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10화 (59/1,000)

00110  17. 옥포해전  =========================================================================

경상우수영 군관들이 간수군들에게 활을 겨누며 대응하는 사이 원균은 부들부들 떨며 진땀을 뻘뻘 흘렸다. 옥포와 이곳에서 간수군들의 전투력이 얼마나 강한지 지켜봤으니 원균이 아무리 정신 나간 자라 해도 감히 싸우자고 나서지 못했다.

사실 원균은 겁이 많았다. 칠천량 해전에서 불리하다고 판단했더라도 한산도로 돌아가면 되는데 굳이 물길이 막힌 춘원포로 빠지는 바람에 조선 수군을 완전히 말아먹고 말았다. 임진왜란 초기에도 경상우수영 판옥선들을 자침시킴으로써 해전을 하지 않고 피해 다녔다.

원균도 인간이니 당연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적을 피할 수도 있다. 그것이 인지상정이었고 현대 이전의 전술은 인간이 느끼는 공포를 극복하려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이유로 허용되는 비겁함에도 한계가 있었다. 일단 겁을 먹으면 사고회로가 완전히 마비되어 정상적인 판단을 못 내리는 사람에게 수군절도사를 맡긴 것은 큰 문제가 있었다.

그 사이에 전라좌수영 좌선이 도착했다. 이순신은 아군 전선들끼리 대치하는 상황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그만 두시오! 같은 편끼리 이게 무슨 짓이요!”

“좌수백! 이 첨지의 여자 호위병이 총을 쏴서 내 군관에게 부상을 입혔소.”

“무슨 소리야! 원균 네놈의 군관이 먼저 내 아들 민호에게 활을 쏴서 며느리가 대신 죽었잖아! 거짓말하지 마!”

부친 이응화가 화를 내며 원균을 논박했다. 상황을 알아 챈 이순신은 어이가 없어 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전라좌수사와 경상우수사는 같은 직급이라 이순신이 임시로 주장을 맡았다 해도 원균을 처벌할 수가 없었다. 이민호에게 화살을 날려 민영에게 맞힌 군관도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이순신의 선에서 처벌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도 이순신에게 아직 선택권이 남아 있었다.

“이 문제는 장계를 올릴 때 조정에 정식으로 보고하겠소.”

“이 수백! 그건 곤란하오.”

“옥포에서도 같은 편인 순천전선에 활을 쏘아 두 명이나 부상시키지 않았소? 무기는 제발 적에게만 사용하시오! 아군에게 쏘지 말란 말이오!”

“우리 경상우수영이 곤란한 처지이니 전공을 나눠주고 그래야지 치사하게 너무 그러지 맙시다.”

특정 부류의 사람을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나 논리로 애써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마치 자연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땅 투기를 했다는 정치인들의 이상한 논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왜 그런 곤란한 처지가 됐는지 그 이유를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격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판옥선 겨우 세 척으로 24척을 동원한 전라좌수영보다 더 많은 전공을 세우길 바라는 것은 무리이며 과욕이었다. 일본 수군이 경상도 해역에 들어오기도 전에 원균이 명을 내려 판옥선을 모조리 자침시켜버렸으니 남 탓을 하고 싶어도 변명거리가 없었다.

“옥포에서도 전공을 충분히 나눠주지 않았소? 왜 억지로 남의 전공을 빼앗으려 하시오? 원 공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왜군이오. 조선군이 아니란 말이오. 이제 알겠소?”

“그건 나도 아오. 하지만 나는 얼른 전공을 세워야......”

“남의 전공을 훔치지 말고 직접 적을 잡아서 전공을 세우란 말이오!”

“적은 무섭지 않소?”

<난중일기> 계사년 2월 28일자에 원균이 가덕도를 지난 어느 작은 섬에서 부하들을 시켜 조선 어부들의 목을 베어 왜군 수급으로 위장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경상감영 도병방 이탁영이 쓴 <정만록> 6월 27일자에는 ‘이와 같이 일본으로 잡혀간 여자들은 관백 평수길이 엄격히 외인을 금하여 되돌려 보냈는데 수사(水使)가 적선을 당파할 때에 배에 가득 찬 여아(女兒)들이 다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외쳤는데도 못 들은 체하면서 모두 목을 쳤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경상감영에서 수사라고 칭할 자는 경상좌수사와 경상우수사 둘이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동래성 전투 이후 병력을 해산하고 행재소를 찾으러 가면서 최소 6월 말까지 여전히 경상좌수사 직함을 갖고 있었다. 6월 27일 이전에 해전을 수행한 경상수사는 경상우수사 원균뿐이다. 그러니 <정만록>에서 언급된 수사는 경상우수사 원균이다.

“뭐요? 아군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줄까요?”

“아, 아니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이민호는 민영을 껴안고 펑펑 울었다. 겨우 5년 동안 같이 생활했지만 그 동안 정이 들 만큼 들었다. 굳이 육정이 아니더라도 같이 지낸 시간이 많은 민영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어 갑작스런 죽음을 접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자기 여자를 남자가 지켜줘야 하는데 오히려 민영이 이민호를 지켜주다 죽어서 더 서글펐다.

그런데 민영이 한쪽 눈을 살짝 뜬 것처럼 느껴졌다. 이민호가 눈물로 흐릿해진 눈을 손등으로 닦고 다시 민영의 얼굴을 살폈다.

“주인님.”

“민영, 살아있어?”

“주인님이 저번에 여자용으로 가슴이 볼록한 흉갑을 만들어주셨잖아요. 경사진 곳에 맞아 화살촉이 빗나갔나 봐요.”

“아! 그랬지. 살아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이민호가 민영의 가슴에 꽂힌 화살을 뽑고 옷섶을 열었다. 비스듬히 옷에 박혀서 화살이 가슴 깊이 관통한 줄 착각했는데 과연 화살촉이 방탄판에 흠집만 냈을 뿐 뚫지는 못했다.

가슴이 볼록한 여자용 방탄판은 이민호가 반쯤은 장난삼아, 반쯤은 무게를 줄이려는 의도에서 좀 더 얇게 만들면서 곡선을 많이 넣고 담금질하여 표면 강화 기법까지 동원해 열처리한 제품이었다. 그리고 일본 조총으로 사격 시험도 마쳤다. 조총탄을 막을 수 있는 갑옷이 관통력에 중점을 둔 편전도 아닌 충격력 위주의 장전을 막지 못할 리가 없었다. 민영은 가슴에 충격을 받고 잠시 기절했을 뿐이었다.

민영이 일어나려 하자 이민호가 계속 누워있도록 했다. 이순신이 원균을 몰아붙이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괜히 먼저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당분간 민영은 죽은 척하기로 했다. 이순신이 장계를 쓸 때가 되면 민영이 죽지 않고 부상만 당했다고 살짝 알려줄 계획이었다.

“주인님이 이렇게 눈물을 흘려주시다니, 너무 감동했어요. 다음에 만약 죽게 되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여요.”

“안 돼! 내가 죽을 때까지는 절대 죽지 마! 이건 명령이다.”

“네! 울보 주인님. 눈물 닦고 코도 푸세요.”

“훌쩍!”

그날 밤 이민호는 민영에게 영원히 기억될 만한 뜨거운 밤을 선사했다. 민영이 아무리 체력이 좋다 해도 이민호가 작정하고 달려드니 결국은 지쳐서 축 늘어졌다. 이민호가 다시 공격을 해대자 나중에는 민영이 도망가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민호를 말리던 민희가 대신 몸을 받아들였으나 얼마 버티지 못했다.

“민호 이놈아! 죽을 뻔했다가 살아서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그러다 며느리 잡겠다! 에잉! 짐승 같은 놈!”

옆방에서 자던 부친이 새벽에 성질을 내더니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과부라도 사귀라고 권해드렸는데 부친 이응화는 체면 때문에 계속 혼자 살았다.

“효도를 하셔야죠, 주인님.”

“아버지가 새장가 가실 생각이 정말 있으신가?”

부친의 체면치레를 해주면서도 원하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부친이 워낙 강하게 거부하니 함부로 추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축 늘어져버린 민영을 보살피던 민희가 대안을 제시했다.

“일본에 화약 한 통만 팔아도 처녀 50명을 살 수 있잖아요.”

“작년 말부터 태합에 의해 일본 내에서 노예 판매가 금지됐어.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으니 화약을 더 이상 일본에 팔 수 없어. 마지막으로, 처녀 50명을 노인네에게 안겨드리면 그건 효도가 아니라 암살 기도야.”

이민호가 목적을 달성하려면 조선에 인명 피해가 적게 가면서도 원래 역사 그대로 수도 한성이 왜군에게 점령당해야 한다. 그리고 명군이 요동을 비우고 대거 출동해서 건주위 여진이 요동에서 세력을 확장시킬 수준까지 전쟁 규모가 확대되어야 했다.

이민호가 그 동안 일본에 판 화약의 양도 딱 그 정도로 한계를 지었다. 그리고 조선 사람으로서 기분 나쁘지만 명군이 조선 땅에 들어와서 역사대로 명나라가 약화되고 여진이 흥성해야 했다.

“호호! 그렇겠네요. 저도 알아요. 주인님이 노예제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을요. 일본 처녀들을 마음대로 하지 않고 고산국에 도착한 즉시 다 해방시켜주셨죠. 사실 저도 노예로 팔려왔었잖아요.”

“그 덕에 민희와 민영을 만나긴 했지만, 민희의 고향이 그렇게 된 건 나도 가슴이 아프다.”

“조선을 공격하다 당했으니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여진족 여자들은 정복자에게 안기는 걸 숙명으로 여긴답니다.”

“정복자? 그래. 내가 민희를 정복해주겠어!”

이민호가 다시 불끈해서 민희를 눕혔다. 민희가 아담하면서도 탄탄한 몸을 활짝 열어 이민호를 받아들였다.

침대가 요동치자 옆에 누운 민영이 힘겹게 실눈을 떴다가 감아버렸다. 민영의 입에서 한숨처럼 힘겹게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주인님 짐승.”

5월 8일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현대의 마산인 웅천 땅 합포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남포에서 경야하고 새벽에 출항했다. 남포 바로 서쪽 고리량에 왜선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된 탓에 급히 출동하면서 군사들은 아침도 못 먹었다. 물론 이민호가 탄 외륜선에 식수와 땔감을 충분히 싣고 다닌 덕택에 간수군들은 이동 중에도 밥을 해서 교대로 먹었다.

어제 일로 기가 죽은 원균은 경상우수영 함대를 뒤로 물린 채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다. 이민호는 그런 원균을 위해 특별한 총탄을 만들었다.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 개인적인 원한과 내버려두면 앞으로 죄 없이 죽어갈 무수한 조선 백성들의 한을 담아 왜선에서 노획한 납탄에 망치질을 했다.

이민호가 개발한 소총에는 구리 탄피에 무연화약을 담고 구리 피갑을 씌운 연철 탄심을 탄피에 물린 총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번에 특별히 만든 총탄은 왜군이 조총에 쓰는 둥근 납탄을 뾰족하게 두들겨 탄피에 이어 붙여 완성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현재 사용하는 소총의 실탄에서 탄두를 제거하고 납탄으로 바꾼 것에 불과했다. 조총 명중률이 너무 떨어지고 사격 순간에 연기가 많이 피어오르기 때문에 이민호는 이렇게 탄자만 바꿨다. 구리 피막을 씌우지 않은 납탄은 비행 중에 변형될 가능성이 높아 자칫 관통력이 뚝 떨어질 우려가 있었지만 왜군이 쓰는 조총의 납탄도 두정갑을 관통하기에 충분하니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주인님. 원 수사를 기어코 죽이시려고요?”

총탄 만드는 작업을 지켜보는 민영은 걱정이 많았다. 만약 이민호가 저격하는 장면을 남들에게 들킨다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아무리 이민호가 조선 사람이었다지만 이들에게 조선은 이미 외국이었다.

“응. 우리 민영이 죽을 뻔했잖아. 그 외에도 이유가 많아. 나도 같은 편을 쏘는데 거부감이 심하게 들지만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어.”

“어젯밤에 주인님 때문에 진짜로 죽을 뻔...... 아니에요!”

이민호가 얼굴이 빨개진 민영의 손목을 잡아 당겨 품에 안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는 민영을 안고 보니 참을 수가 없어 이민호는 다시 아침부터 힘을 쏟았다.

그 동안 연합함대가 고리량을 수색했으나 고리량은 물론 주변 바다에서도 적선을 찾지 못했다. 이때부터 이순신은 사후선들을 사방으로 풀어 고성과 당항포로 들어가는 바다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연합함대는 일단 고리량 근처 저도에 머물렀다. 저도는 돼지 섬이라고도 했다.

잠시 후 서쪽으로 수색을 나갔던 사후선이 가장 먼저 돌아왔다. 그러나 경력이 긴 수군들은 수색 결과를 말로 떠들고 다니지 않고 전라좌수영 좌선으로 직행해 문서로 보고했다.

궁금해진 이민호가 고개를 내밀고 보니 서쪽 바다 건너 산 너머에서 연기 여러 줄기가 한꺼번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왜선에서 내린 왜군들이 바닷가 마을을 노략질하는 전형적인 신호가 바로 저 여러 가닥의 연기였다. 좌선에서 신기전을 쏘아 올려 사방으로 흩어졌던 사후선들을 불러 모았다.

============================ 작품 후기 ============================

오전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원균에 대한 것은 엔하위키에 잘 정리돼 있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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