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4 18. 고산국에서의 보름 =========================================================================
18. 고산국에서의 보름
이민호는 방답 남쪽 연도에 가서 수리를 마친 전선 세 척을 이끌고 남동쪽으로 향했다. 다시 고래하고 충돌할까 무서워서 기관에서 나는 소리와 진동이 바닷물에 전해지도록 기관 하부 방음판을 약간 고쳤다.
이번 일로 인해 무조건적인 방음 대책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민호는 깨달았다. 그때부터 돌고래나 범고래 가족이 배 주변을 따라다녔으나 배가 고래와 충돌하는 사고는 없게 되었다.
“그렇게 장쾌하게 승첩한 해전이 세 번이나 벌어졌는데 참전하지 못해 아깝습니다. 저희를 부르지 그러셨습니까?”
“너희들은 외국인이잖아. 아직 정식으로 참전할 자격이 없다.”
“그럼 도련님이 얼른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든 아니면 다른 뭐든 하세요. 전쟁이 났는데도 참전하지 못하니 몸이 근질거려 미치겠습니다.”
옥포 등에서 조선 수군 연합함대와 함께 해전에 참가한 이야기를 해줬더니 계복이 부러워 죽으려고 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간수군에 입대하겠다는 계복을 이민호가 말려야 했다.
“그 문제로 고산국에 돌아가고 있다. 명나라에서 칙사가 왔대.”
“오호! 그런데 방향이 왜 대마도 쪽이죠?”
“한탕 하고 가야지.”
전선 세 척이 밤에 대마도 남동쪽 해상에 도착했다. 배 타고 자주 들렀더니 이제 익숙해진 곳이었다. 한밤중에도 환히 불이 켜진 이즈하라 포구에 수많은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단정 한 척을 내보내 늦은 밤이 될 때까지 이즈하라를 정찰시켰다. 정찰병이 다녀와서 일본 기준으로 쌀 10만 섬이 포구 주변 세 군데에 쌓여 있다고 보고했다.
늦은 밤이 되자 이민호의 지시에 따라 전선마다 한 척씩 단정 세 척을 내렸다. 대마도 도주 소 씨 가문의 아시가루 복장으로 위장한 직할군 해병들이 시커먼 타르가 담긴 통을 들고 단정에 탄 다음 이즈하라를 향해 노를 저었다.
고산국에서 배의 방수재로 사용하는 타르는 석탄이 아니라 소나무에서 뽑아 분해 증류한 것이었다. 젖은 나무를 땔감으로 쓰는 경우 목초액이라 하는 타르와 습기의 결합 물질이 굴뚝 안쪽에서 흘러 내려 쌓이다가 이것이 화재를 유발하기도 한다. 타르에 불이 붙으면 나무를 때는 화로보다 굴뚝이 온도가 더 높아져 지붕부터 태워버리는 수가 있었다.
“도련님! 이 작전도 교전 행위 아닙니까?”
“그냥 불만 지르고 오는 거야. 불을 지르는데 마침 그곳에 군량이 쌓여 있는 것뿐이야.”
“궤변 아닙니까? 그럼 은광을 공격한 건요? 그런 것 따지지 말고 그냥 싸워도 될 텐데요.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일본이 조선 놔두고 고산국을 공격하면 어떡할래? 명나라나 조선의 정식 요청을 받고 원군으로 참전해야 안전해. 국적을 밝히지 않는 편이 좋아.”
“그런 것 신경 쓰지 않도록 얼른 백만 대군을 만드세요.”
“지금 인구로는 일만 넘기기도 어렵다. 충분한 힘을 가지기 전까지는 강한 놈들 눈치 살피면서 항상 조심하는 게 좋아.”
직할군 해병들이 쌀섬을 쌓아놓은 곳에 타르를 뿌린 다음 성냥을 그어 불을 질렀다. 성냥은 유럽에서도 라이터보다 더 늦게 발명된 첨단 과학 제품이었다.
일본 쌀가마니는 볏짚을 꼬아 원통형으로 만들고 끈을 사람 가슴에 둘러 옮기는 식이었다. 조선 쌀가마니보다 탈 게 많고 공기와 접촉할 표면적도 넓어 불이 더 잘 붙을 수 있었다.
이즈하라 성 주변 세 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작전을 마친 해병들이 단정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포구에 가득 찬 왜선에도 불을 붙였다. 바람이 불면서 왜선 수십 척에 불이 옮겨 붙었다. 이즈하라 포구 쪽에서 비명과 고함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다.
- 탕! 타탕!
“도련님! 왜선 한 척이 추격해 옵니다!”
“뭘 걱정해?”
“그냥 그렇다고요.”
고바야 한 척이 단정 세 척을 쫓아오고 있었다. 고바야가 단정보다 컸으나 탑승 인원은 비슷했고, 조총수 2명이 탄 고바야에 비해 단정 3척의 화력이 압도적이었다. 단정에서 일제사격을 날린 직후 고바야는 이즈하라 항으로 도망가 버렸다.
“잘했다! 어서 올라와! 이번 작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각기 백은 일곱 냥씩 주겠다.”
“감사합니다, 국왕전하!”
왜군 복장을 한 직할군 해병들이 단정을 타고 돌아오는 순간 이민호가 상금을 책정했다. 해병들에게 들어 보니 쌀을 엄청나게 많이 쌓아놓은 곳 주변에 지키는 병사가 많지 않아 몰래 불을 지를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상금에 눈이 먼 직할군 해병들은 왜군 경비병이 많이 배치됐었더라도 불을 지르고 남을 놈들이었다. 왜군 점령지인 부산에는 보급품에 대한 경비가 철저하지만 이곳 대마도는 후방이라 경비가 삼엄하지 않은 편이었다.
나중에 대마도주 소 씨의 가신 몇 명이 이번 일로 할복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소 요시토시가 병력을 5천이나 동원한 바람에 실제 대마도 경비는 다른 군이 맡았는데 소 씨 가문이 덤터기를 쓴 셈이었다.
“도련님! 보급을 끊었으니 조선에 상륙한 왜군들이 굶게 될까요?”
“아니. 일본 땅에서 쌀을 더 갖고 오겠지. 우리가 조선에 오갈 때마다 꾸준히 불을 질러서 일본의 힘을 빼놓아야겠어.”
이민호는 전쟁 직전에 왜군의 진격로 상에 놓인 고을 사창의 쌀을 주변으로 빼돌렸다. 사창 신문에서 왜군의 예상 진격로를 공개했기 때문에 이것을 보고 지주나 일반 농민들도 전쟁 전에 미리 쌀을 옮긴 다음 피난을 떠났다. 원래 역사와 달리 왜군은 점령지 관아나 세창에서 양곡을 얻지 못해 군량미 사정이 아주 나빴다.
조선에 상륙한 침략군에게 군량미가 부족해지자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농민들에게서 쌀을 더 많이 공출하고 있었다. 이와미 은광이 무너지면서 침략군 전체가 당장 자금난에 허덕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급적 지출을 줄이고 있었다.
군량을 다시 수송하는 데에도 인력이 많이 소모된다. 그리고 일본 내에서 쌀 가격이 오르면 결국 일본 농민들만 고달파지고 전쟁을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이민호는 기대했다. 굶주린 농민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면 더 좋겠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음부터는 경비를 철저히 할 텐데 가능할까요?”
“그럼 다른 곳에 불을 지르면 돼. 출발! 고산국으로 가자!”
활활 타오르는 이즈하라를 배경으로 이 시대 배 치고는 특이하게 생긴 배 세 척이 어둠 속에서 남서쪽으로 움직였다.
사흘 뒤 오후에 전선 세 척이 고산국 아리수 하구에 이르렀다. 2km가 넘는 넓은 강 하구 북단에 건설되고 있는 요새에 벌써부터 병력이 배치돼 기함과 깃발 신호를 주고받았다. 강 하구 남단에도 작은 요새와 함께 등대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민호는 요새가 완성된 다음 궁궐 앞의 무역항을 강 하구 쪽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아리수는 강폭이 넓은 편인데도 갈수기에 수심이 낮고 토사가 쌓여 꾸준히 준설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이 정도 배수량을 가진 배들은 큰 걱정이 없었지만 이민호는 길게 증기선 시대까지 내다보면서 계획을 추진했다.
궁궐에 도착한 이민호는 집무실에서 혜영과 미카 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5월이면 이곳에선 이미 한여름이라 궁궐 여자들이 다들 시원하게 모시옷을 입고 있었다. 한산모시 중에서도 속이 비쳐 보이지 않는 12승의 고급 백저포는 비단보다 비싼 옷이었다. 조선에서 수입해 명나라 남부에 파는 중개무역품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혜영이 온 이후 궁궐이 매우 안정된 것을 이민호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한때 이민호가 부재중일 때 국왕 대리를 맡았던 미카가 혜영 옆에 있으니 마치 일개 시녀로 보일 정도였다. 똑똑한 최 선생이 의외로 혜영과 죽이 잘 맞았다.
“명나라에서 칙사가 자주 왔잖아? 귀찮을 정도로 말이지.”
“예국 참의가 칙사를 접대하면서 알아보니 조선에 원군을 보내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왔다고 해요.”
“벌써? 조선 조정에서는 아직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한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아. 게다가 보바이의 난이 아직 진압되지 않았어.”
영하, 즉 황하 만곡부인 오르도스에서 지난 3월에 몽골의 항복한 장수, 보바이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벌써 몇 개월을 끌고 있었다. 명나라에서 대군을 파견했지만 아직 진압하지 못했다.
지난해에 요동총병 직에서 파직된 이성량이 대군을 이끌고 영하로 출동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이성량 또는 이여송의 출전 순간이 요동에서 여진족이 힘을 뻗기 시작한 시점이 된다. 이성량이 누르하치를 너무 많이 키워줘서 이제는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조선은 황제가 큰 관심을 가진 곳이에요. 동창에서 조선에 수십 명의 간세를 파견해 주도면밀하게 살피고 있어요. 그리고 명나라 안에서 병력을 소집하고 있어요. 조선 조정에서 정식으로 구원군을 청하는 것은 다만 요식행위에 불과해요.”
조선에서 북경으로 파견된 사신들이 원군을 보내달라고 명나라 관리들에게 울고불고 매달렸다는 이야기를 이민호가 현대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 군대를 함정에 빠뜨릴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참고서에 적혀 있기도 했다.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하길 꺼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조선이 명나라에 읍소해 간신히 원군 파병을 이끌어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혜영의 판단은 전혀 달랐다.
“명나라는 지난해부터 시암과 유구국 등에 병력 파병을 요청할 정도로 일본의 조선 침공에 일찍부터 대비하고 있었어요.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유구국과 조선에 보낸 국서에 ‘북경에 가서 교화(敎化)를 펼치고자 한다.’는 말이 공통으로 들어가 있어서 이를 명나라에 대한 일본의 침략의도로 파악하고 대비한 것 같아요.”
명나라 입장에서는 일본에게 침략 당한 조선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을 압록강 너머에서 막으려는 것이었다. 지난해 11월에 조선에서 ‘관백 평수길이 내년 3월에 쳐들어오겠다고 큰소리 쳤습니다.’라고 상주문을 보내자 만력제가 병부에 조칙을 내려 해안의 방비를 튼튼하게 했다는 기록이 <명사>에 나온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명군의 파병을 요청한 공이 임진왜란에서 으뜸의 공적이라고 지껄인 사람들이 조선 조정에 있었다. 대표적으로 선조 임금이다. 알고도 사실을 호도하기 위해 그런 발언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고산국에서도 조선에 원군을 보내긴 보내야겠지만, 설마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 아니겠지? 해중국의 파병을 조선에서 거절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속국인 해중국 소속의 수군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반대하는 의견이 나왔다. 한성을 빼앗겼지만 아직은 일본과 해볼 만하다는 것이 조선 조정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평양까지 빼앗기고 나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
“시암 군대는 랑군에서 몇 년째 전쟁 중이기 때문에 파병을 거절했어요. 유구국도 사쓰마의 침공 위협을 이유로 곤란하다고 했어요. 그러니 명나라는 주인님께 절대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없어요. 상황을 봐서 주인님이 조금 튕겨도 괜찮을 거여요.”
“오호! 그렇단 말이지? 고마워. 역시 혜영이야.”
“이렇게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시암과 안남을 왕복하는 광저우 상인들에게서 정보를 뽑아내느라 왕명명 아가씨가 은 8만 냥을 들였으니 결제해 주세요.”
“컥! 역시 정보료는 비싸군.”
“유용한 정보이니 칙사를 만나면 그 이상을 뽑아내셔야지요.”
“알았어.”
이민호는 혜영이 옆에 있어서 무척 안심이 되었다. 마치 이순신 옆에서 편안하게 해전을 지켜보는 것과 비슷했다. 두 사람만 있다면 어떤 전쟁에서도 질 리가 없다는 믿음이 들었다.
“농지 개간하는 건 어때?”
“원주민들과 복건성 노동자들이 열심히 잘하고 있어요. 복주와 천주 등에서 노동자를 모집할 때 복건순무 조삼로 대인이 많은 편의를 봐주고 있어요. 일본이 복건으로 쳐들어올 줄 알고 대비하다가 조선을 침략하니 한 시름 놓으면서도 조선에 미안해하는 눈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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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이유는 다음 편에 나오겠지만 복건 노동자들이 고산국에 정착하려 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