을 운용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화력발전과 제철산업, 그리고 증기선에는 조선이나 고산국에서 주로 나는 무연탄이 아닌 역청탄이 필요했다.

에스파냐 상인이 해삼이나 전복을 사서 유럽에 팔 생각은 없을 테니 보여주지도 않았다. 이민호는 한산모시와 나전칠기, 차 종류 몇 가지를 소개하고 샘플을 넘기는 선에서 상담을 마무리 지었다.

유럽이 전반적으로 추운 지역이라 12승과 9승의 한산모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전칠기를 보는 눈은 확실히 달라 다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사신들이 차 여러 가지를 시음하며 남는 차는 꼼꼼히 잘 챙겨 가져갔다.

“옥 도자기를 배에 싣는 사나흘 동안 고산국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저희 사신단의 요청을 수락해주시겠습니까?”

“그 동안 호위를 붙여줄 테니 잘 구경하시오.”

이민호는 차분한 성격인 감동에게 호위를 맡기고 통역 두 명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담으로 둘러친 독립적인 객사에 짐을 풀고 만찬 때 다시 궁궐로 초빙하기로 했다.

사신단은 공식적인 간첩 행위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이민호도 인정했다. 나중에 고산국에서도 마닐라에 사신을 자주 파견할 계획이었다.

일본인 마을에서 성당을 건축 중인 예수회 선교사들을 불러서 사신단과 만찬을 함께 했다. 에스파냐 사신단을 따라온 신부와 마카오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오랜만에 만나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했다.

성당 건축비를 국비로 지원해준다는 말을 들은 신부가 이민호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러나 이민호는 동방의 기독교 수호자 프레스터 존이 아니었다. 특정 종교를 국교로 선포할 의사가 없으며, 모든 백성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가톨릭 신부들에게 똑같은 소리를 해도 상황에 따라 자비로운 왕이 되거나 이교도 악마 왕이 될 수도 있는데 이번에는 자비롭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국왕전하께서는 옥 도자기를 진짜 식기로 쓰시는군요. 감히 포크를 접시에 놓지 못하겠습니다. 포크가 접시에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가 아름답긴 해도 혹시라도 깨질까 두렵습니다.”

“하하! 나하고 이야기할 때는 용감하시더니 접시를 두려워하는군요. 깨져도 괜찮소. 사신 여러분께 따로 한 세트씩 선물로 드리겠소.”

“감사하옵니다만 식사 때 사용할 자신이 없습니다. 신분이 높으면서도 얄미운 손님이 오면 당황하라고 내드려야겠군요.”

나무식기나 질그릇을 사용할 경우 그릇에 음식 국물이 배기 쉬웠다. 유럽 음식문화에서 국물 요리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로 식기의 재료를 드는 학자들이 있었다. 이 시대 유럽 귀족들은 금 또는 은 식기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농민들에게는 구리 식기도 드물었다.

식탁에 유럽식 메뉴가 많이 포함돼서 에스파냐 사신들이 마닐라에서도 못 먹던 고향의 음식이라며 무척 기뻐했다. 에스파냐는 당시 유럽에서도 물고기 외의 해산물을 식용으로 하는 몇 안 되는 나라인지라 전복과 시뻘겋게 삶은 문어가 나온 만찬을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와인과 달짝지근한 디저트까지 내오자 사신단은 물론 신부까지 만세를 불렀다. 잠시 만찬장에 나온 혜진이 흐뭇한 미소를 띠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국왕전하! 저희들이 개인적으로 고산국 궁궐에 자주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순수하게 양국의 우호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그대들은 좋은 친구들이니 언제든 방문을 환영하겠소. 하지만 만약 디저트 때문이라면 조리법을 알려드리고 가시는 길에 설탕을 몇 포 내드리겠소.”

“하하! 들켰군요. 감사합니다.”

만찬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에스파냐 사신들은 걱정이 많았다. 깔레 해전 패배와 네덜란드 독립 전쟁 등으로 인해 본국 사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는 세계 곳곳에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신대륙에서 엄청난 양의 은을 본국으로 가져왔지만 막대한 군비 지출로 인해 국고가 급속히 고갈되고 있었다. 지금은 귀족 작위와 영주권이 매매되기도 했다.

결국 몇 년 후 1596년 에스파냐는 국가 파산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에스파냐는 옥 도자기를 유럽 귀족들에게 판매함으로써 국가 파산을 아주 약간 늦출 수 있었다고 한다.

============================ 작품 후기 ============================

오전에 한 편 더 올릴 예정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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