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06화 (5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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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옥포해전

전라우수영 함대가 합류하지 못한다는 연락이 오자 5월 4일 새벽 축시에 전라좌수영 함대 단독으로 여수를 떠났다. 함대는 동틀 때 쯤 남해현 남쪽 평산포, 곡포, 상주포, 미조항 앞을 차례로 지났다.

상주포와 미조항 중간에 나중에 설리 해수욕장이 되는 백사장도 지났다. 이민호가 대학 때 친구들하고 바로 옆 상주포 해수욕장에 놀러가면서 지나가다가 이름 때문에 웃은 적이 있었다. 이민호는 옛 생각에 씁쓸하면서도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자부했다. 그 동안 전쟁에 대비해 많은 준비를 해왔고, 이제부터는 준비한 것을 풀어야 할 때였다.

전라좌수영 함대는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중형 외륜선 8척으로 이루어졌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협선이 격군 3인, 사후선이 격군 4인과 타공 1인이 탑승하며 둘 다 판옥선의 부속선이라고 규정했다.

함대는 주변 섬들을 샅샅이 수색하면서 그날 저녁 소비포 앞바다에 정박했다. 소비포는 조선 전기 내내 여러 곳으로 이동한 끝에 지금은 사량도 북쪽, 고성 하일면 춘암리에 있었다. 소비포도 경상우수영 소속의 수군 진포인데 지금은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민호는 외륜선에서 내린 말을 타고 주변 정찰에 나섰다. 소비포는 육지에 붙어 있어서 섬에 정박할 때와 달리 밤에 육지 쪽에서 야습을 당할까봐 이민호가 자원한 정찰이었다.

“통지! 조심하게!”

“예! 밥이 익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같이 가는 이들이 여자라고 이순신 수사가 걱정했다. 그러나 여진족 출신인 민희, 민영보다 승마술이 좋은 무장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끼랴!"

이민호와 민희, 민영은 산 옆길을 타고 달렸다. 저기 멀리 작은 마을이 시야에 들어왔으나 밥 짓는 연기 하나 피어오르지 않았다.

이민호는 권총, 민희와 민영은 활을 앞세우고 마을에 천천히 접근했다. 초가집 마당에 부부인 듯한 중년 남녀 두 명이 죽어 넘어져 있고 온갖 세간이 밖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그러나 솜이불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왜군이 아닌 화적이 마을을 한바탕 쓸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당시 일본은 아직 면직 수공업이 발달하지 않아 농민이 겨울에 솜바지를 입는 것을 대단한 사치로 생각했다. 조선에서 면포 수출을 중지해 일본 내 면포 가격이 폭등하는 바람에 일본이 조선을 침공했다는 설도 있었다. 만약 왜군이 이 집을 약탈했다면 솜이불과 옷가지를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말발굽이 많아요, 주인님.”

“응. 역시 왜군은 아닌 것 같다. 동쪽 길로 가자.”

말을 타기에 왜군이 아니라고 이민호가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민호는 솜이불이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범인을 왜군이 아닌 화적으로 단정했다. 아직 왜군이 조선에서 기마대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전이었다.

땅에 새겨진 말발굽을 따라 이민호가 말을 몰았다. 산을 돌아 다시 바닷가 길로 접어들었다. 세 방향에 산이 있고 남동쪽에 바다가 있는 가운데 꽤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곳은 하일면의 면소재지였다. 이곳은 이민호의 기억에 있는 지역이었고, 역시나 마을은 산기슭에 있었다.

“왜군이 노략질 중인가 봐요.”

“옷차림이 왜군 같지 않아. 바닷가에 왜선도 없잖아.”

세 사람이 마을로 조심스레 접근했다. 아직 해질녘인데 벌써부터 횃불을 들고 돌아다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들 중심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정갑을 입은 조선 무관 한 명이 월도를 들고 30여 명이나 되는 무장한 괴한들과 싸우고 있었다. 주변에는 어린이를 포함해 일반 백성들이 분명한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마을을 노략질하던 화적들을 무관이 단신으로 공격한 것 같았다.

“역시 화적이다. 어서 무관을 구하자.”

- 두두두두두~

세 명이 말을 타고 달리자 화적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그 사이 무관이 화적 한 명을 베고, 두 명이 화살에 맞아 픽픽 쓰러졌다.

“활솜씨가 많이 늘었는데?”

거리가 멀어 이민호는 아직 권총을 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가죽으로 만든 소총집이 안장에 걸려 있었으나 진동이 심해 소총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민희와 민영이 활을 쏘려는 자세 그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가 아닙니다. 다른 무장한 자들이 또 있어요.”

- 피릿! 핑!

어쨌든 민희와 민영도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았다. 한 발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고 한 발은 하필 무관을 맞출 뻔했다. 거리가 50보 정도로 가까웠는데도 이 정도면 차라리 활을 안 쏘느니 못했다.

“음.”

이민호는 할 말이 없어 묵묵히 권총을 화적들에게 겨눴다. 민희와 민영이 말은 기가 막히게 잘 타는데 말 타고 활 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조선 무관들이 승마 실력은 떨어져도 확실히 기사 실력은 아주 뛰어났다. 조정 대신들이 조선의 기사(騎射)는 천하제일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만했다.

- 탕! 탕! 탕!

이민호를 필두로 세 명이 권총을 연사하며 화적들에게 돌입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장거리에서 하나씩 해치웠겠지만 위험에 처한 무관을 구해내기 위해 약간 무리수를 두었다.

“으악! 저 짧은 조총은 뭐야?”

창칼을 겨누고 셋과 싸우려던 화적들이 계속해서 픽픽 쓰러졌다. 화적들은 총탄 한 발이 발사된 직후 공격하려고 했는데 이민호가 계속 연사하자 당황해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가진 권총에서 총알이 모두 떨어졌다.

그 사이 민희와 민영이 모는 말이 화적들의 대열 중간으로 뛰어들었다. 두 여진족 여자 전사를 태운 말이 발굽을 들어 화적들을 짓밟았다. 민희가 제 자리에서 말을 회전시키자 무기를 들고 공격하려던 화적들이 말 몸체에 치여 나가 떨어졌다. 민영의 말은 화적의 머리에 박치기를 한 다음 옆에 서 있던 화적의 어깨를 물었다.

그 사이에 무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넓은 날과 긴 자루를 가진 월도가 석양을 배경으로 화적의 피를 물감으로 사용해 붉은 원을 그렸다. 앞뒤에서 적을 맞아 당황한 화적들이 연달아 월도에 베여 쓰러졌다.

그 사이에도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화적들 숫자를 꾸준히 하나씩 줄여나갔다. 같은 편인 것 같기는 한데 정체를 모르니 이민호가 불안감을 느꼈다.

“쳇! 신경 쓰이네.”

그 사이 장전을 마친 이민호가 다시 권총을 발사했다. 이민호가 계속 연사하자 화적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을 바깥 말 수십 마리를 세워놓은 곳으로 도망갔다. 말을 보살피고 있던 화적이 말고삐를 풀어 도망치는 화적들 방향으로 달리게 했다.

민희와 민영이 화적들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는 사이 이민호가 소총을 꺼내 화적들의 등에 대고 총을 쏘았다. 한 방에 한 명씩 확실히 맞아 고꾸라졌다.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산에 들어가 도적 떼가 되는 경우도 있고, 명화적 같은 경우는 부잣집만 공격해서 백성들에게 은근히 인기도 좋았다. 그러나 이 화적들은 떼를 지어 민간인과 무관을 공격한 자들이므로 자비를 베풀어줄 이유가 없었다.

이민호는 화적들을 모두 죽이려 했다. 그러나 말 수십 마리가 달려와 화적들의 몸을 가린 다음부터는 더 이상 쏠 수가 없었다. 화적들은 말에 올라타면서도 말 몸체 뒤에 몸을 숨겨 총격을 피했다.

“네 이놈 두고 보자!”

악당의 명대사를 남기고 화적들이 마을 뒤 산길로 달려갔다. 그러나 화적들은 제 발로 사지로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산길 옆 숲에서 화살이 한꺼번에 비 오듯이 쏟아져 날아왔다. 화적들이 말을 멈춰 세웠으나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잠시 후 숲에서 몸집이 큰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으악! 살려주시오!”

“안 돼.”

- 퍽!

다리에 화살을 맞은 화적이 기어서 도망가다가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호랑이 가죽 옷을 입은 사람이 주저 없이 곤봉을 휘둘러 화적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다른 화적들도 화살 일제 공격에 죽거나, 낙마한 다음 뒤이은 무기 공격에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숲에서 나타난 사람들은 화적들과 별다르지 않은 복장이었다. 다만 호랑이나 표범 가죽을 겉옷으로 입은 사람들이 더 많았을 뿐이었다. 어쨌든 화적을 공격했으니 지금은 같은 편이라고 볼 수 있었다.

“혹시 이 첨지이십니까?”

“그렇소. 처음 보는데 귀하는 누구시오?”

온몸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무관이 이민호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젊은 무관 주변에 꽤 많은 화적들이 쓰러져 있어 무예가 뛰어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비포만호 이영남입니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기 오는 자들은 누구요?”

“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산자이(山尺) 같습니다.”

산척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이 마을로 몰려왔다. 산척은 사냥꾼이라 생각했는데 말고삐를 잡고 와서 조금 놀랐다. 이민호는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 마을에 온 이후 내내 신경 쓰였던 사람을 큰소리로 불러냈다.

“수고하셨소. 그만 나오시오!”

“호호! 오늘 대단한 분들을 보게 됐네요.”

옆집 사립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각궁을 든 젊은 여자 사냥꾼이었다. 이영남은 이 여자 궁수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정중히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여자 사냥꾼이 당황하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머나! 저는 천한 신분이라 그렇게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된답니다, 권관 나리.”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어찌 은인의 신분을 따진단 말이오?”

“어머! 어머! 정말 훌륭한 인품이세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사이 산척들이 말을 타고 마을에 도착했다. 민희와 민영이 만약을 대비해 이민호에게 와서 둘러쌌다.

산척은 산에서 사는 사람이 아닌, 산에서 일을 해서 수입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심마니와 사냥꾼이 대표적인 산척이었다. 실록에서 검색해 보면 조정 대신들이 산척들은 말 타고 활을 쏘면서 사냥을 하므로 이들을 잘만 구슬리면 쉽게 정예병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인식했다. 호렵도에 등장한 착호갑사들은 전원 말에 타고 창이나 활로 무장했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사냥꾼과 달랐다.

“소인은 거창의 착호갑사 김 모라고 합니다. 화전민 마을 여러 곳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죽인 화적 떼를 사흘 동안 추적하다가 이곳까지 왔습니다. 원수를 처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호랑이 가죽 옷을 입은 거한의 목소리가 그렁그렁 울렸다. 착호갑사는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잡는 사냥꾼인 동시에 나라에서 녹봉과 품계를 받는 직업군인이었다. 16세기 이후 호랑이 숫자가 크게 줄어 착호갑사도 많이 줄어들었다.

“오! 그렇다면 정말 수고하셨소. 나는 전라좌수영을 돕고 있는 이 첨지라고 하오.”

“전라좌수군이 왔습니까? 우와! 이제 살았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거창과 수군이 관계가 있겠소?”

“왜군이 경상도 땅 깊숙이 침범하려면 낙동강을 통해 보급을 해야 하는데 경상우수군이 잔폐했다기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전라좌수군이 낙동강을 막아주시겠지요?”

“낙동강에 왜군이 있다면 일단 잡겠지만, 본영에서 너무 멀어서 문제요. 아마 계속 낙동강을 막기는 힘들 거요.”

“아! 그렇군요. 안타깝습니다.”

“멀리서 오셨으니 저녁이나 들고 가시겠소? 소비포 앞바다에 전라좌수군 배들이 경야를 하고 있소.”

“저희가 대접해야 하는데 거꾸로 됐으니 민망합니다.”

“우리는 같은 편 아니겠소? 같이 갑시다.”

이민호는 착호갑사와 산척 30여 명을 소비포로 데려갔다. 그 사이 이영남은 처녀 사냥꾼과 정분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말을 나란히 몰면서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이영남이 입은 부상 부위를 처녀 사냥꾼이 치료해준 듯했다.

소비포에 도착한 이민호는 외륜선의 식량 창고를 털어 착호갑사와 산척들에게 아주 잘 대접했다. 전체 조선군이 이 정도 실력만 된다면 세계정복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아 대접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산에서 수십 년 살면서 호랑이를 잡는 사람들을 쉽게 얻을 수는 없었다. 경상도 거창에서 김면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산척들은 그 수하로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 작품 후기 ============================

본격적인 해전은 내일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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