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9 17. 옥포해전 =========================================================================
“전투선은 저기 포위당한 여섯 척뿐이고 나머지는 병력만 태운 수송선들이야. 좀 약하지.”
“병력은 수송선에 더 많이 탔는데도 약해요?”
“해전을 하려면 배와 무기를 따로 준비해야 하고 많은 시간을 들여서 병사들에게 해전 훈련을 시켜야 해. 육군 병력만 잔뜩 태운다고 강해지는 건 아니야.”
유럽에서는 1571년 레판토 해전까지는 대포를 사용하더라도 소수에 불과했고 주로 백병전이 함대전의 승패를 갈랐다. 유럽의 화승총과 오스만의 복합궁을 대표적인 무기로 들기도 하지만 실제 각 군함들 사이의 전투는 항상 백병전으로 결판났다.
그러나 1588년 깔레 해전 이후부터는 대포가 해전의 주역 위치를 차지했다. 무적함대의 짧고 강한 데미 캐논에 대한 영국 함선들의 장거리 함포인 컬버린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포는 총과 활처럼 대인 무기였으며, 19세기까지 적선 격침이 아닌 나포에 주력하게 된다.
그런 세계사의 흐름과 달리 조선 수군은 화약무기 사용을 시작한 고려 말부터 적선의 격침과 분멸에 초점을 맞췄다. 일본 수군이 세계사의 흐름에서 약간 뒤쳐진 것은 사실이지만 명나라 남부를 쓸었던 가정 왜구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렇게까지 약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하필 조선 수군은 화포를 주 무장으로 선택했으니 일본 수군 입장에서는 상성이 아주 나빴다. 그저 운이 없다고 봐야 했다.
- 탕!
이민호와 민희, 민영도 소총을 들고 왜선을 향해 발사했다. 갑옷을 걸친 왜군은 더 이상 남지 않았고 얇은 천옷을 입은 왜인들만 도망갈 곳 없는 배에서 하나씩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 바닥에 엎드려 두 손을 싹싹 비는 왜인들마저 간수군들의 소총이 용서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저항하지 못하는 왜인 수부들을 포로로 잡아 광산 일을 시키거나 고산국에 농부로 정착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 입장에서는 왜군이나 왜인이나 다 같은 침략자 원수들이기 때문에 살려주자고 말하기 어려웠다. 아무 생각 없이 징집돼 왜선에서 노를 젓던 왜인 수부들의 운명은 그것으로 결정됐다.
“해전이 항상 이렇게 쉽지는 않아. 왜군도 전투선은 조총을 많이 갖춰서 상대하기 꽤 까다롭다고 하더군.”
“이런 만만한 적만 만나면 좋겠어요, 주인님.”
이민호는 임진년과 계사년을 수군에서 보낸 부친에게 많이 배웠다. 왜선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본갑판 사방을 판자나 대나무를 엮은 방패로 뒤덮어 마치 판옥선처럼 내부 승무원을 보호하는 본격적인 전투선도 있고, 본갑판에 기둥만 세우고 노꾼들이 외부에 완전히 노출되는 수송선도 있었다.
노꾼들을 대나무로 가려 보호하더라도 대나무 수십 개를 둥글게 묶어 총탄과 화살을 완벽히 방어하는 죽방패도 있고, 마치 발처럼 한 겹으로 얇게 두른 경우도 있었다. 세키부네 자체가 여러 영지에서 건조되고 임무에 따라 배를 달리 만들어서 일률적으로 이건 이렇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이응화나 겐타로에게 들어서 알게 됐지만 일본 수군 함대도 마찬가지로 이민호가 가졌던 상식과 거리가 멀었다. 임진왜란에 조선을 침공한 왜군의 편제에서 수군은 다 합해서 만 명도 되지 않았다. 수군을 이끄는 장수들은 휘하 병력이 겨우 천 명에서 2천 명 정도에 불과한 올망졸망한 다이묘들이었다. 그리고 일본 전국시대의 진짜 수군이라 할 수 있는 해적 영주들은 수군 소속이 아니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군에 배속되어 지금은 육지에서 싸우고 있었다.
조선 수군이 임진년에 당항포 해전에서 싸운 적 함대 대장은 검은 천에 흰 글씨로 남무묘법연화경을 쓴 깃발을 사용했으니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이 분명했다. 한산해전의 상대방 주장은 수군장인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맞지만 주력 병력은 조선의 여러 기록에 나오듯 우키다 히데이에 소속이었다. 노량해전은 시마즈 요시히로 등 육군 병력이 나섰다.
해전이라 해서 반드시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의 상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육군이 태반이었던 것이다. 조선이나 현대 기준으로 생각해 당연히 해전의 상대로 일본 수군이 나섰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왜선들은 외륜선들이 늘어서서 만든 포위망에서 단 한 척도 빠져 나가지 못했다. 이민호가 부친에게 듣기로 예전에는 왜선 절반이 빠져나갔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포위망이 이중으로 쳐져서 빠져 나갈 틈이 없다는 차이가 있었다. 외륜선들 주변에 주인 잃은 배들이 표류하고 있었다.
“단정 내려! 왜선을 수색하고 전리품과 수급을 취한다!”
이민호가 목구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욕지기를 꾹 참으며 명령을 내렸다. 혐오스럽지만 이 일은 반드시 필요했다. 수군이 연승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수군의 전공을 폄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수급을 바치지 않으면 전공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수급을 바친다 해도 거리 때문에 조정에는 왜군의 귀를 잘라 바치고, 진짜 수급은 감사에게 보내 확인받는 방식이었다.
간수군들이 단정을 타고 갑판이 시뻘겋게 피로 젖은 세키부네나 고바야에 올라탔다. 그리고 도끼를 높이 들어 이미 죽었거나 부상으로 죽어가는 왜군들의 목을 내리쳤다. 물에 빠져 죽은 왜군을 건져 목을 베는 간수군들도 있었다. 전투원보다 노를 젓는 수부들이 더 많은 세키부네의 특성상 왜군보다 왜인이 훨씬 더 많았으나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수급을 베는 작업이 드디어 끝났다. 외륜선 옆을 빠져 나가려다가 붙잡힌 왜선들은 크기도 작고 다 합해서 겨우 13척에 불과했다. 그러나 수급은 깔끔하게 330개나 얻었다.
어이가 없어진 부친 이응화가 허탈하게 웃었다. 일반적인 해전에서는 이렇게 많은 수급을 얻기가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다.
“허! 전에는 반나절 동안 죽어라 싸워 적 대선을 간신히 잡고 나서 겨우 수급 하나만 얻은 적도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옥포 바깥 차단선이 더 알짜였다. 왜군 대장선을 포함한 여섯 척은 집중적인 화포 공격에 얻어맞아 물 위에서 배가 해체될 정도로 무너졌다. 하지만 왜군 전사자들까지 모두 물에 빠지는 바람에 수급은 거의 얻지 못했다.
그리고 해전이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왜군들 대다수가 다시 옥포에 상륙해 산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러나 조선 수군이 배를 비워두고 산으로 쫓아갈 수도 없었다.
해전은 이렇게 대충 마무리되었다. 연합함대 수군들은 왜선에서 전리품으로 삼을 물건을 찾아내 판옥선에 옮겨 싣고 있었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판옥선 총 27척에서 얻은 인적 전리품은 수급 30여 개에 조선인 포로 6명이 전부였다.
싸움은 연합함대 수군들이 다 하고 실속은 유군 소속 간수군들이 챙긴 셈이 되었다. 물론 이민호는 이 수급으로 전공을 독차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 이제 상륙해서 산에 오른 왜군을 추격해야 하지 않습니까? 수군은 못해도 간수군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놈들을 내버려두면 거제도의 백성들이 해를 입을까 걱정됩니다.”
“아니. 곧 이곳 옥포만에서 나가야 한다.”
이응화의 말이 맞았다. 조금 전 외륜선들을 지나 옥포만 바깥으로 나갔던 척후장의 배가 다시 돌아왔다.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은 왜선 큰 배 다섯 척이 근처 바다를 지나가고 있다고 전라좌수사에게 보고했다. 연합함대는 절반쯤 부서져 있는 왜선들을 모두 불태운 다음 옥포만 바깥으로 나가 왜선들을 뒤쫓았다.
진해와 거제도 사이 넓은 바다에서 연합함대가 추격하자 왜선 다섯 척이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왜군들은 배에 실려 있던 물건을 버리고 심지어 쌀이나 식수도 바다에 다 버렸다.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해서 조선 수군의 추격에서 벗어나자는 속셈이었다.
추격전이 계속됐으나 순풍을 받고 달리는 왜선을 판옥선이 따라잡기에는 조금 무리였다. 판옥선은 돛이 두 개라 왜선에 비해 역풍에 더 강했으나 무거운 탓에 순풍을 받을 때는 왜선이 유리했다.
이때도 외륜선 여덟 척은 연합함대 뒤쪽을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전라좌수영 좌선에서 보낸 협선이 외륜선으로 다가왔다. 군관 송희립이 소리를 질렀다.
“수사 영감의 군령이오! 이 첨지 영감은 저 왜선들을 따라 잡으시랍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전해드리시오. 참! 옥포에서 유군이 수급 330개를 얻었다고 보고를 드리시오.”
“우와! 엄청납니다.”
사람 머리 330개를 배 안에 쌓아두고 있자니 이민호는 속이 무척 거북했다. 사실 꿈에 나타날까 두려워 수급을 일일이 확인하지 못했다. 간수군 여수가 확인해 보니 수급들 모두가 앞이마를 훌렁 민 왜인이 틀림없다고 보고했다. 병장기와 갑옷도 많이 얻었으니 전공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외륜선 여덟 척은 돛을 활짝 펼치고 황소에 채찍질을 가해 최고 속도를 내며 일단 아군 판옥선들을 추월했다. 그리고 왜선들을 점점 따라잡으면서 대포를 쏘았다. 돛이 부러진 왜선은 뒤따라오는 아군 함대가 잡으라고 내버려 두고 나머지 네 척을 끝까지 쫓았다.
외륜선이 속도가 붙어서 다행히 왜선들이 합포에 들어가기 직전에 앞을 차단할 수 있었다. 외륜선 여덟 척이 왜 대선 네 척을 포위한 채 전투에 들어갔다.
“수류탄!”
- 쾅!
아군 함선들이 보지 않는 사이 간수군들이 마음껏 수류탄을 던져 왜선 네 척을 후딱 잡아버렸다. 그리고 뒤쳐진 왜선 한 척을 잡고 오는 연합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수급과 쓸 만한 전리품을 싹 긁어버렸다. 전라좌수군만 있다면 이럴 필요가 전혀 없겠지만 남의 전공을 탐하는 원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왜선들은 수송선에 가까워서 짐이 잔뜩 실린 반면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공과 최소한의 호송군까지 합해 수급 120개를 얻는 데에 그쳤다. 뒤늦게 원균이 탄 배가 접근했다.
“이 목사! 왜선 한 척만 내주시오! 아니, 두 척만 주시오.”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민호를 대하는 말투가 어느새 달라졌다. 이민호가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설 수도 있음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러나 전공에 대한 욕심은 여전히 버리지 않았다.
“주장이신 좌수백께서 오시면 그분께 부탁해 보시오.”
“으음. 여긴 경상도 해역이거늘, 내가 경상우수사이니 경상도 바다에서 잡은 왜선과 수급은 다 내꺼요!”
이게 무슨 유료 낚시터 같은 논리냐고 이민호는 되묻지 않았다. 실제로 원균은 경상도 남해안을 관할하는 경상우수사라는 직함과, 전라좌수영에 원군을 청했다는 것을 전공의 이유로 내세웠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원균의 주장에 조정이나 선조 임금이 동조했다는 것이 사실 더 문제였다.
“구원해달라고 사정사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딴소리요? 그런 소리 조정에 대놓고 해보시오. 참 좋아하겠소.”
옥포에서 조총 몇 개를 구해놓았다. 이민호는 적당히 상황을 봐가면서 원균에게 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노획한 조총으로 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건방진 녀석! 품계만 높은 애송이 녀석이 감히 곤수를 몰라보고 조롱하느냐?”
원균 수하로 있는 군관이 벌컥 화를 내더니 갑자기 이민호를 노리고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이민호에게 날아오자 민영이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
- 타앙!
“컥!”
민영이 화살을 맞은 것과 민희가 권총을 쏜 것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사실은 민희가 경상우수영 군관의 움직임을 읽고 먼저 권총을 쏘려 했던 것인데 약간 늦고 말았다.
두정갑을 입고 갑판에 쓰러진 우수영 군관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펑펑 솟아났다. 배 두 척의 사이는 활 사거리로는 아주 가깝고 권총 사거리로는 조금 멀었다.
“민영아! 안 돼!”
“주인님......”
이민호가 갑판에 쓰러진 민영을 안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민영은 축 늘어졌고, 기다란 화살이 민영의 가슴에 꽂혀 있었다. 민영을 품에 안은 이민호가 눈물을 펑펑 흘렸다.
- 철컥! 철컥!
외륜선에 탄 간수군 125명이 경상우수영 좌선을 향해 일제히 소총을 겨눴다. 그리고 다른 외륜선들도 경상우수영 판옥선 세 척을 포위하며 총과 대포를 겨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