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11화 (60/1,000)

00111  17. 옥포해전  =========================================================================

“저기가 적진포, 그 북쪽으로 들어가면 당항포가 있다. 수군에서 싸우면 자주 오게 될 테니 잘 기억해둬라.”

이민호는 적진포 위치가 여기서 한참 남쪽인 거류면 당동리나 춘원포에 가까운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부친은 당항포로 들어가는 목 바로 남쪽 살짝 숨어서 안 보이는 곳을 가리키며 적진포라고 불렀다.

바다가 육지로 깊이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당항포는 1592년과 1594년에 각각 한 번씩, 두 번이나 해전이 있던 곳이었다. 일본 함대가 세키부네 겨우 몇 십 척의 병력으로 진주를 공격하기 위해 일부러 당항포로 향한 것은 아닐 테니 서쪽 바다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간 것으로 봐야 했다. 지금 적진포에서 노략질하는 왜선들도 마찬가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당시 일본 수군이 사용하던 지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아버지! 어제 그렇게 대포를 쏘고 총도 많이 쐈는데 왜놈들은 우리가 온 줄 모르는 모양이죠? 저렇게 대놓고 노략질을 하다니 말입니다.”

“글쎄 말이다. 옥포에서 산으로 도망갔던 놈들이 배를 못 구해 아직 부산으로 돌아가지 못했을까? 어쨌든 왜놈들은 노략질하면서 저렇게 습관적으로 불을 지른다. 이런 식으로 자기들 위치를 알려주니 우리야 고맙지.”

이민호가 부친과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일본 수군이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지 못해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았다.

연합함대는 좌선 앞에 선 중위장의 배에서 보내는 깃발 신호를 따라 일제히 서쪽으로 나아갔다. 말하지 않아도 목적지가 어디인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적진포라는 포구마을에서 아직도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왜선 중선과 대선 13척이 포구에 정박해 있고 배에서 내린 왜군들이 마을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옥포와 합포에서 왜군들이 몰살당한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도 유전자에 각인된 해적의 본능 때문인지 왜군들은 노략질에 집중하느라 바로 뒤에 조선 수군이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당선(唐船)이다!”

왜선에 탄 수부가 크게 소리를 질러서야 왜군들이 놀라 배로 돌아왔다. 당선이란 단순히 외국배를 뜻했고 판옥선과 외륜선, 서양 범선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 퍼벙! 펑! 타타탕!

좌선에서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연합함대 소속 판옥선들이 일제히 앞으로 돌진하며 포와 총을 쏘았다. 왜군들도 조총과 활로 반격했으나 조선 수군은 두 번의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자신감이 높아진 탓에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이민호가 탄 외륜선에서도 간수군들이 배에 숨은 왜군을 향해 총격을 퍼부었다. 소음은 충분했다. 그 사이 이민호는 원균을 신경 쓰고 있었다.

“돌격! 판옥선 한 척당 왜선 두 척씩 잡아라! 수급을 좌수군에게 빼앗기지 마라!”

원균이 장대에 올라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순신에게 꾸중을 듣고 풀이 죽어 있었다가 왜선을 보니, 아니 왜군 시체를 보니 힘이 나는지 휘하 판옥선들에 전진을 독촉했다.

이민호는 선미 구조물 사이 그늘에 숨어 조심스럽게 조준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이었다. 총탄 탄두에 구리 피막도 없이 납을 쓴 탓에 몇 발 쏘면 총을 버리게 되겠지만 아깝지 않았다. 원균을 죽이거나 큰 부상을 입혀 장수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면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 땅!

어깨에 익숙한 진동이 느껴지며 소총이 발사됐다. 장대에 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원균이 뒤로 확 날아갔다가 장대 구조물에 부딪친 다음 앞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이민호는 얼른 총을 숨기고 선미루로 돌아왔다. 가슴이 쿵쾅거렸으나 후회는 없었다. 총알이 평소 쓰던 것보다 위력적인 것 같아 이상하다는 생각을 약간 했으나 그것이 나쁠 이유가 없었으므로 전투 지휘에 집중했다.

그 사이에도 왜군과의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왜군들이 배를 방패로 삼아 조선 수군의 공격을 잠시 버티는 듯했다. 그러나 조선 판옥선들에서 수군들이 맹렬하게 포격과 총격을 퍼붓는 기세에 질려서 금방 전투를 포기하고 산으로 도망쳤다. 그 전에 지휘하는 사무라이가 전사하면서 지휘계통이 무너졌을 수도 있었다.

바로 여기서 수군총과 소총이 위력을 발휘했다. 왜군들이 숲에 들어가기도 전에 등짝에 총탄을 맞고 왜군 수십 명이 쓰러졌다. 그러나 잠시 후 왜군들은 숲으로 사라져서 더 이상 표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 뻥! 퍼버벙!

그런데 조선 수군의 의욕이 지나쳐 빈 배에도 포격을 가했다. 좌선에서 명령을 내려 포격은 바로 그쳤으나 그 사이에 왜선 중 멀쩡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주인님. 좌선에서 신호가 왔어요.”

“하선! 간수군들은 포구에 여 별로 집결하라!”

이민호가 말을 타고 외륜선에서 내렸다. 민영은 당분간 중상을 입은 것으로 위장해야 했기에 배에 머무르고 민희만 말을 타고 내렸다. 그 사이 간수군 천 명이 125명씩 8려로 집결을 마치자 이민호가 왜적 소탕 명령을 내렸다.

“1, 2려는 왼쪽으로 가서 길목을 차단한다. 3, 4려는 서쪽, 5, 6려는 북쪽, 7, 8려는 동쪽을 맡는다. 적은 독 안에 든 쥐다. 전진!”

가로세로 2km의 작은 반도에 간수군 천 명을 투입하니 병사들 간격이 겨우 2미터에 불과했다. 이미 조직력이 와해된 왜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으나 모든 왜군들이 곧 바닷가에 도달했다. 어느 방향으로 도망가든 간수군들과 마주치거나, 아니면 바다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 타탕! 탕!

총소리가 점점 북쪽으로 이동했다. 서쪽과 동쪽으로 움직인 려들도 곧 해안선에 도달해 전진방향을 북쪽으로 바꿨다. 땅은 좁고 수색하는 인원이 워낙 많아서 왜군들이 숲에 숨어도 소용이 없었다. 왜군들은 점점 밀려나 북쪽 바닷가에 몰려들었다.

이민호는 말을 타고 간수군들을 따라 앞으로 움직였다. 뒤쳐졌다가 총에 맞은 왜군, 왜인들이 무수히 쓰러져 있었다. 선두에서 전진하던 5려 여수가 전령을 이민호에게 보냈다.

“첨지 영감! 왜적이 항복해오는데 받아줘야 합니까?”

“일단 받아줘. 나중에 처형해도 되니까.”

전령이 뛰어 돌아간 뒤에 이민호는 여유 있게 말을 몰아서 왜군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왜군 200여 명이 무기를 버리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복장을 살펴보니 전투병인 왜군은 50명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노를 젓던 왜인 수부들이었다.

“한 줄로 걸어 나오면서 오라를 져라. 저항하면 사살하겠다!”

여 별로 한 명씩 있는 일본어 통역이 소리를 질렀다. 통역이라 해도 전문적으로 일본어를 배운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일본어 문장을 외운 수준이었다. 외국 군대인 왜군과 싸울 때 꼭 필요했다.

잠시 웅성거리던 왜군들이 차례로 걸어 나와 밧줄에 묶였다. 왜군은 이미 패한 다음에는 고분고분한 편이었다. 지휘관인 듯한 무사 세 명이 할복했는지 짧은 칼을 배에 꽂고 쓰러져 있었다.

이날 낮에 간수군들은 왜군 포로 200여 명을 묶어서 적진포로 돌아왔다. 수급은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포구에서 얻은 것을 빼고도 총 300여 급에 달했다.

포위과정에서 남김없이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처음에 추정했던 왜군 규모에 비해 왜군 숫자가 조금 모자랐다. 아무래도 간수군들을 피해 바다로 뛰어든 왜인들이 꽤나 있었던 것 같았다.

“왜 저래?”

그런데 적진포에 돌아와 보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비롯해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의 모든 장수들이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판옥선들 사이에 못 보던 탐망선 한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몇몇 사람들 얼굴을 확인했는데 그들은 원래 남해 남단을 경비하던 탐망꾼들이었다.

위에서 누가 내려와 탐망선을 타고 온 모양이었다. 역시나 통곡하는 장수들 앞에 전라감영 소속 군관이 한 명 서 있었다. 전라도사 최철견이 급파했다는 전령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망극하게도 주상전하께서 서쪽으로 파천을 하셨습니다.”

“저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이민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수군 장수들은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하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왜군의 침략을 미리 막지 못한 저희 무신들의 잘못입니다. 어흑흑~”

분위기 탓에 어쩔 수 없이 이민호도 무릎을 꿇고 억지로 곡을 했다. 실로 뻘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수들은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고 본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전라도사 최철견이 보낸 전령은 임금이 몽진한 것 때문에 근왕군을 급히 모은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다가 연거푸 승리 중인 연합수군의 사기를 확 꺾어버린 셈이 되었다.

일단 수영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전장 정리를 하는 중에 이민호가 전라좌수영 좌선에서 호출을 받았다. 하도 울어서 눈이 시뻘겋게 변한 이순신이 이민호의 손을 잡고 물었다.

“통지 자네, 조선 백성들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놓은 것을 아네. 자넨 주상전하를 위한 대비도 따로 해놓았겠지?”

“예. 상단의 윤선 한 척이 몽진길에 따라붙어서 호위도 하고 수랏상도 준비하도록 일러두었습니다.”

“고맙네. 역시 통지 자넨 충신이야.”

조선 왕조를 전복시키거나 최소한 선조 임금을 없애버릴 생각을 이민호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여립의 기축옥사 때 역적으로 몰릴 뻔하거나 황금으로 12지신상을 바칠 때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민호는 조선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매년 홍삼 판매액만으로 이민호는 조선 왕실에 바치는 이상의 이익을 얻고 있었다.

이민호가 바친 황금상들은 몽진하기 전날 내시들이 조운선을 동원해 강화부 관아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백성들에게도 소문이 나서 구경꾼이 늘어나자 군졸들이 24시간 경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강화도 백성들이 크게 분노했다. 왕실에서 어마어마한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백성을 구하거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쓰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여론은 이민호가 예상한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조선 왕실, 특히 선조 임금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이민호가 원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전쟁 과정에 필요한 물자를 무상 징발로 빼앗기는 것이 아닌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판매하게 된 것이 이민호의 소득이었다.

이순신은 장계와 군공마련기를 수정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간수군들을 지휘하면서 얻은 수급이 세 군데 해전을 합해서 800여 과, 그리고 포로는 216명이었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이 얻은 것을 합해도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간수군들은 벼슬할 사람들이 아니니 전공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은으로 포상하기로 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러니 유군장이신 부친께 수급 100과, 포로 100명 정도로 하고 나머지는 형님께서 수하 무장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십시오.”

“자네 뜻은 고맙지만 조정뿐만 아니라 어전에서도 이런 저런 방법으로 전공을 확인한다네. 만약 전공을 나눠줬다가 나중에 걸리면 그것을 받고 승진한 사람들이 탄핵을 받아 자리보전을 하기 힘들 걸세.”

“끙! 그럼 다음부터는 다른 무장들에게 배를 통째로 넘겨야겠군요. 그래도 몇 과 정도씩은 괜찮을 겁니다. 수급을 베지 못했더라도 총과 활을 왜군들에게 쐈으니까요.”

“그 정도라면 어느 정도 될 것 같네.”

이순신이 장계를 쓰면서 총 전과가 수급 1251과, 포로 224명, 되찾은 조선인 포로 8명으로 최종 집계됐다. 그것은 경상우수영의 전과를 뺀 전라좌수영만의 전공이었다. 단순히 숫자로만 따지면 대첩 그 이상이었다. 각종 무기나 갑옷 등 전리품은 산더미처럼 많아 미처 세지도 못했다.

이민호가 이순신과 머리를 맞대고 협의한 결과 이민호 부자와 유군의 전공을 수급 410과까지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왜군 포로 224명 중 간수군이 잡은 216명 전원은 그대로 간수군들이 잡은 것으로 했다.

여러 가지 명목으로 다른 장수들에게 수급을 분배해줬으나 더 이상 핑계를 찾을 수 없어 나머지는 다 갖기로 한 것이다. 특히 포로 대부분을 지상 추격전으로 잡았으니 다른 장수들에게 공을 넘길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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