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8 17. 옥포해전 =========================================================================
이민호는 걱정 말라고 했으나, 앞으로도 계속 원균에게 시달릴 것 같아 걱정이었다. 부친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귓속말을 했다.
“아무래도 이번에 꼭 잡아야겠다. 저런 사람이 수사를 하니 다 말아먹지.”
“예. 제가 직접 쏘겠습니다.”
이민호가 이를 갈았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시커먼 것이 치솟아 올라왔다. 이민호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보니 그것은 원균이었다.
“아, 참! 이 목사!”
“예! 예! 우수백 영감!”
“우리 비슷한 사람들끼리 앞으로도 잘 지내보세. 난 이 목사 자네가 마음에 들어. 전선에 여자를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 웬만한 정신력 갖고는 실행에 옮기기 힘들거든. 능력 없는 인간들이 지독히 비난한단 말일세. 자넨 여자를 배에 둘이나 태우고 있으니 아주 훌륭해. 나도 용기를 내서 한 명 더 데리고 다니겠네.”
원균은 그 말을 마치고 돌아갔고, 이민호는 무릎을 꿇고 좌절했다. 민희와 민영이 호위병이라 우길 수 있었으나 둘을 안은 것이 사실이었으니 변명하기도 어려웠다. 부친 이응화가 이민호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이제 보니 우리 아들은 원균 같은 인간이었구나. 원균에게 같은 부류로 인정받으니 좋냐? 응? 좋아?”
“으악! 제발 그만하세요!”
원균이 돌아가고 나서 소비포권관 이영남과 영등포만호 우치적이 인사하러 외륜선에 찾아왔다. 시무룩한 이민호의 표정을 살피며 이영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사드리게. 이 분이 그 유명한 이 첨지 영감이시네.”
“영등포 만호직을 임시로 맡고 있는 우치적입니다. 이 첨지 영감의 공덕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일하시는 이 첨지 영감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소이다. 우 만호는 무관이신데도 차분한 인상이 마치 관제께서 현현하신 것 같소이다.”
“관운장과 비교해주시다니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만호직을 임시로 맡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민호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우치적이 만호치고는 너무 젊은 것을 보고 권관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당시 만호나 첨사가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무과 급제 후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승진해서 종4품 만호가 되려면 손자 볼 나이가 지나니, 조정에서도 다른 방법으로 젊은 장수를 임관시켜야 했다.
“조금 전에 원 수사께서 방문하신 것 같은데, 혹시 화가 나시더라도 참으시지요. 원 수사와 그를 따르는 몇몇 장수나 군관들을 빼곤 다들 원 수사의 행적에 분개하고 있습니다.”
“험! 그게 말이오. 아니, 글쎄 내가 원 수사를 닮았대요.”
“예? 누가 그런 심한 욕을! 아! 흥분해서 죄송합니다.”
이민호는 젊은 무관 두 사람과 식사를 같이 하며 원균과 부친 이응화를 신나게 씹어댔다. 월급쟁이가 뒤에서 상사를 씹는 것이 직장생활의 활력소이듯이 셋은 입에 거품을 물며 나이 든 장수들을 욕했다. 이민호는 오랜만에 밥맛이 꿀맛이었다.
5월 7일 새벽에 거제도 남쪽 송미포를 돌아 적이 주둔하고 있다는 가덕도로 향했다. 산척들에게 들은 것이 있는 이민호가 낙동강에 대해 이순신에게 보고하니 가능하다면 강을 오르내리는 왜선을 잡아 낙동강을 차단하기로 했다. 판옥선 27척과 외륜선 8척, 그리고 협선들이 거제도 동쪽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순항했다.
그런데 거제도 중간쯤인 지세포 앞을 지날 때 저 멀리 앞서 가던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의 배에서 신기전을 높이 쏘아 올렸다. 옥포에 적이 있다는 신호였다. 조금 더 접근하니 옥포만 안쪽에서 시커먼 연기 여러 줄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전라좌수영 좌선에서 어지러울 정도로 깃발 신호를 연속 보냈다. 신호에 맞춰 함대가 진영을 새로 짜는 사이 좌선에 딸린 협선을 타고 온 군관 송희립이 좌수사의 명령을 전했다. 유군은 옥포만 입구를 차단하는 임무를 맡아 가장 뒤에 서라는 명령이었다.
간수군들은 수군이 아닌 민간 의용군 신분이니 정규 수군의 뒤에 서는 게 맞기는 했다. 원래 역사에서 전라좌수영 함대를 따라온 포작선을 대신한 것이 외륜선이었다. 그러나 간수군의 화력을 모를 리 없는 이순신이 외륜선에 민간인 어선 역할을 맡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준비가 끝나자 연합함대의 판옥선들이 한 줄로 서서 옥포만 안쪽으로 줄줄이 들어갔다. 그리고 처음 보는 적 함대에 놀라 조선 수군과 왜 수군 모두 멍하니 서로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유군에 속한 이민호는 가장 마지막으로 옥포만에 진입했다. 옥포에 내린 왜군들은 마을에서 노략질을 하다가 동작을 멈추고 조선 수군 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 배에 꽂힌 깃발로 보아 도도 다카토라 휘하에 있는 군선들이긴 한데 전투선은 몇 척 없고 대부분 배들은 병력 수송선에 가까웠다. 전력의 핵심은 수군이 아닌 지상군이었으며 배마다 여러 소규모 다이묘들의 군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포구에 정박한 왜선 50여 척 중에서 가장 큰 배에는 사방으로 커다란 비단 휘장이 둘러쳐져 있었고 색색의 깃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러나 다른 세키부네들은 본갑판에 판자벽은 물론 대나무 방패도 없이 휑하니 바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노를 젓는 수부들이 밖에서도 다 보였다.
“으아아아아~”
왜군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마치 야만인들이 전투 직전에 내지르는 워 크라이 같아 깜짝 놀란 이민호가 이응화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건 뭡니까? 돌격 직전에 지르는 함성인가요?”
“비명이야.”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갑자기 나타나자 옥포에서 노략질을 하던 왜군들, 배에 남은 왜인들이 아우성을 치며 일제히 움직였다. 왜군들이 등짐을 지고 옮기던 물건을 버리고 뛰어와 배에 올랐다. 수부들은 왜군이 배에 타든 말든 서둘러 돛과 닻을 올리고 노를 저으며 급히 포구를 떠났다.
비단 휘장을 두른 왜군 대장선이 선두에 서자 세키부네 다섯 척이 더 따랐다. 그러나 나머지 배들은 소속이 다른지 제각각 따로 움직였다. 협선을 빼면 왜선들이 훨씬 숫자가 많은데도 왜군들은 싸울 생각을 못하고 처음부터 도망가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육지 쪽으로 깊이 들어간 옥포만 중간을 조선 함대가 빙 둘러서 포위하고 있어서 선봉에 선 왜선 여섯 척은 포위망을 돌파할 시도도 못했다. 그저 바닷가에 찰싹 달라붙어 좌우로 허둥지둥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나 왜군들이 아무리 살펴봐도 빠져 나갈 구멍은 없었다.
결국 왜군 장수는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배를 판옥선들 사이로 몰아 들어가게 했다. 누가 봐도 전투가 아닌 도주 의도가 역력했다.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첫 해전 상대로 아주 이상한 적을 만났다. 치열한 격전을 예상하고 바짝 긴장했던 조선 수군은 지리멸렬한 적을 맞이해 오히려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포를 놓아라!”
- 퍼버벙!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명령은 좌선 기패관에 의해 깃발 신호가 되어 중위장에게 전해지고,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다시 전후중좌우의 5부에 명령을 전달했다. 그리고 각 부장이 소속 함선들에게 역시 깃발로 방포 신호를 보냈다. 이 과정이 하도 빨리 진행돼서 마치 이순신이 구두 명령을 내리자마자 판옥선 27척에 탄 포수들이 일제히 포를 쏘는 것처럼 보였다.
전투보다는 빠져 나갈 궁리만 하던 왜선 여섯 척이 가장 먼저 포격을 받아 박살났다. 차대전이나 동그란 석환에 맞아 방패판이 깨져 나간 다음 화살이 우수수 쏟아지고 기다란 수군총이 불을 뿜었다.
왜선에서 조총이나 활을 쏘아 반격을 하는 왜군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머리를 숙이고 그저 쏘면 쏘는 대로 맞았다. 왜군들은 저항할 꿈도 못 꾸고 무서워서 비명을 내질렀다. 마치 왜군이 아니라 산적들에게 약탈당하는 선량한 농민들 같았다.
이때 반대 방향에서 다른 왜선들이 포위망 탈출을 시도했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함선들 사이에 약간 간격이 있었는데 이 틈으로 왜선 20여 척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두 수영 소속의 판옥선들이 왜선들을 향해 화포를 쏘고 화살을 날렸다.
상갑판의 왜군들은 양쪽에서 쏟아지는 포탄과 총탄, 화살을 감당하지 못하고 줄줄이 쓰러지기 바빴다. 본갑판에서 노를 젓는 왜인들은 화살에 맞아 숱하게 쓰러지면서도 살길을 찾아 악착같이 노를 저었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판옥선들이 왜선 한 척씩 맡아 일방적으로 두들기는 사이 나머지 왜선에 탄 왜인들이 죽어라 노를 저어 배를 계속 움직였다. 마치 아프리카 평원에서 사자에게 물어뜯기고 있는 동료를 내버려두고 한꺼번에 도망가는 초식 동물들 같았다.
죽기를 각오한 노질 덕택에 절반 이상의 왜선이 지옥의 틈새를 빠져 나왔다. 1차 포위망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 앞에는 외륜선 여덟 척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옳거니! 조금 더 끌어들여라. 2선과 4선은 앞으로 스무 장 나아가고 1선과 5선은 뒤로 스무 장 정도만 물러서라.”
유군장 이응화는 왜선들이 눈앞에 다가오는데도 아직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배 두 척을 뒤로, 다른 두 척을 앞으로 움직였다. 10여 척의 왜선들이 외륜선 갑판에 오른 간수군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슬금슬금 외륜선 옆으로 지나갔다.
외륜선이 판옥선과 다르게 생겨서 군선이 아닌 줄로 오해한 왜인들도 있었다. 얼굴 가득 비굴한 미소를 짓거나 외륜선에 탄 간수군들에게 굽실굽실 절을 하면서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바랐다. 그러나 왜선들이 외륜선 8척의 포위망 안에 들어오는 순간 이응화가 군령을 내렸다.
“쏴!”
- 퍼버벙!
- 타다다다다당! 타탕! 탕!
왜선을 향해 포탄과 총탄이 마구 날아갔다. 이민호는 해전에서 차대전이나 커다랗고 둥근 돌인 석환을 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자총통에서는 석환만 날아간 게 아니라 그 뒤를 이어 작은 자갈이나 쇠구슬이 한꺼번에 구름처럼 날아갔다.
가까운 거리에서 수십 발의 조란환이 덮치자 정면으로 얻어맞은 왜선에서 진한 피보라가 일어났다. 죽어라 노를 젓던 왜인 수부들 스무 명 남짓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뒤이어 외륜선마다 갑판을 가득 메운 간수군들이 소총을 쏴댔다.
외륜선이 빙 둘러서 만든 포위망에 도달한 것은 왜 중선, 즉 작은 세키부네 네 척에 나머지 아홉 척은 왜 소선, 즉 고바야였다. 방패판도 없는 배의 상갑판에 서서 저항할 엄두도 못 내고 있던 왜군들이 총탄에 맞아 죽어나갔다. 배를 모는 사공이나 노를 젓는 수부들도 그냥 왜군으로 취급당해 총탄에 맞아 픽픽 쓰러졌다.
왜군 병사 일부가 반격에 나섰으나 조총이나 기다란 일본식 활을 쏘기도 전에 간수군들이 발사한 소총에 맞아 연달아 쓰러졌다. 왜선에 탑재한 대포가 하나도 없었기에 간수군들은 안심하고 몸을 드러낸 채 총격을 가했다. 물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도망가려는 왜인들도 남김없이 사살했다. 주변 바다가 온통 시뻘겋게 피로 물들었다.
“일본 수군은 굉장히 약하군요.”
“으음. 응.”
고민희의 말에 한참 동안 끙끙 앓던 이민호가 결국 수긍했다. 조선 수군과 비교하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임진왜란 내내 칠천량 해전을 제외하면 일본 수군 전선은 조선 수군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못하고 그저 전공을 세워주는 수급 셔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민호는 수군에서 벗어나 지상에서 싸울 생각을 했다.
판옥선 상대로 만만한 세키부네라 해도 조총병과 노꾼을 잔뜩 태우면 그만큼 강해진다. 임진왜란 후기에는 세키부네에 포를 싣고 배를 크게 만들었다. 왜군 지휘부가 멍청이라서 그렇게 당하면서도 왜선의 강화를 시도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세키부네의 구조와 왜군의 무기체계가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배 한 척의 전투력을 강화한다 해도 해전에서 그 한계가 명확히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육전에서는 상황에 따라 조총이 대포보다 나을 수도 있겠지만, 해전에서는 대포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러나 왜군이 보유한 화포도 적고, 화약도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해전에서 도저히 상대가 안 되니 일본 수군은 나중에는 명량해전이나 절이도해전, 노량해전처럼 한꺼번에 몇 백 척 단위로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군은 끝내 판옥선으로 이뤄진 조선 함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칠천량해전처럼 특이한 조건에서는 왜군 함대가 이기는 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필 상대 지휘관이 그 유명한 이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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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