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7 17. 옥포해전 =========================================================================
이민호는 산척들과 함께 모닥불 주변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있었다. 피곤했는지, 아니면 한밤중에 교대하기 위해서인지 민희는 벌써 자고 이민호 옆에 누운 민영이 물었다.
“주인님. 아쉬우세요?”
“뭐가? 아! 저 소리? 큭큭!”
멀리 숲에서 신음소리가 나고 있었지만 산척들은 모른 척하고 누워서 잤다. 처녀 사냥꾼은 착호갑사의 조카라던데 그는 조카의 연애사에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소비포권관 이영남과 처녀 사냥꾼이 어둠 속에서 배꼽을 맞추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둘 다 서로에게 첫눈에 반했는지 만난 지 겨우 몇 시간 만에 만리장성을 쌓고 있었다.
무관들은 문관이나 선비들과 달리 성적인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알고 있었지만 이민호가 이런 일을 옆에서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동안 조선의 유교적 압박에 심리적으로 많이 짓눌려 있던 이민호는 젊은 무관과 처녀 사냥꾼의 자유분방한 연애를 지켜보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저녁 내내 서로 바라보는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던데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네.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런데 이 권관은 유부남 아니었나? 좀 걱정된다.”
아직 법적으로 총각인 주제에 여러 명의 여자들을 거느린 이민호가 할 말은 아니었다.
“주인님은 강한 여자에게 집착해서 여자 사냥꾼에게 욕심을 내실 줄 알았어요. 미카 귀인님과 네이한테도 그랬잖아요.”
“응? 아니야. 상관 안 해. 그리고 우리 민영이만큼 강하고 귀여운 여자가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어머나! 정말이죠?”
미카가 침실에서 적극적이고 네이가 육감적인 면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 둘보다 민영을 나중에 안은 것은 덜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성장하길 기다린 것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네이는 아직 제대로 안은 적이 없었다. 이민호는 전복과 해삼 양식을 하느라 살이 갈색으로 그을린 네이가 보고 싶어졌다.
안 믿는 것 같아 이민호가 민영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두 손으로 가슴을 주무르며 바지를 입은 민영의 엉덩이를 뒤에서 쿡쿡 찌르자 그제야 귀엽다는 말을 믿는 것 같았다.
“저는 키도 크고 못 생겼는데 예뻐해 주셔서 고마워요.”
“으응? 정말 어이가 없네. 민영은 충분히 예쁘니까 앞으로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 이리 와. 뽀뽀!”
이민호는 민영을 볼 때마다 웃으면 앞니 두 개가 도드라지는 모 걸 그룹 멤버를 떠올렸다. 키도 크고 얼굴도 민영과 비슷했으니 이민호가 민영을 못 생겼다고 생각할 리가 없었다. 다만 주변에 의용공주 주상아를 비롯해 미인이 너무 많았을 뿐이었다.
한밤중에 추워서 잠깐 깼는데 그 사이 민희와 민영이 불침번을 교대한 모양이었다. 민영은 이민호의 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고 민희가 등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민희의 시선을 느낀 이민호는 손을 뒤로 돌려 민희의 손을 꼭 잡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에 아침을 지어 먹은 다음 산척들과 헤어졌다. 이민호는 착호갑사를 비롯한 산척들을 영입하고 싶었다. 고산국이든 간수군이든 상관없이 어떻게든 이들을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산척들은 거창에서 고향을 지키는 의병활동을 해야 한다기에 더 이상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의병활동을 하면서 군자금으로 쓰라고 은과 비단을 잔뜩 건네주었다. 착호갑사가 미안해하면서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라는 이민호의 설득에 결국은 받아들였다. 착호갑사도 이민호에게 잘 무두질 된 호랑이 가죽 한 장을 선물로 주었다.
이민호와 착호갑사가 서로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사이 소비포권관 이영남은 처녀 사냥꾼을 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이미 결혼해서 미안하다며 첩으로라도 삼겠다고 했지만 처녀 사냥꾼은 산척들을 따라 떠나기로 했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며 헤어지는 모습은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장면이었다.
“이 권관! 경상우수영 전선들과 오늘 당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미리 우리 배에 타지 그러오?”
“아닙니다. 제가 미관말직이나마 수군 장수의 소임을 맡았으니 군사들을 하나라도 더 찾아서 데려와야지요.”
심통이 난 이민호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여자 사냥꾼의 눈빛에 찔려 죽을 뻔했다. 민희가 이민호의 앞에 서서 여자 둘이 치열한 눈싸움을 벌였다.
5일 동이 틀 때 전라좌수영 함대가 다시 출항해 경상우수영 함대와 합류하기로 약속한 당포에 도착했다. 당포는 현대 통영시 남쪽, 한산도 서쪽에 위치한 수군진포였다.
그러나 당포도 이미 무인지경이었고, 모이기로 한 경상우수영 소속 전선은 단 한 척도 없었다. 그래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사후선들을 풀어 경상우수사를 찾게 했다.
그날 저녁 영등포만호 우치적이 판옥선 한 척을 몰고 가장 먼저 왔다. 그리고 지세포만호 한백록과 옥포만호 이운룡이 같은 판옥선을 타고 합류지인 당포에 도착했다.
6일 오전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판옥선 달랑 한 척을 몰고 와서 이순신이 뒷골을 잡게 만들었다. 이순신이 원균을 불러 경상도의 적세를 묻는 도중에 남해현령 기효근, 미조항첨사 김승룡, 평산포권관 김축이 판옥선 한 척에 같이 타고 도착했다. 남해현령 기효근이 외륜선에 찾아와 이민호의 부친 이응화와 한바탕 멱살잡이를 하고 돌아갔다. 기효근은 관아를 버리고 도망간 적이 없다고 끝까지 우겼다.
사량만호 이여념과 소비포권관 이영남은 각각 협선을 타고 왔다. 이영남의 볼이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다. 이영남이 흩어진 군사들을 찾아 모으기 위해 이틀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기는 개뿔, 처녀 사냥꾼과 하룻밤을 더 보낸 모양이었다. 이민호가 속으로 많이 웃었다.
“판옥선 네 척이면 무시할 전력은 절대 아닌데, 배가 무거워 보입니다. 수졸들은 물론 격군 숫자도 너무 적습니다.”
“배 밑창을 뚫어 침몰시켰다가 때웠으니 지금도 물이 줄줄 새고 있을 거야. 지금은 네 척이지만 내일부터는 세 척밖에 못 움직일 거다. 격군 숫자를 제대로 못 갖춘 탓에 속도가 느려 전체 함대의 발목을 잡기도 할 거야. 그냥 길잡이 일이나 시키면 그거나 잘할 것이지 꼴에 전공 욕심은 얼마나 많은지. 쯧쯧.”
부친의 말에 따르면 옥포해전에서 전라좌수군이 잡은 왜선을 경상우수군이 빼앗는 과정에서 화살을 날려 부상자가 두 명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옥포해전에서 전투 중에 발생한 조선 수군 부상자는 팔에 화살을 맞은 순천대장선의 사부(射夫) 딱 한 명뿐이었는데 전공 다툼 때문에 아군에 의해 발생한 부상자가 그 두 배라고 부친이 한탄했다. 물론 아직 옥포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쳇! 적이 무서워 도망친 주제에! 아군에게만 용감한 인간들이 어딜 가나 있습니다. 쏴버릴 수도 없고, 골치 아프겠군요.”
“처음에 불쌍하다고 내버려뒀더니 임진, 계사년 내내 지랄하더라. 민호 너 저번에 말하길 정유년에 저 인간이 통제사가 돼서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다 말아먹는다고 했지? 차라리 지금 쏴버리자.”
“그럴까요? 그런데 소총을 쏘면 우리가 쏜 줄 알지 않습니까?”
신체발부는 수지부모 어쩌고 하는 조선에서도 살인사건에 한해서는 피살자의 몸을 해부해서 범인을 밝힌다. 그래서 함부로 소총을 쏴서 원균을 죽일 수 없었다. 두리안을 이용한 암살에 실패했던 이민호는 그래서 추가로 암살 시도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응화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럴 때는 왜군 조총을 써야지. 전투 중에 쏘면 누가 알까?”
“조총이 있어요?”
“조총이야 왜군한테 있겠지. 빼앗아서 쓰자. 남의 물건을 빼앗으면 강도지만 적의 물건을 빼앗아 쓰면 유능한 장수라고 하잖느냐?”
“네. 그러시겠지요.”
부친 이응화나 계복이나 다들 간덩이가 부었는지 왜군의 것을 마치 자기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쉽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왜군과 싸워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서 이민호도 수긍했다.
“원균 이 인간을 이번에야말로......”
“이보게, 이 목사!”
“어이쿠! 우수백 영감 아니십니까? 어인 일로 예까지 오셨는지요?”
한참 원균을 욕하던 이민호와 이응화가 깜짝 놀라 배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작은 협선을 타고 유군장의 배인 중형 외륜선으로 찾아왔다. 원균이 워낙 뚱뚱해서 사다리를 타고 오르지 못해 밑에서 격군들이 받쳐주고 위에서 사공들이 잡아당겨서 간신히 외륜선 갑판에 오를 수 있었다.
“자넨 보고를 못 받았는지 모르겠는데 이번 달 인정(人情)이 밀렸네. 아무리 전쟁이 났다지만 사람이 무정하게 인정을 거르면 쓰나?”
“전쟁터에 나와서까지 그런 말씀을...... 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단은 이미 경상우수영에서 철수했습니다. 장사도 안 하는데 인정을 드리기는 조금 무리지 않습니까?”
올해 2월에 경상우수사에 부임한 원균은 전임 수사들이 월말에 받던 뇌물을 월초로 당기고 금액도 열 배로 올렸다. 그 외에도 갖가지 이유를 대며 상단 분점에서 재물을 뜯어갔다. 경상우수영 분점주가 원균에 대해 아주 치를 떨던 기억이 났다.
“어허! 사람이 하루아침에 안면을 바꾸면 안 돼!”
“알겠습니다. 아랫사람 시켜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민호가 기억하기에 작년까지는 뇌물 액수가 크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경상우수영의 전임 수사들도 뇌물이라기보다는 인사나 기름칠 정도로 이해하고 받는 즉시 휘하 군관들에게 나눠줬다고 들었다.
경상우수영에서도 사창 사업을 하고 염전도 경영하기에 수사 개인이나 수영이나 돈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원균이 부임하고 나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원균은 의외로 안 좋은 쪽에서 부지런한 면이 있었다. 원균이 뇌물을 받고 수군들을 집에 보내줬다는 이야기를 부친에게 익히 들은 이민호는 더 귀찮게 되기 전에 뇌물을 주고 보내기로 했다.
“전쟁 중이라 쓸 곳이 많으니 좀 더 준비해 주게.”
“네, 네. 그렇게 하지요.”
이민호가 속으로 이를 가는 사이 원균이 간수군들을 쓱 훑어봤다. 경상우수영에서 대립군을 하다가 입대했던 간수군들이 원균의 시선을 받자마자 움츠러들었다. 간수군들의 반응을 보면서 이민호는 커다란 불안감을 느꼈다.
“자네 간수군 전체를 전라좌수영에 소속시켰더군. 이게 말이 되나? 간수군들 중에는 경상우수영 출신도 많네!”
“조정에서 허락한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저들은 경상우수영의 수군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들이 수군 정병이 아니더라도 곧 수군 정병으로 지정될 자들이었네. 정병이 아니면 최소한 보인이나 하다못해 분부군이라도 될 자들이야. 그런 장정들을 전라좌수영에서 다 데려가 버리면 경상우수영은 어떻게 하나? 이래서 우리나라가 왜군에게 침략을 당하는 거야.”
이민호는 조선족 보이스 피싱 사기꾼이 실컷 농락당한 후에 발끈해서 ‘이래서 한국이 통일이 안 되는 거야!’라고 했다는 유머가 기억났다. 어쨌든 기껏 훈련시킨 간수군들을 원균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대립군들은 가난한 집 사람들이라 정병 순위에서 밀립니다. 만에 하나 정병으로 지정되더라도 바닷가 출신이라서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뽑힐 겁니다.”
“어허! 바닷가에 사는 가난뱅이 장정이 수군으로 뽑히는 경우도 아주 가끔이지만 있긴 있어!”
이민호가 원균이 하는 소리를 들어 보니 지금 당장 경상도 출신 간수군들을 데려가겠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닌 것 같았다. 모든 것은 뇌물로 통했다.
“좋습니다! 일인당 은 한 냥. 합해서 4백 냥. 이것으로 끝내고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만약 앞으로 한 번만 더 언급하면 간수군에서 다 해고해버리고 말겠습니다. 간수군이 모자라면 전라우수영이나 충청도에서 뽑겠습니다.”
“어허! 겨우 4백 냥이라니, 이 사람 이거 안 되겠구먼! 그래도 일단 주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세. 이만 가보겠네.”
원균이 돌아가고 나서 경상도 출신 간수군들이 제발 살려달라고 이민호에게 매달렸다. 진작 고산국으로 이민을 갈 것을 괜히 조선에 남았다고 후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